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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의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기존 사회 체제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이념을 일컫는다. 따라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양심>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이른바 보수주의의 실체와 그들이 ‘양심’을 걸고 내세울 가치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책일 다 읽고 난 지금 나로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가치가 너무도 빈약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미 ‘용도폐기’되어 버린 60여 년 전의 낡은 주장을 통해 ‘보수주의자의 품격’을 되살리자는 번역자의 목소리 또한 그저 공허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개인의 자유를 역설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일 내용이 없지는 않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1960년대(2010년대가 아닌) 미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당대에 자신의 지켜야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한 점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철저히 옛 소련이 건재하던 당시의 냉전 체제 하의 적대적 이념 대결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극단적인 반공을 주장하는 저자의 논지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주장에서 오늘날 한국의 보수라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동어반복적인 구호가 겹쳐서 나타나기도 했다. 전체 10장으로 이뤄진 목차에서 ‘소련의 위협’이란 제목의 마지막 항목은 60페이지가 넘으며, 이 내용이 전체 분량의 1/3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의 집필 목적이 ‘보수주의의 가치’를 주장하려는 것보다, 냉전 체제에서 소련으로 상징되는 ‘사회주의로부터의 승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석하였다.
저자는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가치라고 주장하지만, 거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철저히 배제된다. 때문에 ‘공산주의의 붕괴’를 위해서라면 ‘전쟁의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간섭은 철저히 배격해야 하지만, 소련에 맞서기 위해 재래식 무기를 보유하고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돈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이율배반적이라 할 수 있다. 국방비의 증가로 이어지는 군비경쟁에 소요되는 비용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국민의 세금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다면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겠다는 완고함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쨌든 저자의 논의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철저히 미국 중심주의를 관철시키고자 하려는 것이며, 때문에 경제적 부국인 미국의 대외 원조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저자에게 노조는 ‘타도해야할 집단’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과도한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기 위해서, 노조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고 노조 조직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노조든 기업이든 모든 독점에 대해 전쟁을 벌이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우면서, 노조의 정치적 활동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기업가의 윤리를 강조하고, 자본가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내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그동안 한국의 ‘보수주의자’라 자처했던 이들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조를 약화시키고 기업이나 자본가에게 과도한 혜택을 부여한 그동안의 정책이 우리의 경제 현실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를 고려하면, 이러한 주장은 노조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사회 복지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평등한 교육’을 반대하는 저자의 주장이 과연 ‘보수주의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복지도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를 인정하면서, ‘빈인빈 부익부’의 현실을 지속시키거나 격차를 더 벌려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교육의 평등화’에 반대하는 것도 역시 그동안 자사고나 특목고의 확대를 주장하던 과거 정권들의 행태와 일치한다고 하겠다. 저자 역시 ‘교육 기준이 평범성 대신 우수성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근저에는 사회의 발전을 위해 우수성으로 무장된 소수의 엘리트들이 지닌 ‘총명함과 헌신의 결과’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특목고로 상징되는 ‘귀족교육’은 결국 ‘교실의 황폐화’라는 교육의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농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주장 역시 저곡가 정책과 독점자본의 폐혜로 인해 어려움에 봉착한 농민들을 그대로 방치해야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금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원론적으로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적 격차가 심한 자본주의 현실을 애써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곧 ‘사회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책을 펼치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기반한 논리라 이해된다.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소수의 극단적인 부자들만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바우만의 분석과 비교해 보면 그 논리의 맹점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인다.
이미 낡아버린 오래된 한 ‘극단주의자의 주장’을 왜 2019년 이 시점에 출간을 했을까 문득 생각해 보았다. 옮긴이는 이 책을 통해서 지난 정권의 탄핵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보수가 몰락’을 했고, 그러한 현실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에 ‘보수주의의 진수’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노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21세기 한국에서 과연 통용될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우며, 구체적인 내용들은 이미 현실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낡은 이론일 뿐이다. 또한 저자의 주장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기반한 공허하고 빈약한 논리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저자가 여전히 미국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로 취급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21세기 한국 사회에 걸맞은 이론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전체적인 감상평이다. 또한 그동안 이른바 보수를 내세운 정당들에서 쏟아지는 정책이란 것들도 결국 이러한 빈약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는 이른바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빈약한 논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반면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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