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시정마(試精馬)/ 이희원

[레인(정조앤)]

기쁜 시정마(試精馬)/ 이희원

나는 오늘 기쁘다 드디어 그녀가 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역시 나의 매력은 집요함에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스무 번 찍으면 된다. 뒷발길쯤 하나도 매섭지 않다. 역시 계집은 예뻐야 한다. 까짓 발길질도 못 참고서야 어찌 사랑을 말하랴.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위대해지는 바다의 이치를 어찌 알랴. 프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려면, 한여름의 찌는 뙤약볕과 살을 에는 찬바람을 함께 해야 한다. 홍어처럼, 식당 한 구석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푹푹 썩어갈 때 사랑은 발효한다. 모두들 지쳐 돌아갈 때 내 사랑은 빛난다. 허울 좋은 참사랑 따위에 빠져 갈급해져선 안 된다. 이만한 사랑도 내겐 너무 과분하다. 종마가 올 때까지가 나의 임무다. 미친 듯이 사력을 다해 절규해도 소용없다. 사랑은 원래부터 프로그래밍 속에 없다. 그녀의 행복을 빌며 발걸음을 돌려야 겠다, 히이잉.

- 공동 시집『오거리』(제3의문학,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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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정마는 수종마가 수월하게 교배할 수 있도록 암말을 사전에 흥분시키는 역할을 한다. 암말이 충분히 달아올랐을 때 종마가 나타나 교배를 하는데, 종마의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와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사의 시동만 걸어놓고 용도 폐기되는 인간의 계략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도 오래전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시로 써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안 쓰기 잘 했다. 시정마를 소재로 한 시는 별로 눈에 띄진 않았지만 마침 이 시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써봤자 이보다 더 잘 쓸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시니컬한 반어적 자조로 그려진 '기쁜 시정마'의 헛물 사랑이 자칫 긍정적으로 비쳐질 염려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발정기 암말은 교미 전에 굉장히 민감하고 까칠하여 그대로 들이대었다가는 뒷발질에 종마가 차이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혈통 좋은 경주용 종마 한 마리의 가격이 수십억이란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손실을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암말을 준비시켜놓고 시정마를 넣어 암말의 진을 다 뺀 연후에 종마를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시정마는 암말의 발길질에 무수히 차이고 얻어터져 심하면 중상을 입는 경우까지 있다. 시정마는 고지가 바로 저기라며 콧물을 질질 흘리고 네 다리를 뻗으며 안 나가려 발악을 치지만 결국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온다. 더 큰 비애는 돌발사정을 막기 위해 사타구니에 가죽으로 만든 앞치마까지 차는 수모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정마로서는 그 스트레스가 말도 다 못한다. 말은 한번 교배에 걸리는 시간이 짧게는 10초에서 길어야 1분이다. 이는 초식동물의 본능적 환경 탓으로 야생에서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적들의 위협 속에서 생식활동에 탱자 탱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정마들은 이 짧은 쾌락이 강제됨에 따른 엄청난 스트레스로 평균수명까지 짧다. 사람사는 세상에도 시정마와 같은 희생과 헌신은 얼마든지 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챙긴다는 말도 있듯이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는 수많은 시정마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계략 속에 말려들 때도 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많은 을의 입장도 그렇거니와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이 같은 사례는 숱하게 널려있다. '이만한 사랑도 내겐 너무 과분하다'며 자족하기엔 너무 안쓰러운 슬픈 사랑이다.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불만과 절규도 쪽박을 깨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돌아선다. 비단 사회적 약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의 의료 민영화 논란을 지켜보면서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이 왜 저러나 싶다가도 또 다른 그들의 비애가 있음도 안다. 지방의 개인병원에서 정성을 다해 상담해주고 진단을 내린 환자가 정작 수술을 받을 때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서울로 가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별히 어려운 수술이거나 최첨단 장비가 필요한 경우가 아닌데도 그렇다. KTX 개통 뒤 더욱 빈번해졌는데 민영화가 본격 가동되면 의료수가 인상은 물론 이런 쏠림 현상도 심화되리라 예상된다. 이래저래 곤마들의 '히이잉'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권순진

El Jinete - Pasion Vega

[레인(정조앤)]

이 글에 나타난 단어가 그런 말의 뜻이란 걸 이제야 알았구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