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따로 국밥의 인생을 살지 말라!
에베소서
4:13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의 하나됨'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에서는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이
모두 성령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힘쓰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에서 '믿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하는 믿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 일'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것으로서 '믿는 것'과 '아는 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의 "온전한"이라는 헬라어 '텔레이온(τέλειον)'은 '성숙' 또는 '사람이 완전히 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14절에 나오는 '어린 아이'와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히 성숙한 상태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지도자들만 온전히 성숙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이 모두 믿음과 지식이 하나가 되어
성숙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앞 7-12절에서 목회자의 직분과 그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목회자와 교사들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성도들을 온전케 하도록 직분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그 말씀대로
교회에서 여러 모양으로 봉사를 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의 방침은 개개인의 성장뿐만이 목표가 아니라, 개개인의
성장을 통해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십분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교회 전체가 성숙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A라고 가르치고 교사는 B라고
가르친다면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온전히 성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를 온전히 성장시키기 위해서 목사와 교사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신학교만 나와서 안수만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더이상의 성경에 대한 연구를 하지않고, 그저 바쁘게 교인들을 돌보고 교계에서 한 자리를 얻으려고 이리저리 분주한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목사와 교사들은 더이상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구석에 방치해 놓은 것과 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의식주 문제와 정욕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교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서 양떼들을 성장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눈치만 보느라 그들이 원하는 종교클럽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13절의 '장성한'이라는 헬라어 '헬리키아스(ἡλικίας)'는 '나이'와 '키'의 2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첫째로 나이(age)가 들어서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요 9:23).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히 11:11). 둘째로 이 말은 '키(stature)'가 자랐다는
말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이 말은
'분량'이라는 헬라어 '메트론(μέτρον)'과
함께 사용할 때에 '영적으로 자라는 것' 즉 '영적 성장'의 의미를 갖게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장성한 분량(μέτρον
ἡλικίας, the measure of the
stature)"이라는 말은 외적으로 키가 자라고 나이가 먹어서 어른으로 성장한 것처럼 영적으로 성숙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 성숙'은
믿음만 가지고도, 또는 지식만 가지고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셔서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지식을 믿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하나로 이끌어가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여 만들어놓은 교리들이 성경에 입각한 것인지를 잘 검토하여 성경과 일치된 것은 받아들이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신학이 나오는 것이며,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설교가 강대상 위에서 선포되는 것이며,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빛과 소금이 아닌 어둠과 설탕의 역할을 하며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을 피해 죄책감과 열등감과 걱정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식 따로',
'삶 따로' 즉 따로국밥처럼 믿음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때가 되면 하나님을 믿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자녀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들의 해야할 일이 너무나 힘들거나 귀찮기 때문에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해야 할 의무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또한 자녀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6:7에서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녀가 우상이 되어있습니다. 조금만 말씀대로 훈계를 하면 아이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배우자에게 아이들이 싫어하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서 부부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녀는 계속해서 그들의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하심 속에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교사가 성도들을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인도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집에서는 부모 특히 아버지가 자녀들을 말씀으로 가르쳐서 그들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몸을 이루는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매일
새벽에 온 가족이 일어나서 아버지의 주관하에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매일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갖지만,
유대인들은 매일 집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시간에는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가 또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해야 하며 먼저 생각이 부지런해야 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그리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귀찮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라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모양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비전을 갖고, 그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만이 주께서 주시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경과
하나님을 싫어하도록 지나치게 스파르타식으로 하는 부모와 목회자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반면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가페 사랑을 잊는 순간, 우리의 손에는 회초리만 남게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배워야 합니다. 매를 들 때가 있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사랑도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을 주어야 하지만, 훈계가
없는 사랑은 오히려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는 말과 실제의 삶이 다르다면, 그의 설교에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 부모가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을 보여주면, 자녀들은 아무리 야단이나 매를 맞고 매일 훈계를 들어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교인들
눈치보느라 제대로 성수주일이나 십일조, 그 외의 성도로써 해야할 의무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코 장성한 분량의 교회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고 세상적인 말로 가르친다면 그러한 자녀들은 세상적 즉 마귀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목회자와 교사들이 가르치며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지만,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 베드로는 모든 믿는
자들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모든 백성을 대표하여 예배를 준비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속죄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로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따로 국밥'처럼 지식과 믿음의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자녀나 교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구석에 몰아넣고 지극히 인본주의적으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교회에 가는 것보다 학교나 학원에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까? 생활이 어려울 때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까? 형편에 따라 주일에 예배만 드리고 자기 일을 해도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까? 주일에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이 성수주일하는
것이라고 잘못 가르치지는 않았습니까?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 않고, 학교 공부를 하나라도 더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까? 집안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녀들 앞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아니면 신문이나 TV나 인터넷을 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왜
지금의 자녀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까? 자녀들이나 교인들은 말씀을 듣고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말씀은
듣는 순간에 잊어버리는 것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들을 때에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기억력에 문제가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동은 보면서 두뇌에 각인이 됩니다. 보는 순간, 입력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컴퓨터가 '자동 저장'하는 것처럼 무조건 머리와 가슴에 남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버리려고 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우리 안에 저장되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당신은
교회와 가정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살아왔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떠한 것을 보고 들으며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당신의 양떼들과 자녀들은 그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살아왔는지, 즉 당신이 무엇을 말했으며,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님 앞에서 이러한 것들을 묵상하는 가운데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만약 회개할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지극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이 많이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다윗처럼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를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는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우루루 몰려왔다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주님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은 제자의 삶이었습니까? 군중들의 삶이었습니까? 군중들은 힘쓰지 않습니다. 군중들은 나서지 않습니다. 군중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는 것을 편안해 합니다. 넓고 편한 길을 좋아합니다. 군중들은 구경꾼들입니다. 그들은 구경하다가 재미있거나 신기한 것이
있으면 열심히 따라다니다가 흥미를 잃어버리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사라져버리는 안개와 같은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비록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을지라도 '기드온의 3백용사'처럼
준비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크게 쓰이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그 길을 선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제 삶은 자주 '따로 국밥'의 인생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로는 경건한 척,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아는 척 하면서도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교인들이 다
알고있는데도 제 입으로는 경건한 사람인척 말하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말을
하면 뭣합니까?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것은 제가 그들에게
그렇게 보여주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제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도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키와 지혜가 자라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간 것처럼 저도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저는 자라면서 상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어둠의 영역이 크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를
사랑해주지 않거나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더욱 더 어둠을 주위에 뿌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악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더욱 더 길어지고 또 엉켜서, 끊지도 못하고 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인해 모든 환경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마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음으로 제 삶과 교회가 피폐해졌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선악과는 바로
다름이 아닌 저에게 상처를 주었던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계속해서 그 마음이 산더미처럼 높아져서 더욱 더 용서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까지 잘 자라서 가정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한 몸이 되도록 살아왔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저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주께 고백하오니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늘 그 동안 제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왔는지 모두 기억나게 하셔서, 그것들을 다윗처럼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여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주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게 하시고, 오직 성령충만함 속에서 성령께서 깨닫게해주시는 그 모든 허물과
죄를 모두 제 입으로 토설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저 한 사람이
새롭게 변화됨으로 제 가정이 변화되고 제 교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 동안 자녀들과
교인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잘못된 행동을 보였왔던 모든 것들이 주안에서 변하여, 이제는 제대로 가르치고 온전한 크리스천의 성숙한 삶을 보이므로
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저에게 귀한
깨우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며,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