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살, 동생이 2살때
625 전쟁이 발발하고, 우리 아버지는 이때 인민군한테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가셨다고 하는데, 그 이후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셨다.
그때 엄마는 임신중셨는데, 5살인 나는 걸리고 2살 동생은 업고 피난민을 따라 걸어서 걸어서
몇주(?)만에 간신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먼저 피난 가신, 충청도 아버지 고향에 도착했다한다.
(피난길이 너무 힘들었는지.. 아기는 저절로 유산이 됐다고..)
나는 피난시절 충청도에서 국민학교 1학년으로 입학을 했었는데
어느날 학교에 갔다와서 엄마한테
"엄마 "기름집"이렇게 쓴곳이 있어서 들여다 봤더니 고소한 냄새가 나"
하더라고.. 아마도 이때 학교에서 한글을 깨쳤던것 같다고 엄마가 말씀 하셨다.
피난에서 돌아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나, 동생)는
청파동에 있는 할머니 언니댁에서 한동안 살았었다.
그때 1951년(?)에 한미 친선 사진대회가 있었는데
내동생과 내가 어린이 모델로..
무용가 김백봉씨는 어른 모델로 뽑혔었다.
그날 많은 미국, 한국 카메라맨들이 덕수궁에서 숫한 사진을 찍었는데
그래서 그해 어린이날에는 우리들 사진을 넣은 커다란 어린이날 포스터들이
서울시내 곳곳에 붙어 있었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신 혜택인지 피난에서 돌아온 다음해 경기도 양주군에
일본사람이 살던 적산가옥과 과수원 3000평을
할아버지 이름으로 5년에 나누어 갚기로 하고 불하받아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나 그리고 동생등 5식구가 나 과수원이 있는 시골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때 큰아버지께서는 엄마한테 "아~ 이과수원은 장래 인석(내동생)이가 크면
인석이 과수원이 될껍니다" 라고 말씀하셨었다.
우리는 그 시골동네 교회에 다녔고,
육이오 전에 여고에서 가사선생님을 하시고 "대한부인회 회장"도 하셨던
할머님은 솜씨가 좋으셔서 구제품을 뜯어서 나한테 예쁜 옷들과
코트등을 만들어 주셔서 나는 그 시골에서 멋쟁이 아이였었다
나는 무용을 잘 해서 크리스마스때랑 교회행사가 있을때 무용을 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효석이는 어쩜 저렇게 잘하지, 효석이 나올때가 제일 재미 있었다."
칭찬을 받은 그때 나는 그 시골동네에서 스타였었다.
그때 우리주일학교가 소문이 나서 우리는 육군사관학교에 초청을 받아
그 곳 강당에서 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교관들을 위해 공연을 했는데
공연후에 크게 대접을 받았고 특히 무용을 잘 하던 나는 많은 사람들 한테 칭찬을 받았었다.
나는 그 동네에 있는 시골학교에서 공부도 잘 했었다.
엄마는 집안일 농사일... 시집살이를 하셨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바람이라도 나서 시집을 갈 까봐
파마도 못하 게 하셔서..엄마가 저렇게 생머리를 핀을 꼽고 사셨다.
부잣집에서 외아들 이셨던 할아버지는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에도 손톱하나 까딱 안하시고
돈 생기면 사업하신다고 갖고 나가서 쓰는것 밖에 모르시는 분이셨는데
그때 계라는 것을 모르던 그곳 시골사람들과 할머니는 계를 시작하셨었는데
할머니가 오야로 계돈을 타신것을 할아버지가 사업하신다고 갖고가 다 날려버리셔서
계가 깨지고.. 동네사람들이 허구 헌날 몰려와서 계돈을 돌려 달라고 악을 썻었다
그때 정현아줌마 남편이신 김용준 목사님께서 엄마가 시집살이에.. 집안 살림에, 그리고 힘든 농사일에..
고생을 하시는것을 안타까워 하시며 엄마를 아저씨 시무하시던 교회에 유치원 선생으로 취직을 시키셨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셋방을 얻어 이사를 나오셨다.
엄마가 유치원 선생님 봉급을 받으시던 이때 엄마랑 동생이랑 우리 세식구는 맛있는것도 사먹고
참 행복했던것 같다. 잘 먹으니 내 키도 이때는 자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결국 과수원 5년 불하받으신을 다 갚지 못하셔서 큰아버지가 나머지를 지불하시고
과수원은 큰아버지 명의로 변경이 됐다.
이 때 할머니가 암으로 편챦으셔서 병간호 할 사람이 필요했고,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큰아버지가 엄마한테 "과수원으로 돌아오세요"라고 부탁을 하셨었던것 같다
큰아버지는 아마도 엄마한테 우리들의 중, 고등학교, 대학 등록금 다 내 주시겠다고...
그리고 과수원이 팔리면 집을 한채 사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것 같다.
큰아버지가 어려운 엄마는 싫다는 소리도 못하고 "예" 하고 유치원을 그만두시고
나 진명여중 2학년 때 우리 데리고 경기도 양주군으로 다시 이사를 오셨다.
내 고생은 이때 시작이 된것 같다.
경기도에서 서울 광화문에서도 30분 더 걸어서 가야하는 효자동에 있는 진명에
장거리 통학을 하느라, 그리고 신촌 이화여대까지...
첫댓글 내일 다시 오려다가 유치원사진을 보니
저 어렸을떄 유치원 졸업사진하고 비슷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어요.
목사님사모님과 부목사님사모님께서 선생님이셨지요.
청이님께서 자라오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사
진명여고도 나오시고 이대도 나오시고...
어머님고생 덜해드리려고 정현아주머니께서
유치원선생님도 하실수 있도록 해주셨군요.
나중에 다시 들를께요.
이 이야기 여러번 읽었지만,읽을때마다 청이님 큰아버지 너무 괘씸합니다.
제수씨가 20대에 남매 둘 데리고 그 고생을 하고 사는데,과수원 일에 시부모님까지 모시게 하고..
유치원 선생만 해도 남매데리고 그런대로 먹고는 살수 있었는데
다시 꼬셔서 시골 과수원으로 들어오게 하고
(애들 등록금 대 준다는 말과 집 한채 나중에 주겠다는 말로 미끼던진 큰아버지 너무 나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