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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계절의 시
모든 시는 써지는 순간 적폐
박 설 희
<내 시 속의 적폐>
지난 겨울호에 실린 특집이나 기획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시와반시』에 실린 ‘내 시 속의 적폐(청산)’이라는 기획이었다. 적폐는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이다. 한번 나서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게 시업(詩業)이라 할 때 시야말로 철저한 자기성찰이 끝없이 요구된다. 자신의 시작(詩作)에 어떤 폐단이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라는 의미의 기획이었을 것이고 쉽지 않은 화두였을 텐데 진솔하게 자신의 시에 대해 돌아보는 시인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
“시는 매순간 적폐였다. 새로운 것이 없었다. 진정한 시의 적폐청산은 언어를 버리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이미 오래된 미래의 적폐였다. 모든 시는 써지는 순간 적폐였다. 그래서 시의 적폐는 늘 싱싱했다. 역설적으로 오래 살아남는 시의 적폐는 그 생명력 자체로 언어를 뛰어넘는다. 마치 물을 떠나온 물고기가 공기에 익숙해지며 죽지 않고 뭍에서의 삶을 연장해 나가는 새로운 생명의 논리를 세우는 것.(물고기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위하여 수억 년 동안 수없이 죽어야 한다)”
-이덕규, <시의 싱싱한 적폐를 위하여> 중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그것도 죽는 날까지? 그 나이에 겨우 그런 다짐이나 하다니, 윤동주 말이다.
그게 적폐다.
그리고 그 반대가 다 적폐다.
그 나이에 어찌 그런 다짐을 하다니, 그것도 사는 날까지 말이다.
우러렀는가?
땅까지 굽어보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말이다. 맹자 말이다.
그 모든 나무들은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말이다.
죽음은? 우러를 일 굽어볼 일의 끝. (중략)
의문사? 저 의문생들을 또 어찌 하리오.
-김영승, <페라칸사스 면류관> 중에서
실린 글들은 ‘내 시가 주로 다루고 있는 세상의 적폐들’과 ‘내 시 속에 스며 있는 적폐들’로 내용이 크게 나뉘어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의 장이 되었다.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스럽게 적폐를 펼쳐보이는 중에 김영승 시인의 독특한 어법의 산문도 참 그답다 생각하며 미소짓게 했고 세상이야 어떻든 순수의 길목에서 서성거렸다는 한 노시인의 진솔한 고백도 잘 다가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폐해, 우리 시단의 적폐, 자신의 작품 속의 적폐, 공부가 부족하다는 자책, 새롭고 낯선 것을 외면하고 안일함에 안주해왔던 시작 태도 등에 대한 성찰 등이 펼쳐졌다.
적폐라는, 정치적으로 다가오는 단어를 문학의 장으로 끌어들인 시도가 새롭고도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적폐 청산에서 문단도 자유롭지 않고 우리의 시작(詩作)도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창작과비평』 겨울호 책머리에는 “광장의 목소리를 잇는 일상의 혁명”(백지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시와반시』의 ‘내 시 속의 적폐(청산)’와 맞물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의 자리를 상기시켰다. 내가 일상 속에서 저지르고 있는 적폐와 내 시 속의 적폐를 곰곰 생각해본다. 비판의 칼날을 외부로만 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폐와 입장>
지금 우리 사회는 들끓고 있다. 문화예술계, 법조계, 언론계, 의료계 심지어 인권단체에서조차 총체적으로 번지고 있는 “Me too"는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지형도를 그려보게 한다.
수원에 사는 내게 최근 불거진 한 원로 시인의 성추행 전력에 대한 입장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입장? 난 어떤 입장인가?
내가 살아낸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는 알게 모르게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일상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곤 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히 버젓이 벌어지곤 해서 어떤 문제 의식이나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성장기에 으레 누구나 겪는 일쯤으로 치부되고는 했다. 길거리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오줌을 싸는 모습을 보면 그 놈 고추 실하게 생겼네라며 동네 어른들이 고추 따먹자고 달려들어 놀란 아이가 줄행랑을 치면 다 같이 웃던 시대였고 신체적 접촉에 대해 남녀노소가 비교적 관대했다. 내가 받았던 교육이나 주변 환경은 남녀 평등이나 아이 또는 여성의 성에 대해 아직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만약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호소할 데도 없었고 호소하는 이가 되레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며 반성해야 하거나 더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하던 남자들의 놀이, 모든 불행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치마를 들치는 아이스께끼 놀이
짖궂은 장난으로만 생각했던 추억의 놀이
장난이 진화할수록 치마 속이 골병들었네
(중략)
호기심으로 내 치마 속을 훔쳐보네
광장에서 내밀한 잠자리에서 집요하게 훔쳐보네
나는 타락한 사랑을 재빨리 집어삼키네
(중략)
좌우 주류 비주류 구분없이 치마 속을 찍어주니
덜 자란 바지들의 상부상조가 끝내주네
-김사이, 「아이스〜께〜끼」(『창작과비평』 2017 겨울)
남자 아이들이 “아이스께끼”라며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출 때 어른들은 그놈들 또 짖궂은 장난을 하는구나 하면서 지나쳤으며 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남자 아이들이라면 으레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야단을 치는 어른이 있었다면, 더 나아가 그것이 범죄가 될 수도 있음을 주지시키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의 성추행, 성폭행으로 인한 “Me too"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아이스께끼”라는 장난은 어릴 때는 학교 운동장에서, 자라서는 지하철로, 버스로 연장되었다. 장난과 범죄의 경계선이 모호한 채로 이들은 자라서 검사가 되고 연예기획사 대표가 되고 시인이 되고 정치인이 되어 이 사회를 끌어가는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시절의 ‘아이스께끼’ 장난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성들의 몸을 만지거나 치마를 들추었다.
특히 재작년부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문단의 성추행 건은 정신의 자유로움과 생활의 자유로움을 혼동한 사람들이 타자에 대한 이해나 배려 없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결과이다. 이천년대 초반, 문단 새내기였던 내 눈에는 선배 문인들의 거침없는 기행이야말로 그들이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증거였으며 그 과정에서 흔히 오르내리는 모 시인의 폭력적 광기, 모 작가의 화려한 여성 편력 등은 놀라울지언정 감히 그것을 비판할 용기가 없었다. 문단이라는 곳은 초도덕적, 초윤리적 집단으로 보였고 자유로운 시혼 운운 아래 어떤 잘못이나 폭력도 용납될 수 있었다. 물론 대다수 문인들은 일상적인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고 극소수가 그랬다는 것이다. 시나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져버려도 좋았고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곤 했다. 그렇게 2010년대를 맞았다.
글을 잘 쓰면 무슨 짓이든 용납이 되던 퇴폐적 낭만주의의 시대는 갔다. 언제부턴가 작가들의 이차 자리가 술집이 아니라 카페가 되고 술을 마시지 않는 작가들이 점점 많아졌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이번 문단 성추행 건과 관련해서 이삼십대 젊은 작가들의 반응과 육칠십대 작가들의 반응이 분명하게 갈린다. 지금의 이삼십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시대적 환경에서 자라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고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 그들은 성에 대해 일견 개방적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은 성적 주체성을 침해받지 않을 때의 경우다.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대하고 쾌락의 대상으로 보는 한 진정한 공감과 소통은 없다.
숱한 사회적 비리와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서온 한국의 진보적 작가들은 정치와 이념 부분에서는 진보적이었지만 성관념에 있어서는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상의 적폐와의 자성적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시작해야만 한다.
<세대의 변화, 소비되는 시>
당혹감, 빠르게 변화하는 문학적 환경들에 때때로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인터넷 서점에서 책에 별점을 매기고 있는 것을 볼 때다. 첫 시집을 내고 얼마 안 되어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다가 내 시집에 별점이 붙어 있는 걸 보았을 때 일순 놀랍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저 별점은 누가 매기는 것일까? 평론가는 아닌 것 같고 독자들 같은데. 자발적으로 쓰는 건가? 의뢰받은 건가? 마치 영화평을 쓰듯 읽은 소감을 쓰고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그런데 독자들에게는, 특히 시집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취향이 있어서 자신의 정서와 공감이 잘 되는 시집을 선호하게 마련인데, 마치 작품성을 매기듯 이 시집은 어떻고 하면서 터무니 없는 평점을 매기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별점이 다섯 개인 소설을 읽었다가 중간에 덮어버린 경우도 있다. 전문가가 아닌 독자들이 작품을 직접 평가하고 그것이 다른 구매력을 불러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를 가져와서 낭독해보라고 했더니 열 명 중 세 명이 하상욱의 짧은 시를 낭독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정호승 등의 서정시를 주로 가지고 왔는데 요새는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감각적이고도 재미있는 짧은 시가 그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착하게 / 살았는데 // 우리가 / 왜 이곳에 (하상욱, 「지옥철」)
니가 / 문제일까 / 내가 / 문제일까 (하상욱, 「신용카드」)
기발하다고 웃으며 몇 편 읽다가 금방 식상해버리고 말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신경림 시인은 몰라도 하상욱은 다 알 정도로 유명 시인이었다. 그의 문학적 성취와 평가와는 별개로 sns를 통해 퍼져나가기에 딱 알맞은 짧은 구절과 콱 와 박히는 재치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독자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서 계간 『시작』은 ‘새로운 독자의 탄생’이라는 특집을 마련하여 현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소비자의 욕구를 잘 살피는 작가가 돈을 버는 시대가 되었다. 관심사는 판매 부수가 아니라 조회 수가 되고 말았다.
개인 미디어와 sns의 발달은 “독자가 능동적 생산자는 물론이거니와 배급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학평론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하, 「새로운 독자의 탄생을 걱정해야 하나 환영해야 하나」)
sns를 통해 독자와 작가가 직접 만나고 작품에 대한 즉각 직접 대응이 가능하게 되면서 하상욱류의 시는 날개를 달게 되었고 sns를 잘 활용하는 작가들이 인기작가로 급부상하였다. 문학인들도 마치 연예인들처럼 스타가 되었고 시는 빠르게 소비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 지향성보다는, 분석하고 유형을 나누며 규정되었다고 믿는 사실에 접근하려는 태도가 훨씬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특별한 의미를 찾지 않고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문제를 대면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고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안진의, 「생각하는 방식의 변화」)
요즘 신세대의 가치관에 대해 진단한 글이다. “핵가족 중심이라는 가족관계의 변화나 서구 문화의 전면적인 수용, 직관적인 미디어의 사용과 정보의 습득 등”으로 신세대들은 생각하는 방식이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 문학을 수용하는 방식이나 이해도 달라진 것일까?
<미래식과 오늘 먹을 음식>
“노래는 나의 개인교사였고 현실의 변화된 의식으로 가는 안내자였고, 해방된 공화국이었다”라고 밥 딜런은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는 나의 개인교사였고 현실의 변화된 의식으로 가는 안내자였고, 해방된 공화국이었다. 다른 시인들도 그러하리라.
그러나 내가 습작기를 보냈던 1990년대의 창작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앞으로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그 시대상황에 따라 내 시풍을 바꾸거나 다른 시작 태도를 추구할 생각도 없다. 내 시 속의 적폐를 들여다보거나 일상의 적폐를 뒤적이면서 그리고 거대담론 속의 적폐를 꿰뚫어보면서 묵묵히 쓸 뿐이다.
신선로나 구절판 민어전과 오이선 같은
전통 한식은 배울 생각도 없었다
섞어 먹어서는 안 될 각종 식자재를
보기 좋게 뒤섞어 후다닥
데치고 지지고 볶아서
그럴듯한 복합물 만들어낸 다음
메뉴판에는 퓨전 요리로 소개했다
스타 셰프들은 앞으로 미슐랭 가이드에 오를
미래의 요리라 치켜세우고
미식가들은 미래식(未來食)이라고 격찬했다
뒤따라 시식해보려는 젊은 고객들 줄 섰고
먹어본 사람들은 복통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다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일까
차라리 오늘 먹을 음식이나 잘 만들면 좋으련만
-김광규, 「미래식」(『문학과사회』 2017 겨울)
음식을 빗대어 시단을 풍자하고 있는 위 시를 읽으며 실험시를 쓰는 사람은 그들대로, 전통적인 서정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시를 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당장 “오늘 먹을 음식이나 잘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내 역할이므로.
“슬픈 시 몇 편 쓰고 나니 또 겨울이 왔다” (최문자, 「old한 연애」, 『시와문화』 2017 겨울)거나 “살아있다는 불안, 나를 키운 어쩔 수 없는 불안에 대해” (김효선, 「모슬포」, 『시와문화』 2017 겨울) 곰곰 생각해보면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선다.
-시와문화 2018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