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훼단지 (외 1편)
김 옥 전
쇠창살 가득히 꽃이 피었다
화훼농원 주인 김씨가 명지병원 정신병동에서
새로운 품종을 개량하게 된 건
친구에게 빚보증을 서주고 얻은 영감 덕이다
콘크리트로 고르게 일궈놓은 꽃밭에서는
몇 종의 그리움이 발효 중이고
몇 종의 기다림이 썩는 중이다
아침이면
차갑고 매끄러운 쇠창살 줄기에
진딧물이 끼지나 않았는지 혹시나
벌레라도 생겨 뿌리를 갉아먹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살폈다
쇠창살을 어루만지며 자상하게 말 걸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쇠창살에 꽃이 핀 건 믿음 때문이다
남들은 사막에 물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물이 있다고 믿었다
아내가 친구를 믿지 말라고 했을 때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쇠창살에 꽃이 피면 돌아오겠어요, 라던
아내의 마지막 말이 꽃대를 밀어 올렸다
명지병원 정신병동, 그가 경작하는 꽃밭에는
소독약 냄새 향기롭게 풍기며
쇠창살 꽃이 한창 피는 중이다
가끔씩 그 꽃에 눈물 같은 이슬이 방울방울 맺히곤 했다
벽제 가는 길
속도를 늦춘다 휙휙 지나가던 시간이 감시카메라를 피해 호흡을 조절 한다 이른 새벽 제천에서 출발한 울음이 구파발을 지나 벽제 방향으로 우회전 한다 산 깊숙한 곳 때 이른 단풍을 불 지핀 하늘이 계절의 유품을 태운다 활활 속이 타고 낙화의 증거는 인멸된다
늦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아들을 부르는 산울림이 골짜기마다 붉게 물든다 울긋불긋 요령소리 아들의 영혼을 붙든다 하늘이 쩌렁쩌렁 울린다 묵비권을 행사하던 이파리들 흔들리고 후두둑, 알밤이 떨어진다 후두둑 후두둑 단풍색 눈물이 쏟아진다 여자는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명예를 찾으려고 온 계절을 다 뒤진다
바람이 유골함을 곁눈질한다 태극무늬 보자기로 묶은 매듭 사이 총구처럼 벌어진 틈으로 밤송이머리를 한 아들의 이름이 밖을 내다본다 이유가 없어서 유서조차 없는 국가 기밀급 슬픔이 규명되지 않은 허공으로 나뭇가지 찢기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있었다
-시인정신 201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