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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으로 돌아오신후 황소같이 일을 많이 하셔야 했다.
할머니가 많이 편챦으셔서 엄마가 할머니 병 수발을 했는데
할머니는 점점 병이 더 심각해 지시더니 1년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수의를 입혀 관에 넣어 중하리 과수원 뒷쪽에 묘를 파서 모셨었다.
엄마가 동네교회에서 유치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시는등 봉사를 많이하시니까
장례에 중하리 교회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형제들이랑 친척들도 오셨지만...
그런데 장례에 들어온 부조를 큰아버지 혼자 챙겨넣으시고.. 우리한테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엄마가 할머니 병수발에 고생많이 하셨으니.. 부조를 엄마에게도 일부 드려야 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중하리 동네사람들은 알지못하는 큰아버지한테 부조를 한게 아니고,
교회에서 유치반 선생님으로 봉사를 하던 엄마를 보고 부조를 했을텐데...
또 엄마가 누가 얼마나 부조를 했나 알아야 교회에 가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고
다음에 그 집들 대소사에 우리도 참석하고 부조할 수 있었는데... 엄마는 큰 실망을 하셨었다.
큰건물에서 병원을 경영하시는 큰아버지는 돈도 많으신데
먹을것도 없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주시지...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엄마는 이른 봄부터 3천평 과수원 그많은 배나무 한나무 한나무
1) 일일히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똥을 한 지개씩 퍼다 부을 일꾼
2) 한나무 한나무 마구 자란 나뭇가지들은 쳐 주는 전지를 하는 기술자
4) 또 농약을 지고 다니면서 일일히 나무마다 농약을 칠 일꾼들을 구하려 다니셨는데
돈이 없어 품삮을 잘 주지 못하니 일꾼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엄마는 큰아버지한테 품삯을 받아서 틀림없이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곤 했다.
5) 그리고 배꽃이 지고 배가 열리면 촘촘한 배를 솎아내야 했었고
6) 배가 조금 커지면
낮에는 배나무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기에
밤이면 잠도 못자고 온 식구가 헌 신문지 얻어다가 짤라 밀가루 풀쑤어
봉투 수만개(?)를만들어 봉투 하나하나에 황을 한티스푼씩 넣곤 했다
8) 그리고 다음날 낮에는 배 하나 하나를 황넣은 봉지로 싸서 철사로 묶어 주는둥
이른봄부터 정말 일이 많았다.
또 엄마는 농사일로도 정신없이 바쁘셨지만, 밥해먹고, 살림하는 일 이외에
할아버지한테 봄가을엔 옥양목 바지 저고리,
여름에는 베(모시) 바지저고리, 겨울이면 솜바지저고리, 솜두루마기 등...
철철히 옷감 사다가 사철 옷수발도 해 드려야 했다.
한편 나는 경기도 시골에서 효자동 진명여중고 장거리 통학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새벽에 일어나 김치/짠지 밖에 없는 아침밥이지만 먹는둥 마는둥하고
엄마가 싸 주시는 변도를 가방에 넣고(반찬으로 매일 김치를 병에 넣어주시니..
가방엔 늘 김치국물 자국이 얼룩덜룩 말라붙어 있었다)
가방에 변도, 김치병, 교과서, 가외책, 체육복, 무용복, 수예숙제물, 재봉시간 준비물...
키 작은 나한테 너무 무거웠다.
한겨울 혹한추위에 코트도, 털신도 없이, 한 여름엔 땡볕에...
달랑 교복만 입고...
시골에 뻐스가 제대로 다니지 않으니
집에서 뻐스타는데 까지 30분이상 걷고, 언제 올줄 모르는 뻐스 한없이 기다리고,
만원뻐스에 시달리며 광화문에서 내리면
나는 또 효자동까지 30분 더 걸어서 2시간-3시간 걸려 진명 학교에 도착하고
학교 끝나면 또 효자동에서 광화문까지 걷고 만원뻐스에 시달리며 장거리/종점까지 가고
집까지 걷고, 2-3시간걸려 집에 도착하곤 했다.
대학4년 경기도에서 신촌 이화여대까지 통학도 정말 멀고 힘들었었다.
잠을 안 자버릇하니 잠이 점점 줄어서 졸리운것도 몰랐고,
물을 못 마시니 습관이 되서 목마른것도 몰라 하루종일 물도 안 마셨다.
그래서 그런지 장거리를 오가면서 화장실에 가지도 않았다.
우리집에서 먹을거라곤.. 여름에는 밭에서 푸성귀가 났지만 가을부터는 김장 김치 한가지...
그나마 이른봄에 김장이 떨어지면 여름철 푸성귀가 날 때까지
짠지를 썰어 물에 넣어 빙초산에 물을타서 만든 식초를 넣어 먹었었다.
친정에서 귀하게만 자란 엄마가 밭농사 지을줄도 모르시고
또 배농사에 매 달리느라 밭농사 지을 시간이 없어서 그러셨는지
우리는 영양가 있다는 콩도 없어 된장도 만들지 못해 된장찌개도 먹어보지 못했고
청국장이란것도 먹어본 일이 없었다. 된장이 없으니 집에 간장도 없었는데
옛날 리야커에 커더란 플라스틱통 간장을 실고 다니는 간장장수한테 간장을 사 먹었는데
아마도 맹물에 까만물감, 소금넣고 미원넣은 간장이었으리라.
뒷날 내가 대학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에 처음으로 샘표간장을 사 먹었었다.
고추장만은 엄마가 밭에서 키운 말린고추에 엿기름사다가 밀가루 넣고 만드셨는데
외갓집 고추장은 찹쌀로 만들어 색갈이 자주빛(?)이고 반질 반질 맛있었는데
우리집 밀가루 고추장은 엷은 주홍색으로.. 맛이 없었었다.
설날, 추석등 명절에도 또 생일에도 우리는 떡도, 고깃국도 해 먹지 못했고
정월대보름날 남들은 호두등 부럼을 먹는다는 이야기만 들었었지
먹어보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생신이 되면, 엄마는 달걀이 없으니 밀가루에 치자물을 노랗게 들이고
고기간에서 돼지기름 한덩이를 얻어다가 뜨거운 후라이팬에 놓아 기름을 흘러내리게 하고
거기다 전을 부치셨었다.
나는 자랄때 고기도 생선도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훗날 결혼하고 형편이 좋아졌을때도 나는 고기와 생선을 좋아하지 않아 손도 안대고
김치에 밥만을 먹었었다.
그래도 엄마는 집에 손님이 오면 가게에 가서 외상으로라도 무언가 사다 반찬을 하셨고
누군가 집에 먹을것이라도 사들고 찾아오면, 엄마는 손님올때 대접하자고 아껴두곤 하셨었다.
한창 자라야 할때 잠 못자고, 물도 못마시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못 먹고...
추운겨울, 뜨거운 여름 장거리 통학에 고생을 해서 그런지 나는 키도 못 자랐지만 두뇌도 발달을 못해...
점점 눈치없는 바보가 되고 또 소심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살기가 너무 고달프다 보니 아무 생각도 못하셨는지
그냥 나를보고 "얘는 통 잠이 없네" 하시기도 하고
"얘는 어릴때는 똑똑하더니 왜 이렇게 바보가 됐지" 하셨었다.
나는 또 건망증도 심해져서 장거리/만원 뻐스에 우산, 학교 과제물, 체육복등
때때로 학교 가방까지...온갖것을 자주 두고 내리곤 했었다. 오죽하면 대학교때 친구가
"얘는 이담에 결혼하면 아이들도 뻐스에 두고 내릴꺼야!" 했다.
그래도 처음 일이년은 가을이 되어 과수원에 배가 익으면
엄마는 커다란 광주리에 배를 담아 머리에 이고 읍내 큰 상점에 가서 팔아 돈을 가져오시고,
팔지 못하는 파배(썩은배, 벌레먹은배, 잘못자란 배등)들을 우리는 집에서
한 빠께스씩 놓고 썩은곳, 벌레먹은곳을 잘라내고 실컷 먹곤 했다. 실은 상품용 좋은 배보다
벌레먹은 배가 훨씬 맛있어서 우리는 벌레들이 맛있는 배를 고를 줄 아나부다고... 웃곤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는 행복했었던것 같다.
그러나 다음해부터는
봄 여름에 배 농사를 지어 배가 어느정도 커지면 큰아버지께서 장사꾼을 큰아버지 병원에 오게해서
배밭채 배를 도급으로 파시고 목돈을 받으셔 우리는 배판돈을 구경도 못했다. 배도 전혀 못 먹고...
그렇지만 큰아버지께서 우리들 등록금만은 꼬박 꼬박 잘 내 주셨었다.
배 농사지을때의 인부들품삯, 농약값, 영농비와 또 생활비가 없어서, 엄마가
경기도 양주군 시골에서 광화문 큰아버지 병원까지 장거리에 돈 타러 다니시기도 했지만..
너무멀고, 또 병원에서 오래 기다려야했고 헛탕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내가 엄마대신에 진명학교가 끝나고 큰아버지 병원에 돈을 타러 가곤 했었다.
큰아버지 병원에 돈을 타러가면 늘상 3-4명의 인부들이 품삯을 받으려고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도 그 사람들 틈에 끼어 대합실 한구석에 앉아 있으면.. 병원 환자들 진료가 다 끝나고 어둑 어둑 해 질때
큰아버지께서 "효석아" 하고 부르셨다. 어떤날은 5000원(지금 돈으로)쯤 주시고, 어떤날은 "오늘은 돈 없다 그냥 가라"
하셨다. 어두워진후 큰아버지 병원에서 출발해서 뻐스기다려 타고, 다른뻐스 갈아타고 30분이상 걸어
집에 도착하면 깜깜한 한 밤중이 되어 늦게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딩굴다가 밤늦게 잠이들면, 그 이틑날 학교에 가야하니 새벽에 일어났어야 했었다.
전날 생활비를 못 받으면 집에 먹을것이 없으니 나는 다음날 또 큰아버지 병원에 돈을 타러 가야 했었다.
그런데 그나마도 어느날 부터는 병원에 돈타러 가지 못했다.
이때 외할아버지 댁에는 일주일에 한번 김과장, 황사장 이란 분들이 오셔 마짱을 두시곤 했는데
황사장의 조언에 따라 외할아버지께서는 부동산 갖으신것 몽땅 다 팔아 현금으로 만들어
황사장 회사에 맡기시고 매달 이자를 받아 생활비에 쓰셨었다.
우리가 생활비가 없으니 엄마도 한달에 한 두번 그회사에 가서 돈을 조금 얻고
또 용이 아저씨, 고모할머님댁, 진이아줌마, 친척들을 찾아가면 밥도 먹여주고 용돈도 주셨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간정형외과 할아버지, 자유당 시절 고급 공무원이셨고
또 한때 국회의원을 하셨던 승규아저씨도 우리를 반가워 해 주시고 잘 해주셨다.. 승규아저씨는 내가 대학들어갔을때
"약대를 가지 그랬니..." 안타까워 하셨고 내가 어려워 하던 그 분들이 내 결혼식에 와 주셨었는데
나는 결혼후 한번 찾아뵙고 인사도 한적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싶은데
이제는 이세상분들이 아니시니...
그렇게 적지만 생활비가 생겨서 우리는 서울까지 다니는 왕복 뻐스비가 해결이 됬고
엄마는 옷은 너무 초라하게 입으면 안됀다고 옷을 우선으로 사셨고,
할아버지 한복옷감도 사다가 사철 할아버지 옷도 지어드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보리쌀이라도 살 수 있어 밥을 굶은적은 없었다.
그때는 가난한집이 많아서
따듯하게 대해주고 밥 먹여주고 어쩌다 돈이 생길때 조금 주면
엄마한테 의지하고 밭도 매주고, 우리식구가 다같이 매달려 밤마다 배봉지 만들때
도와주는 식모 아줌마/아가씨가 있을때도 있었다.
그런데 큰집에서는 큰아버지덕으로 먹고 살면서 식모까지 두고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셨는지
나하고 동갑짜리 사촌이 나한테 "젊었을때 일을 열심히 해야지 무슨 식모를...)
라고 쓴편지를 우리집에 와서 두고갔었다
자기네는 식모, 유모등 일하는 여자가 둘씩 되는데도, 우리 주제에 식모 둔것이 눈꼴 사나웠던 모양...
나는 무기력해서 그 편지를 그냥 없애버렸다. 엄마 보여드리고 의논을 하고.. 그 큰아버지 과수원에서
빠져 나왔어야 하는데...
식모들이 처음엔 멋 모르고 우리집에 들어왔었지만
곧 부자집으로 식모살이를 떠나서 그 후 식모를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삼강마가린이라는게 있었는데, 어쩌다 한개사서 뜨거운 밥에 비벼먹으면
너무 맛있었는데 돈이없어 사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친하게 지내던 국제결혼한 아줌마네 놀러갔는데
(이 아줌마는 운좋게 미군장교를 사귀어 딸을 낳고 정식결혼을 해서 좋은 집에서 풍족하게 살고 있었다)
미제 뻐터 1개와 아줌마가 실증나서 입지않으시는 미제 데트롱 블라우스를 주셨었다.
우리는 그 뻐터를 아끼고 먹지 않다가 사촌이 왔을때 "우리집에 미제뻐터 있다"하고 주고
또 미제 블라우스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 뒤 한날 내가 큰아버지 병원에 생활비를 타러 가서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날은 삼강마가린 회사에서 큰아버지 병원 건물꼭대기에 삼강마가린 광고 네온싸인을 걸고 가면서
삼강마가린을 여러개(10개?) 병원에 주고 갔었다. 그래서 나도 한게 얻어 가질 수 있겠다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다닐러 왔던 사촌이 "얘 너희는 미제 빠다만 먹고 이런건 안먹지!" 하면서
한개도 주지않고 다 가져갔는데, 나는 멍청하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국민학교 때인가 사촌들이 우리집에 놀러왔었는데
때마침 엄마의 새엄마가 낳으신 나보다 한살적은 이모도 왔었는데
외할아버지 늙으막에 태어난 이 이모가 집에서 귀염둥이라..
입이 짧아서, 반찬으로 먹으라고 자기 엄마가 굴비를 이모한테 싸 주셨었다.
굴비를 보내실려면 몇마리나 보내실것이지.. 굴비 살만뜯어 몇조각을
비니루에 싸 주셨었다. 사촌들이랑 다 같이 상에 둘러앉아서 밥먹을때
엄마가 별 생각없이 "연영아 네 굴비 여기있다" 하고 주셨었다.
입짧은 이모는 그나마도 먹지않고 옆으로 밀어 놓으며
우리 사촌들 한테 "너희들 먹어" 했었다.
나는 김치와 짠지만 먹어버릇 해서 굴비 같은것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날 사촌들이 돌아갈때 사촌들이 우겨서 멀리 신문로 큰집까지 나도 갔었는데
집에 들어가자 마자 사촌들이 우리집에서 연영이만 굴비를 줬다고
큰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했는지... 큰어머니가 어려워 다른방에 있던 나를 부르시더니
"너희가 감히 누구밥을 먹으면서..." 하시면서 나한테 괭장히 화를 내셨었다.
이 이야기도 엄마한테 해 드리고 의논을 했어야 했는데
바보인 나는 큰어머니 꾸중을 엄마한테 옮기지도 못했다.
큰아버지는 가족들 한테까지도 올데 갈데 없는 우리를 먹여살리고 잘해주시는 것 같이 행동하셨는지
큰엄마랑 사촌들은 우리가 큰아버지를 뜯어먹고 산다고 생각하셨는지 늘 큰아버지를 안타까워하고
사촌이 자주 우리집에 와서 우리 사는것을 보고, 식모를 두고 산다는둥, 미제빠다만 먹고 산다는둥
큰아버지 돈으로 낭비하고 사는가 감시하는것 같았다.
하루는 사촌 동생이 나한테 우리를 큰아버지옆에 붙어먹고사는 기생충이라고 해 놓고는
아차~ 싶었던지 "아니 할아버지가 기생충이라는 이야기야" 라고 얼른 정정을 했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를 낳아주신 집안어른인데 기생충이라고 부르는것이 말도 안돼지만
할아버지가 적산농장 불하받으신것을 큰아버지 이름으로 해 주셨는데...
어느날은 내가 사촌들과 같이 있을때 무슨일땜에 "나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서..." 라고 했는데
옆에 계시던 큰엄마께서 당장에 "얘! 너의 아버지가 있으면 별수 있었을것 같니" 하셨었다.
해방되고 육이오 사변이 터질때까지 20대 초반이었던 우리아버지가.. 의사셨던 큰아버지 보다
돈을 잘 벌지 못하셔서 큰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던것 같다.
그렇지만 육이오 사변이 없었다면..
우리아버지도 세월이 지나면서 돈을 잘 버실수도 있었을것 같다.

첫댓글 청이님 자서전이네요,
읽으면서 슬프고 속상한 부분이 참 많았어요.
청이님아버님만 청이님식구들과 같이 사셨다면
안하셨을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먼저 글도 읽었는데,더 집중해서 글을 잘읽고
댓글달려고 안했는데,이번글을 읽으니
청이님 맘이 짠하게 느껴져 댓글답니다.
저는 일찍 잠을 자는데,곧 자려고 합니다.
지금은 저녁 8시19분이예요.
세상에 학교를 2~3시간 걸려 다니셨다니...고생 많이하셨어요.
그러니 친정어머님께서는 얼마나 힘들게 사셨을까요.
나중에 더집중해서 읽고 다시 올께요.
그런 고생긑에 오늘날의 청이님이 계시는것이군요.
부끄러워서 망서렸지만
용기를 내어 내 지난이야기를 하나씩 쓰려고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혼자 된 제수씨가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하지도 않은지
큰아버지는 그당시에 의사니 잘 살았는데
나중엔 배 농사지은 돈 까지 싹싹 긁어갔다니,정말 매정하고 나쁜 사람입니다.
어린 조카들이 불쌍하지도 않은지..
할머니는 나하나 고생해서,애둘 가르치면 된거지..하는 마음으로 버티신게 아닌가 싶네요.
옛날엔 왜이리 다덜 가난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