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국안민
보호 받을 권리있는 국민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
안전질서유지의 책임은 경찰
민의를 받들어 정치하는 국회
척양척왜·보국안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국안민(輔國安民)
『동경대전』 「포덕문」에서 사용한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뜻을 지닌 천도교교리.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
19세기 중엽 동학을 처음 세운 최제우는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 내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보국안민을 외쳤다. 그 후 최시형은 조선 조정과의 평화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나라를 이롭게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1894년(甲午)에 일어난 동학혁명 당시에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바뀌어졌다. 이는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는 관계에서 조정의 탄압에 순응하는 관계로 변천했다가, 다시 조정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새로운 관계로 변천한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의 보국안민
최제우는 19세기 중엽의 혼란기에 동학을 창명(彰明)하였다. 은둔의 땅이었던 동양에 서양세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중국과 조선은 다 같이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최제우는 당시 상황을 말하기를,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여 이루지 못하는 곳이 없다. 천하가 다 멸망하면 순망(脣亡)의 근심이 없겠는가?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라고 하였다.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천진과 북경을 함락하자, 청국 황제는 도망하고 연합군의 승전으로 중국은 소위 북경조약을 체결하는 굴욕을 당하였다. 이 때 중국과 조선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 즉 입술과 이처럼 밀접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천하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하루아침에 서양에게 무릎을 꿇자, 조선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제우가 제시한 우리나라 보존의 계책이 바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그에게 있어 서양이란 무기를 앞세워 동양을 공격하는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여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표현하여 서양이 매우 강성한 외래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양의 무력성뿐만 아니라 종교, 즉 서학도 동일한 존재로 규정하였다. 강성한 무력이 지닌 침략성 못지않게 그 무력이 가진 비도덕성을 종교적 관점에서도 폭로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천주의 뜻으로 부와 귀는 취하지 않는다하면서도 군대를 앞세워 공격하고 침략한 곳에 교당(敎堂)을 세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천주의 뜻인가에 대해 강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의 민중들이 서학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서학을 믿으면 죽어서도 천당간다”는 말에 현혹되어 가는 것을 또 다른 사회혼란으로 인식한 것이다.
외적(外的)으로는 서양의 침략성이 우리나라에 위기로 다가오고, 내적으로는 자기만 잘되어 천당에 가겠다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또 하나의 위기로 본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무력성과 서학이라는 종교의 감언이설을 위협으로 느낀 최제우가 또 하나 미래의 위협으로 내다본 것이 일본의 침략성이다.
따라서 보국안민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 그리고침략적 의도를 지닌 서양의 종교로부터 우리나라와 사회를 지키지 않으면, 중국이 서양에게 망하는 것과 같은 위기가 이 땅에서도 반복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구국의 계책이라 할 수 있다.
최시형과 손병희의 보국안민
최제우의 제자인 최시형은 보국안민의 개념을 외부보다는 내부에 집중하여 해석하였다. 최시형과 그를 따르는 동학교도들은 보국안민을 외치다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스승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제일의 과제로 여겼다.
스승인 최제우가 죄인이 되고, 그를 따르는 무리 역시 죄인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여 수많은 죄인을 남겨놓고는 나라가 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보국안민에서 민이 곧 나라의 근본(民者國之本)임을 강조하고, 그 민(民)인 동학교도의 신원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94년(甲午)에 일어난 동학혁명군은 「창의문」에서 말한 것처럼, 관리들의 탐학으로 백성은 깎이고 나라는 쇠잔(民削國殘)해졌기 때문에 다시 보국안민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때의 보국안민은 '나라의 불의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바뀌어 나라를 위협하는 존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안의 관리들이 백성을 탐학하는 그 부패행위를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동학군은 이 부패한 관리들의 불의를 척결하고자 보국안민으로써 생사를 같이 하였다. 그 뒤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는 의미로 보국안민을 해석함에 따라 3·1운동 발발의 중요한 정신적 계기로써 작용하였다.
천도교나 수운교 등의 동학교단에서는 보국안민과 함께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3가지 큰 염원이라는 의미로 삼대원(三大願)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보국안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외세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의 고사성어, 구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국안민이나 이와 비슷한 뜻의 슬로건이 권력이나 정책을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