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의 명재상 안자(晏子)는 수시로 민정을 살폈다. 어느 날 민생 시찰 행렬이 그의 수레를 모는 마부의 집 앞을 지났다. 마부의 아내가 담장 너머로 보니 남편이 수레 위에서 우쭐대며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고 있었다. 마부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남편이 놀라 이유를 묻자 아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재상께서는 6척도 안 되는 단신이지만 숙고하는 얼굴에서 깊은 학식을 절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8척 거구면서 남의 수레나 끄는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실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무슨 희망을 가지고 당신 같은 사람과 살겠습니까.”
요즘 미국 방문 중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활약 소식에 생뚱맞게도 『논어』에 나오는 마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권당 대표를 마부에 비유하기가 외람되나 생각이 그리 향하는 걸 어찌 막겠나. 그의 훌륭한 풍채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호인상과 몸피로만 보자면 그의 별명인 대장 너머 그가 되고 싶어 할 그 자리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그의 언행은 비록 거들먹거리는 것은 아니었더라도 마부에게나 어울리는 부박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초대 미8군사령관 묘소에서의 큰절은 과공(過恭)까지는 아니더라도 틀림없는 오버였다. 한국에서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하던 습관이었거나 한국 보수층에 보이려는 정치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진 애교로 봐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나머지는 명백한 실수였다.
메릴랜드 주지사를 만난 자리에 배석한 록히드마틴 관계자에게 “F-22를 팔아 달라”고 한 건 경솔함의 극치다. 비록 농담이었다지만 한 나라의 집권당 대표가 외국의 무기판매업자에게 던질 농담이 아니었다. 수출이 금지된 전략무기인 F-22가 해금될 경우 한국도 구매의사가 있음을 밝힌 꼴이 되고 말았다. “알면서 그랬다면 명백한 국익 훼손이며 몰랐다면 외교 무능력”이라는 야당의 비판에 할 말이 없게 됐다.
한국 특파원들에게 “중국보다 미국”이라고 한 발언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 한·미 동맹을 강조한 것이라 백번 이해해도 굳이 중국 얘기를 붙일 이유가 없었다. 대통령이 그토록 중국에 공을 들인 성과와 우리 외교 당국이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전략적 모호성’을 한 방에 깨뜨렸다.
동포간담회에서 “진보좌파의 준동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한 것 역시 균형감을 상실한 발언이었다. 그동안 국립 5·18민주묘지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러 다닌 이유가 뭔지 궁금하게 할 정도였다. 통합의 지도자란 이미지도 총선 승리 앞에선 주저 없이 던져 버릴 수 있는 장식품 정도에 불과했던가.
좋게 봐주자면 사람 좋은 김 대표가 모처럼의 외유에 들떠 떨어뜨린 실언이었을 터다. 하지만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도 대권행보로 누구나 생각하는 자리에서 보인 언행으로는 지나치게 준비 없고 경박하다. 『중용』은 지도자의 언행이 어때야 하는지 이렇게 말한다. “말하면 세상 어디서든 준칙이 되고 행동하면 세상 어디서나 법도가 된다(言而世爲天下則行而世爲天下法).”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키 위에서 나불대는 검불만큼 가벼워서야 되겠나 말이다.
안자의 마부는 아내의 따끔한 질책에 대오각성했다. 늘 자중자애하며 글을 익히고 학문도 열심히 닦았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적이 없다고 3년을 도운 참모를 한칼에 자른 까칠한 안자가 나중에 대부로 추천할 정도가 됐다. 김 대표에게 필요한 게 이런 변화다. 안자의 마부가 그 후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됐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 안자의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김 대표에게 들려주고 싶은 위정자의 자세다. “뜻은 백성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높은 게 없으며, 행동은 백성을 즐겁게 해 주는 것보다 더 두터운 게 없다(意莫高於愛民行莫厚於樂民).”
이훈범 논설위원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얺으려면]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결과로 형성된 틀로 되어 있다. 아직도 시민계급을 위주로 한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들도 없지 않지만, 그런 나라들도 대부분 ‘민주(民主)’라는 용어를 국명에 포함시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가 관리 이념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이 시민혁명의 영향 아래 있다.
소위 선진국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시민계급을 성숙시킨 나라들이다. 시민계급의 성숙은 뭐니 뭐니 해도 그 계급성을 발휘하는 동력인 경제력을 가졌는지가 결정적이다. 자본 축적 없이는 시민계급으로 형성되기도 힘들고 계급적 주도권을 발휘하기도 힘들다. 그 다음은 계급적 책임성이다. 왕이나 영주가 가졌던 책임성을 시민이 갖게 된 것이 시민혁명 아니겠는가. 따라서 시민계급을 위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책임성을 자각하는 성숙된 시민의 존재 여부가 그 국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호의 운명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괜히 하는 과민한 걱정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의 국운은 한계에 왔나’라는 글에서 권순활 논설위원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며 대한민국의 “국운 융성기는 이제 끝난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호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위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중진국 트랩에 갇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목표를 합의 도출하지 못하고 남 탓만 하며 분열적 대결로 시간을 탕진하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은 성숙한 시민계급이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으로 무장하여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어 나가는 나라다. 그런데 이 책임성은 시민적 수준에서 나온 책임성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사회적 책임성을 드러내며 정치활동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주체적 자발성에서 발휘되는 책임성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이념에 대한 맹목적 신봉에서 나오는 책임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멀쩡한 사람도 정치권에만 들어가면 이상해져 버리는 경우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책임성은 주체적 자각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시민의 책임성이 아니라 맹목적 믿음에 근거하는 매우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책임성일 뿐이다. 이런 정도의 책임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높이가 바로 중진국이다. 이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여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자각에서 나온 책임성을 발휘해야 한다. 권 논설위원의 글에 달린 댓글 가운데 하나는 “여기 평자들만 봐도 누구 하나 어떡하면 내가 기울어져 간 국운을 바로잡을까 생각지 않고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로 이런 댓글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성으로 자각하는 것이 시민적 교양의 출발이다.
시민적 책임성을 가진 사람은 제3자적 입장에서 비판만 일삼지 않고, 직접 행위자로 등장하려 애쓴다. 청탁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그 일이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스스로는 절대 청탁을 하지 않거나 청탁을 거부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춘다. 끼리끼리 문화를 비판하기 전에 동문회나 지역의 암묵적 정서를 이겨낸다. 앞차가 끼어들려고 방향 표시등을 깜박이면 오히려 속력을 높여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준다. 우리 사회가 너무 성공 지향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는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한국 사회가 이웃 간에 정이 사라지고 각박해진다고 비판하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책을 읽지 않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책을 읽는다.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학습 습관을 기른다. 학연, 혈연, 지연에 좌우되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가 승진하고 싶을 때 학연, 혈연, 지연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남의 불통을 탓하기 전에 불통하는 자신부터 반성한다. 매우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결론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성숙한 시민계급의 성장 없이는 위기 돌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우선 시민적인 교양을 갖추는 일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구입해야할 도서
{스포츠와 여가}
{칠드런 액트}
{미스터 메르,세데스}
{폭력은 어디에서 왔나}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권력과 부}, 로널드 핀들레이
{히틀러 연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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