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봉선화 열매가 자라 씨가 터지는 계절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울가에 널렸던 물봉선꽃이 자취를 감추면서 여기저기서 봉선화가 다투어 피기 시작했었는데. 손톱에 물들이는 이들도 이젠 어쩌다 보게 된다. 어른들이 추억을 못 잊어 아이들에게 억지로 권하거나 아니면 손수건에 꽃잎 물들이는 모임에서 생각난 듯 한 번 해보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란 꽃말도 재미있거니와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들인 물이 그대로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정겨운 이야기도 생각이 난다.
봉선화 연정의 가수 현철은 봉선화의 계절에 타계했다. 나는 젊은 시절에 현철의 노래를 좋아했고 많이 불렀던 기억이 있다. 특히 봉선화 연정은 시작 부분이 남자의 음정과 잘 맞아 부르기가 수월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수의 기교를 흉내 내곤 했다. 묵직한 듯하면서도 가볍게 떠올랐다가 길게 내 뽑을 때의 그 구수함 그리고 꺾이면서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소리는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도 이곳저곳에서 막히기 일쑤였다. 그러면 어떤가. 그의 노래에 얹혀 내 노래가 불려지는 것만도 좋았다.
「산은 옛날의 산 그대로인데 물은 옛날의 물이 아니로구나.
종일토록 흐르니 옛날의 물이 그대로 있겠는가.
사람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는구나.」
황진이의 시조는 마치 떠나간 현철의 삶을 노래한 것 같아 애잔하다. 뒤늦게 히트 친 노래들은 지난 무명의 시간을 아쉬워하듯 큰 인기를 모아 주었고, 늦게야 스타덤에 합류한 현철에게 송해는 국민가수라 추켜세웠다. 가수의 생시에도 봉선화를 볼 때마다 그의 노래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그 꽃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봉선화로 인해 깊이 알게 된 가수, 노래 그리고 만남과 이별. ‘사랑한다 말해도 무정한 너는 너는 알지 못하네’라고 노래하며 떠난 현철은 다시는 오지 못할 길로 가버렸다.
「應無所主 而生己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금강경에 전하는 이 한 문장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주었다는 붓다. 해석은 이러하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영원한 것도 없으므로 집착해서 해를 입지 말고, 얻어서 기쁘다면 잃어버릴 것임에도 얻은 기쁨을 크게 갖고, 잃어버려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얻지 못했다면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이고, 지금 얻지 못해도 영원한 것은 없으니 크게 상심하지 말라.’ 꽃이 질 때, 인연있는 사람과의 사별을 통해 삶의 무상을 맛보게 된다. 실상 맛본다는 게 얼마나 경박한 표현인지 모른다.
일흔이 넘은 요즘도 일을 하다가 이따금 我相아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 속에는 소유욕도 있고 본인 자랑과 은근한 타인 무시가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 일에 조바심치기도 한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뉘우치면서도 금세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봉선화 열매를 터뜨리며 씨앗 받기를 수십 년. 안타까운 사람들과의 별리는 또 얼마였겠는가. 현철이 떠나간 이 여름에 또 봉선화 씨앗을 모은다. 그러면서 제때 다 받지 못할까 조바심이다. 나는 아직도 너무 많은 곳에 신경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첫댓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구수한 노래를 생각하며 사람 한평생을 생각합니다.
마치 봉선화 터지는 순간 같은 찰라에~
젊은 사람들이 고생했구만.
어저께 마을 제초작업 후에 구순 어르신이 한 말씀입니다. 젊음도 상대적일 수는 있는데, 삶의 마무리는 알 수 없음입니다.
덥고 습한 나날, 선배님 건강한 여름 나시기 바랍니다.
약국에서 봉선화 가루를 사다가 물들이는 사람도 있어요.^^
특히 아이들이 물들이고 다니면 참 곱게 보였지요. 후덥지근한 계절입니다. 봉선화 꽃빛처럼 밝게 보내시기를...
무더위 건강 조심하십시오
지난 주 선산에 갔다가 봉선화를 만났습니다.
예쁜 시골길과 초록 들녘도
힐링이 되었습니다
봉숭아 라고도 하죠?
우리 민족에게는 정서적으로 아주 친근한 꽃이라고 생각됩니다
봉숭아 피는 계절
무더운 날씨이지만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서재원 선생님께서는 이 계절에 조금은 깊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네요
늘 건강하시고 활력 잃지 않고 안녕한 삶을 누리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몇 해전 경북문학에 실린 "봉숭아"라는 작품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 전부는 아닐지라도
너에게 만큼은
손톱만큼이라도 물들여 놓고 싶었다"
짧지만 아주 강렬한 감동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