< 김현정 한국산문회장님이 자유계시판에 올려놓은글을 퍼왔음>
수필은 변해야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견해와
이같은 ‘수필의 변화 모색에 심히 우려를 표하는 견해’ 의 글 두 편을 함께 올립니다.
서로간에 공방의 요소는 다분히 강하나 결론은 각자에게 달린 일,
두 글을 비교하며 많이 고민해보시고 앞으로 수필의 방향성을 설정하거나
각자 추구하는 수필이 어떤식으로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유익한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원님들, 추석 명절 잘 지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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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변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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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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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는 오늘 두 분 선생님께 한 가지 질문만 하겠습니다. 수필이 변하려면 남녀 간의 성문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조금은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와 소설에서 보여주는 적나라한 포르노 상태로 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청자연적에 준하는 운우지정이란
막연한 표현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선 김에 평소 제가 생각하고 있는 수필이 달라져야 하는 나름대로의 소회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제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을 조목조목 잘 정리해 주셔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제시해 주신 수필의 갈 길은 무지개가 뜨는 곳처럼 방향은 분명한데 그 곳까지 가야 할 구체적 방법은 아직도 모호합니다. 백내장
환자가 사물을 보듯 흐릿하기만 합니다.
저는 ‘수필이 엄청나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수필이
달라지려면 허구성 논쟁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러한 소모성 논쟁은 발전 쪽으로 달리는 전진 에너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자는 사람은 그런 글을 쓰면 될 것이고, 허구는 용서치 못해도
상상력을 대체용품으로 활용하자는 이들은 아름다운 상상을 발휘하여 글을 꾸며 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구나 상상에 돌아 앉아
경험한 사실만으로 글을 쓰시는 분들은 그렇게 나아가시면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아 허구논쟁을 종결짓고 뜻을 한 곳에
모은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각자의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지나고 보면 소득 없는 논쟁에 시간만 낭비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다양성을 요구하듯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와 소설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가는 동안 수필은 고정관념이란 틀을
깨지 못하고 벽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가르친 1세대의 잘못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개혁과 실험을 시도해 보지 않은 후세대들의 책임이 오히려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필이론이
지나치게 도덕적 인간이기를 요구한 나머지 문학이 가야할 길인 감추어진 욕망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수필이 오랜 세월 동안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에 포섭되어 욕구와 욕망의 바다로 내딛는 수필가들의 아장걸음까지 눈치를 살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시작된 우리 현대시는 김소월 이상 김수영 서정주 김춘수 등에 의해 갈고 닦이고 그리고 수많은 난해 시와 무의미 시를 생산해 내는 시인들에 의해 오늘의 시로 성숙했습니다. 소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
런데 유독 수필만은 실험과 도전 정신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수필의 한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군”하고 말씀하시는
어른들도 물론 계실 줄 압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상의 ‘오감도’정신을 수필로 흉내 내는 사람이 없었으며 투철한 실험 정신으로
난해 수필을 시도해본 수필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은 ‘수필은 고고해야 한다.’는 매듭을 풀지 못하고 위리안치 상태에서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수필이 고향. 가족. 아이 키우기. 학창시절. 외국여행기란 틀에 박힌 주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의 지적대로 수필은 변해야 합니다. 편집자도, 비평가도, 수필가 자신도, 그리고
독자까지 변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다른 장르의 문학인들로부터 옳은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며 신춘문예의 한 축에 영원히 끼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의 문학 판에서 제명되거나 추방될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서울 경기
지역에서 좀 떨어진 대구 부산 대전 경남 전북에는 수필이 신춘문예의 한 장르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들이 수필을 신춘문예의 장르로 넣어주지 않는 것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필 관계자들의 노력과 열성이 부족한 소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잡지 만들고 책 팔고 신진작가 등단시키는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필잡지를 만들고 있는 발행인과 편집
책임자끼리라도 서로 반목하지 말고 힘을 합쳐 원로들의 조언을 얻어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간 신문에서 수필을 신춘문예의 한 장르로 받아 준다면 수필의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얘기가 잠시 신춘문예 쪽으로 샜습니다. 죄송합니다.
수필은 재미가 있는 가운데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삶의 영역으로 확대도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 속에 철학까지 끼어들면 더 좋겠지요.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간한 기술자가 아니고선 원고지 열 몇 장에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모든 것 다
접어두고 지금부터 수필은 낯설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주제가 되고 소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시대에는 낯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파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도 글을 쓰는 기법이나 기교도 신선해야
하고 발랄해야 합니다. 모든 예술의 지향점도 그러하고 아트 전반의 추세가 그렇습니다.
최근 삼성사건으로 유명해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옛날 풍경화만 봐오던 눈에는 그림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의 야요이 쿠사마가 그린 동그라미로
그린 호박 그림은 그림 같잖은 그림이지만 실제로 잘 익은 누런 호박이 오천 원 정도 인데 비해 무려 만 배인 5~6천만 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낯설기 때문입니다. 낯선 것은 신기하고 신기한 것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몇 달 전에 타계한 입
생 로랑은 남성 전용 턱시도를 여성에게 접목시켜 세계적으로 히트 시킨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뉴 에이지 뮤지션으로 제3세대 음악을
이끌고 있는 야니가 타지마할, 자금성, 그리고 아크로폴리스의 헤롯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낯설고 신기하여
음악 애호가들에게 경이롭게 느껴졌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은 오페라도 벗는 시대입니다. 오페라에서
‘살로메’역을 맡은 마리아 에윙은 ‘일곱 베일의 춤’을 부르다가 일곱 베일의 망사를 완전히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지난해 뉴욕시티
오페라단이 공연한 ‘모세와 아론’에선 합창단원 모두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대 발레는 발레리나들이 발레복과
토슈즈를 벗어 던지고 무대에 오릅니다. 또 일본의 전라 여성 관현악단은 샌달 하나만 신고 바이올린과 첼로를 켜고 풀륫을 불었으며
지휘자 역시 지휘봉 외엔 별로 걸친 것이 없는 공연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집니다. 박상륭이란 소설가는 ‘잡설품’이란 난해소설을 시대의 화두로 던져두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와 철학의 단서들을 조합하여 소설에 영문자까지 섞어 아주 낯설고 불친절한 소설 읽기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중
국의 한소공은 ‘마교사전’이란 새로운 형식의 자전적 소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 속에는 가난한 장애자 남동생을 보러
왔다가 여자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가련하여 “그냥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만이라도 여자의 맛을 느껴
보렴”하고 몸을 주려한 누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동생은 아무 말 없이 비바람 속으로 떠납니다. 성이 아무리
문란한 시대지만 이런 이야기는 낯설고 신선합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예술 전반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대도 수필을
고고한 공식에 대입하고 치수로 재단하여 맞느니 안 맞느니를 따지고 있습니다. 수필은 변해도 아주 단단히 변해야 합니다. 구각을
벗지 못하고 음풍농월이나 하고 있으면 신춘문예는커녕 지금 자리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필 속에 성적인 묘사도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와 소설이 보여주는 포르노 상태로 진입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모험성
짙은 실험수필도 기대해 볼 만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대구의 문학 평론가이자 수필가인 신재기 교수는 ‘나는
계획한다. 분서를’이란 신작수필집 서문에서 “수필을 떠나라. 울타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내동댕이쳐라. 이젠 수필 아닌 수필을
쓰자.”고 했습니다. 수필이 신선하게 변하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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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예술위원회는 2009년 창작지원 모집 요강을 발표하면서 수필을 해당 장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해당 장르는 장편소설 시 시조 평론 동시 동화입니다. 그러니까 수필은 문학이 아니란 말을 이렇게 문서로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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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진실의 순도와 인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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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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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필문단의 현실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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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근 들어 수필문단의 흐름을 보면 걱정스럽다. ‘수필이 변해야 한다.’ 며 실험수필이라는 형태로 수필의 본질을 벗어나는 글을 쓰고
있다. 시(詩)와 소설의 형식으로 쓴다면서 2인칭, 3인칭으로 써서 수필이라고 발표를 하고 있다. 시는 시의 형식으로 써야하고
소설은 소설의 형식으로 써야한다. 수필은 반드시 화자가 작가이어야 하는 1인칭의 문학이다. 다만, 문장 언어에서 시, 소설,
동화적인 분위기는 낼 수 있으나 제3자를 발언자나 해설자로 내세울 수는 없다. 수필에서 허구(虛構)는 금물이다. 서정성의 분위기나
감동을 살리기 위하여 과장이나 허구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또한 수필의 문학성에 대한 문제를 운운하면서 억지로 끼어 맞추는
비유, 형상화, 심상과 의미 확장을 하다 보니 진실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상금이 주어지는 공모상과 신춘문예
수필작품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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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실의 순도(純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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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보고, 듣고, 행한 일에 생각과 느낌이 붙는
글이다. 개인적이고 고백적인 것의 생각과 느낌을 사상이라고 해도 되고 철학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얘기를
허구로 쓰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 수필의 본질이다. 이 수필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변할 수가
없다. 모든 문학은 허구이므로 수필도 허구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약간의 거짓(허구)을 허용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어디서 어디까지가 작자의 진실인가를 믿을 수 없게 하고, 결국에는 모두가 거짓이라는 인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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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필이 진실이어야 하는가를 예로 보자.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베풀지도 않은 선심을
베풀었다고 한다면 독자는 일단 감동을 한다. 하지만 수필이 이와 같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글은 아니다. 또한 감동을
주려고 소재가 되는 인물에 대하여 약간의 장애가 있는 것을 극한 장애가 있는 걸로 꾸며서 이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모르는
독자는 감동을 받을 수 있으나 이를 아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어떨 것인가. 문학 자체가 불신을 받게 되며 작가 역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글의 소재나 제재는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한다. 단, 그 내용으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상상을
도입하여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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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서는 서정성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쌍의 연인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헤어져야 하는 감정을 썼다고 하자. 쾌청한 날씨에 오지도 않는 비가 왔다든가 눈이 왔다고 한다면, 분위기가 매우
서정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써야만 그런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쾌청한 날씨인데도 가슴 속에서는 가을비가 내려
스산하였다’라든가, ‘눈은 오지 않아도 가슴 속으로는 눈발이 어지러웠다’라고 하면 분위기는 살릴 수 있다. 오지도 않은 눈이
왔다든가 비가 내렸다라고 쓰는 것은, 표현의 기량이 모자라는 것일 뿐이다. 흔히 ‘허구’라는 말과 ‘상상’이라는 말의 해석을
혼동하기도 한다. 사전 풀이대로 보면 ‘허구’란, 없는 사실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을 말하고, ‘상상’이라 함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하여 마음속에서 그려보는 일, 또는 어떤 일이나 남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비가 오지 않은 것을
‘왔다’고 한다면 허구이고, ‘올 듯하였다’, ‘올 것 같다’, 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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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 감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과장을 하거나 허구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 체험을 자연스럽게 진술하여 독자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근래 공모상이나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문학성’이라는 틀에 맞추기 위하여 작품 소재에 대한 억지의 비유와 과장으로
의미 확장을 하여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다. 수필은 작가의 인격체가 드러나는 개인적 글이므로 진실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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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본질과 관련하여 예화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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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에서 <우동 한 그릇>이라는 글이 낭독되었다. 저들의 가난했던 전후(戰後) 시절을 묘사한 짤막한 이 글에
회의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 글은 ‘실화’라는 전제로 거리를 울리고 일본 열도를 울렸다. 그런데 얼마 후 ‘구리 료헤이’라는
작가가 창작한 ‘동화’로 밝혀지자 모든 국민들은 괜히 울었다며 투덜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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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수필로서 감동케 하는
요소가 있고, 동화는 동화로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동이 있다. <우동 한 그릇>이 ‘실화(수필)’라는 전제였기에
일본 열도를 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허구(동화)의 감동과 진실(수필)의 감동은 위와 같이 받아들이는 각도가 다르다.
진실이란, 사실의 참됨[眞]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가끔 사회면 기사에서 딱한 사정의 주인공에 대해 독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까지, 물심양면의 격려를 보내는 것에 감동한다. 만일 이런 기사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사기를 당했다고 할 것이다.
수필의 허구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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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허구에 의한 감동과 실체적 진실의 감동은 받아들이는 각도가 다르므로, 작가를 드러내는 수필은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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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품위가 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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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작자(作者)드러나는 글이므로, 문장 한 구절로도 쉽게 작자의 인품을 읽어낸다. 이것이 작자의 품격과는 무관하게 생산되는
다른 부문의 문학 작품과 다른 점이다. 다른 문학은 작자가 화자를 내세워 청자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저속한 언어를 써도 무방하다.
그러나 수필은 화자가 작자이므로 문장에 품위가 있어야 하며 감정을 여과시켜야 한다. 사람은 서로가 인격적인 것으로 맺어지는
것이므로, 수필은 독자와의 사이에서 이런 관계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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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격은 대체로 두 가지 면에서 드러난다.
용어 선택에서 오는 것(문장)과, 작자의 품위가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것이 그것이다. 수필이 대중화하는 추세에 따라 수필권이
넓어지는 것은 좋으나 격이 낮아져서는 안 된다. 수필은 개인적, 인격적 글이므로 품위가 따라야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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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필에서의 인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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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에는 대개 작품 전반에 걸쳐 따스한 인간미나 인간적인 정겨움, 또한 인간적 체취 같은 것들이 숨결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들의 마음속에 전해져 은은한 감동과 공감을 안겨 준다.
또한 이것이 수필이 지닌 가치요, 특성이다. 수필이란 본래 따뜻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마음이나 정(情)에 바탕을 둔 문학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마음과 정을 이어 주는 연결 고리와도 같은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수필을 통해
인간간의 마음과 정을 교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고 정을 나누며, 감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수필은 ‘보다 인간적인 문학’이며 ‘정(情)의 문학’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들이
따라오지 못할, 수필이 지닌 장점이다.
더욱이 수필은 작가의 체험이나 보고 듣고 느낀 것들, 또는 자신의 심경 등을 과장이나 꾸밈없이 진솔하게 그려내는 문학이다. 또 허구라든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교 같은 것들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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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들보다 더욱 인간적이며, 호소력도 크다. 그야말로 수필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진솔하게 드러나 보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문학인 것이다. 수필을 읽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친근함이 있으며 작가의
따스한 인간적 체취가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뿐만 아니라 친근한 이웃이나 친구 또는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 정겨운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 자주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로는 훌륭한 교수나 선생님 등으로부터
강의나 가르침을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왠지 부담스럽다거나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정겹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수가 많다.
또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수필에 지식이나 지성이 담겨 있더라도 그 속에 따스한
인간미나소박한 인간적 체취가 함께 실려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식의 나열이나 ‘강의 노트’또는 ‘훈계로의
글’이 될 뿐 수필이라고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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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수필에는 지성미와 함께 인간미도 함께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미인이라면 단지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성미와 인간미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인간적으로 흐르는 ‘피’가 서로 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수필’일 수박에 없다. ‘살아 있는 수필’, ‘생명력이
넘치는 수필’은 작가의 따스한 체온과 ‘피’가 수필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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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폴리는
수필문학에 있어서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기능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대화적인 것이 에세이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 짓는 시금석’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대화의 기능’이나 ‘대화적인 것’이란 다름 아닌 작가의 인간적인 체취나
피가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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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아름다운 수식어를 많이 늘어놓고 문장이 아름답더라도, 또 글속에 지식이나 지성이 넘쳐흐른다 해도 그 안에 인간적인 체취나 피가 흐르지 않으면 수필로서는 생명력이 없다. 수필은 곧 인간미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구활
수필가
△경북 경산 출생
△매일신문 문화부장·논설위원 역임
△현대수필문학상, 대구문학상, 금복문화예술상, 원종린문학대상 수상
△수필집『하안거 다음날』,『바람에 부치는 편지』
△선집『정미소 풍경』,『어머니의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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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현
시인·수필가
△경북 봉화 출생
△《문예한국》에서 시,《문학사랑》에서 수필로 등단
△《생각과 느낌》발행인 겸 주간 역임
△《영남문학》발행인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경찰공무원 역임
△영남대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강의
△한국문인 수필문학상, 대통령 기장, 각 부처 장관, 경찰청장 표창 등 30여 회 수상
△저서『수필문학의 이론과 창작기법』외
첫댓글 두분의 의견이 다 지당한 논리를 폈다 생각하지만, 저는 쬐끔 더 수필이 변해야 한다는 편에 서있습니다.
역사가 보여 주었드시 예술은 새로움을 향해 부단히 창조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수필이 문학장르에서 설자리를 잃어가는게 서운합니다.
'수필은 변해야 한다'가 아니라 '수필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예술이 변해왔고 변하고 있는데 유독 수필만이 변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창작예술에 있어서 새로움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보다 많은 고민을 해야 되겠지요.
솔로님의 수필'도' 변해야 한다는 표현이 재미있군요. 다 변하는데 수필만 금테 두른 것이 아니니...
최근에 움베르토 에코나 하루키의 수필 등을 읽는데 많이 다르더군요. 한국처럼 수필을 쓰는 데는 이제는 없는 것이 아니가 하는 의심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