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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정조대왕편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 훈련이 벌어졌다. 신하들은 이 훈련을 보며 두려워 했다. 정조는 왜 군대를 이끌고 나선 것일까. 조선 최고의 학자군주였던 정조 그런데 이런 모습 이면에는 전혀 다른 정조의 모습이 숨어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병사 훈련 시키는 등 스스로 무사와 같은 모습으로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정조가 왕이 되기 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신하들이 영조의 하교를 거부하며 (세손에게 왕 물려주겠다는) 승지가 쓰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당시 그 장소에 세손도 있었다 ... (신하들 ㄷㄷㄷㄷ) 왕명조차 거부되는 냉엄한 현실을 세손은 일찍부터 경험하였다. 12살에 쓴 글로 신하가 왕을 어떻게 보필한 것인가에 대한 자세에 대해 쓴것. 사도세자일 의미심장하게 꼬집음. 사도세자를 지키는 포졸들은 그 앞에서 세자를 놀림. (ㅁㅊ ...) 존현각 일기- 정조의 세손 시절 일기 정조는 이러한 일들을 일기로 남겼다. 노론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 대충 요정도 ... 삼불필지설(세손이 세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동궁께서는 노론인지 소론인지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일 또한 알 필요가 없고, 조정의 일에 관해선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정조 즉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 ... 구선복(사도세자 앞에서 술떡 쳐먹었던) 신하들은 왕위의 정당성까지 문제 삼았다. 늘 위태로웠던 정조 ... 이때 야뇌 백동수라는 타고난 야인이 있었으니 정조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무사였다. 무가 천시되던 조선 시대에 실력있는 무사 양성. 누구나 상관없이 대규모 무과시험을 치루고 마침내 정조가 선택한 최종 30명의 무사들을 기반으로 장용영 탄생. 정조대왕이 만든 무예도보통지. 18기 쉽게 익히도록 함. 하루 3000발 이상... 강도높은 훈련함. 신하 장용영에 대한 불편한 심기 드러내기 시작 사실 군권은 노론과 결탁한지 오래였다. 정조가 군권 장악할 수 있었던건 그 스스로가 무예 크게 쌓았기 때문이다. 장용영 30명에서 18000명까지 늘어났다. 정조의활쏘기 기록 - 믿을 수 없는 기록들 쏟아냄. 50발 49발 맞추는게 10번이나 되고, 100발 중 98발 맞춘것도 있었다. 기록을 보면 다 쏘고 마지막 10순에서 한발을 쏘지 않았는데 겸양의 미덕을 보여줘야 하므로 ... 그리 한것이다.(참나 ㅋㅋㅋ) 과녁 축소시키도 함. 작은 부채나 곤봉 편곤등. 과녁이 아무리 작아져도 실력에는 변함이 없음~~~ 정조는 강력한 새로운 국왕의 모습 보여주려 하였다. 군권을 기반으로 신화들 협박하고 회유하기도 했는데... 도대체 정조는 뭘 하려 했을까. 그는 그의 숨겨진 뜻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복권작업은 정조 평생의 숙원이었다. 사도세자의 묘소 수원의 명당자리로 이전하였는데,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노론 대신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치적 책임을 진 사람들 정조 팔달산에 올라 화성 건설을 명함. 수원에 요새같은 신도시 지음. 대규모 행궁, 6km에 달하는 거대한 성곽. 상업도시로 발전 정조의 친위부대도 설치. 자그마치 6000명. 정조는 늘 깊은 뜻이 있음을 강조했다. 정조 19년,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행차를 계획. 6000명의 수행원. 단순히 회갑뿐 아닌. 이 행차를 통해 자신의 깊은 뜻 드러냄. 야간 훈련 했는데 그 규모 짐작 친히 훈련. 사상 유례 없는 일. 아까 말했던 깊은 뜻이란 무엇일까. 어쨌든 이 훈련은 반대세력에게 위협 가하는 등의 정치적 효과도 있었다. 정조가 꿈꾼 정치는 어떤것 이었을까. 정조가 그린 그림 옆에 정조의 호 낙관이 찍혀있는데, 신하를 구름에 비유하며, 임금과 백성이 직접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정치였다. 신하들 절대권력 행하려는 정조에게 결사적으로 대항. 갈등 극으로 치달음. (진짜 이 자식들 ...) 군권 장악한 정조 물러서지 않으며, 신하들에게 마음 단단히 먹을것 주문하였다. 정조24년 충격적 선언을 하였는데 '오회연교' 즉, 오늘의 하교는 참다참다 나온것 이라는 말로 사도세자 죽음에 책임을 묻는등 협박에 가까운 선언을 했다. 신하들은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이로써 정조와 신하들의 결별은 시작되었다. 오회연교 발표된지 한달뒤, 정조대왕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에, 독살 당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개혁의 꿈을 불태웠던 정조. 하지만 그의 꿈은 결국 이렇게 멈추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개혁의 발판도 사라졌다. 장용영은 해체되고 백동수도 숙청되었다. 임금 아래 차별없는 세상을 꿈꿨던 정조. 노비제를 혁파하고 서얼차별을 없애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정조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는 문무의 조화를 중요시 여기며 나라를 위해 스스로 무인이 되었던 조선시대 임금이었다. ------ 드라마 이산에서 세손이 너무 맨날 당하기만 한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이걸 보면, 드라마에서 당한건 너무 아가 수준이네요. 그리고 제가 정조에 감정이입해 쓴글도 있으니 노론 아끼시는 분들, 혹은 노론팬분들께는 미리 양해말씀 드립니다. 휴 힘들다. 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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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 정조대왕은 달과 시냇물 딱 그것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대요. 그 사이에 어떤것도 끼여서는 안된다고.. 이를테면 간신배들... 정말 멋진 분이구나 했어요 .. |
첫댓글 오... 좋은글 감사요~ ^^
글쎄요. 과연 정조가 벽파의 방해가 없었더라도 성리학 근본주의 타파나 신분제 타파같은 혁명적인 개혁으로 근대화 진입의 초석을 이룰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 듭니다. 위에도 나오지만 정조는 성리학 근본주의의 틀을 벗어난 임금이 아니었으며 왕권강화를 추구한 임금이었지 신분제타파나 입헌군주제 같은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정조이후의 너무나 막장스런 조선의 처지에 대한 환멸 때문에 정조에 대한 너무 과한 기대와 안타까움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조가 더 오래 살기만 했으면 모든게 잘 되었을거라는...
실제 심환지는 정조이후 1년정도 더 살다가 죽고 정순왕후도 5년정도 더 살 다 죽습니다. 그리고는 벽파는 힘을 잃고 정조가 총애하던 신하인 김조순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세도정치를 하게 됩니다. 즉 정조이후 5년정도만 지나서 정조의 아들과 정조가 총애했던 신하가 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시대가 왔고 ...이 때라도 이들은 정조의 개혁을 이어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예 당파도 필요없는 세도정치가 시작된거죠. 결국 정조가 더 오래 살아서 아무리 개혁을 해 봤자 정조사후에는 어차피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 개혁은 정조만이 할 수 있는 개혁이었던거죠.
'그 개혁은 정조만이 할 수 있는 개혁이었다' 에 동감입니다. 짜르 표트르의 너무나 급진적 개혁정책이나 황제 바실리우스2세의 황권강화, 뇌제 이반의 전제권력 획득과 사용, 부흥과 몰락의 아슬아슬한 틈바구니에서 제국을 유지했던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등 특정군주의 성향이나 능력 때문에 그가 추구하고자 한 일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가능했던 경우가 많지요. 정조 역시 그들과 똑같지 않았나 싶군요.
소요자/ 물론 정조의 개혁=조선의 근대화라고 보는 것은 비약이 맞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돌아보면 근대초기의 절대왕정이 귀족과 결탁한 사례도 많지만, 귀족계층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선례를 남김으로서 <결과적>으로 국가의 근대화로 이어졌다는 측면에서 정조의 개혁을 아쉬워함을 그리 나무랄 수 많은 없는 것이죠.
흠... 그 사례들의 예를 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론때문에 아비가 자식을 죽여야 하며 혈육을 죽여야하는 조선후기 붕당정치가 갈때까지 갔다는걸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전 봅니다.. 정말 친위쿠데타라도 정조가 일으켰다면.. 조선정치체계가 뒤바뀌게되었을것이고 저도 완전한 근대화추구는 아니더라도 근대화적인 개혁은 조선시대에 발판이 되었을거라 봅니다. 물론 절대왕조안에서의 개혁일겁니다. 정조역시 그가 왕이기 때문에요.
신분제 혁파같은것도 왕입장에서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민심이라는걸 얻을수 있는데다가 조선후기에 신분제의 사실상의 무력화를 조선인들이 몰랐을리 없고 국민전체가 세금을 내면 국가재정의 확충도 있을수 있는데다가 국방력도 강화시킬수 있는만큼.. 왕에게는 나쁜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