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대구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덩달아 저녁도 늦어졌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자연내음 그득한 데크에 나 앉았다. 이맘때쯤이면 이른 아침과 저녁나절에 찔레꽃이나 쥐똥나무꽃향은 물론 뭇 나무들이 뿜는 수향이 밀려와 도도한 그 향에 흠뻑 취하곤 한다. 벌이 많이 사라져 꽃들이 제 구실을 하기 힘들지만 숲에서 번져나오는 향기만은 여전한 것 같다.
향도 향이려니와 이산 저산의 소쩍새 소리와 낮게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화음을 잘 이루어 봄밤의 정취를 한껏 돋우어준다. 이따금 스타카토 식으로 들려오는 솔부엉이 소리, 두 마디씩 끊어 우는 벙어리 뻐꾸기는 마치 우주의 신비함을 변주하는 듯하여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아스라이 빠져드는 듯하다.
훈풍이 불어오자 소동파의 시구가 불현듯 떠오른다.
봄밤의 한 시각은 천금에 값한다
꽃의 맑은 향기와 달 그림자
머릿속을 맴도는 예의 시는 봄밤의 느긋한 상념을 송두리째 빨아들였다. 조금 늦게 떠올렸다면, 아니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면 좀 더 봄밤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적확한 표현은 떠오르자마자 나의 느리고도 설익은 봄밤의 애상을 가차없이 물리쳐 버렸다. 아 천년이 넘도록 봄밤의 정서를 이렇게도 알뜰히 틀어쥐고 있는 그 천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아를 자연에 맡겨보고자 봄날 마당에 내려섰건만 뜻하지 않은 동파의 시구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
노랫소리와 피리소리 사라진 누각은 고요하기만 한데
그네 뛰던 뒤뜰도 밤은 깊어가네
어느새 달은 지붕과 소나무 사이에 걸렸다. 내가 살아가는 지구 행성을 떠올릴 때는 바로 지금이다. 지붕에 닿을 듯한 벚나무 가지가 소나무에 걸쳐 있고 그 사이로 뜬 보름달을 보노라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스윽 나타나는 것이다. 이쯤되면 소동파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미풍이 귓가를 스치는 봄밤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날들이 이제는 별로 없다. 냉기를 느끼거나 아니면 훅 더운 밤이 대부분이다. 동파의 시가 그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절묘한 시구 탓도 있지만, 푸른점 지구가 앓는 날이 많아 제대로 봄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지는 훈훈한 밤이 아쉽기 때문이리라.
첫댓글 자연에 들어 맛볼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라 여겨집니다
살같이 흘러가는 세월에 무력함을 느끼고
온난화로 인한 계절의 시계는 느닷없이 변해가고
멋들어진 정취를 붙잡아 둘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현대인은 과거사람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접한다고 하지요. 그 정보가 얼마나 사람다이 쓰이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옛 문인의 정서를 가늠하자니, 지구행성의 몸살이 먼저 떠오르네요.
선생님 글을 읽는 한 시각도 천금에 값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