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학 칼럼>
정신적 큰 스승, 바람의 초상(肖像)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김동명학회 회장)
1. 운명적 만남과 관계층위의 회복
생명의 계절이 오는 길목에서 소소한 일상의 삶을 문학의 현실참여로 장식하는 「정신적 큰 스승과 바람의 초상」이신 녹규(鹿叫) 김우종(金宇鐘, 1930-) 교수님의 미수(米壽)를 축하하는『꽃피는 나무』의 하서(賀書)를 허선주 시인에게서 부탁받고 한순간 까닭모를 눈물이 묻어났다. 참담한 한국전쟁(The Korea War) 이후, 우리현대문학의 변화·발전에 그 나름의 역할을 담당했던 윤병로(尹炳魯, 1936-2005) 교수가 2005년 12월, 숙환으로 이산(離散)의 통한을 가슴에 안고 아끼고 존경하던 이들의 곁을 꽃잎 이울듯 조용히 떠났다. 그렇게 한 시대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고, 양식을 지닌 지성을 떠나보낸 지 10여년 남짓한 세월이 또 강물처럼 덧없이 흘렀다.
한 때나마 우리평단을 주도하며 농촌문학에 애정이 각별한 윤병로 교수의 경우,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지적은 더없이 견주어지기에 인연의 소중함을 새삼 되 뇌여 보면 분망했던 한해를 조용히 마무리하던 2007년 12월 1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문학의 집'에서 윤병로 교수의 작고 2주년 기념을 위한 <제1회 윤병로 문학상시상식>이 성균관대학교의 명예교수인 조건상 작가의 사회로 다소 갈앉은 애도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순(耳順)의 삶을 지나쳐온 필자에게 <추억의 오찬> 행사는 필히 참석해야 하는 까닭에 간간히 뿌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서울고속버스에 올랐다. 가끔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사적으로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였던 윤병로 교수를 기리는 이날의 <윤병로 문학상> 수상자는 석사과정 지도교수로 ‘한국문인의 양심(良心)’으로 평가받는 김우종 평론가이셨다.
이날 '산림문학관'에는 심사를 담당한 구인환, 신동한(심사위원장), 이성교, 김양수, 강우식을 포함한 엄기원, 조병무, 이명재, 이광복, 김병권, 김송배 등 문단의 여러 중진들과 생존에 고인의 문학과 인간미를 존중했던『순수문학』의 박영하 편집인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비교적 행사는 시종 엄숙하고도 따뜻한 분위기속에서 ‘인연의 소중함을 확인시켜주는 추억의 오찬’으로 진행되었다. 한국평론계의 인물 중에 고매한 인품과 자상한 심성의 소유자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달라 나무처럼 큰 존재였던 윤병로 교수는, 평남 중화출신으로 평양고와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21세에 「현대문학」(1957) 평론으로 등단하였으며, 1961년부터 모교인 성균관대 교수로 임용되어 2001년까지 재직하였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문학평론가협회 및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성균관대 문과대학장을 역임하였고, 또 『한국 현대소설의 탐구』,『민족문학의 모색』,『윤병로 평론 선집 1, 2』등 다수의 역저를 남겼다. ‘월탄문학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근정포장’ 등을 수상했으며 퇴임 직후에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평소에 고인과 각별한 친분을 나누었던 이성교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같은 해 「현대문학」등단의 인연도 그러하거니와 또 교수의 신분으로 오랜 날의 교분이 남달랐다. 윤병로 교수는 평소 술과 담배를 멀리했고 학구적인 성품으로 학문연구와 집념에 몰두했으며, 깔끔한 천품을 지닌 한 시대의 지성이었다.”라며 고인과의 인간관계를 회상하면서도 못내 따뜻한 정한을 감추지 못하였다. 지난 2004년 보령시의 육필문학비공원에 황금찬, 윤병로, 김우종, 신봉승, 이성교, 엄기원 등의 문인들과 함께 마침 필자의 ‘육필시문학비’도 건립되었는데, 그곳에 각인된 윤병로 교수의 시편인 <아! 나의 어머니>는 비교적 호흡이 짧은 편이나 제자의 도리로 낭송을 한 그날의 감회는 조금은 남달랐다.
2. 따뜻한 감성과 평단의 두 얼굴
모름지기 대다수 주위의 이들에게 스스럼이 없는 김우종 교수는, 민족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부딪혀온 민주화의 산증인으로, 펜으로 지켜온 문인의 양심, 즉 불꽃같은 열정과 강인한 의지의 표상이다. 반세기 전 경희대교수 재임 무렵 그의 호는, 같은 직장의 선배교수였던 황순원, 조병화, 박노춘이 낙관을 새겨주며 지칭해준 ‘사슴은 평화를 상징하고, 평론가는 해야 할 말을 꼭해야 하는 평화의 절규인 녹규(鹿叫)’다. 우리현대문학사에서 순수-참여문학론은 30년대 이후 60년대 후반까지 줄기차게 전개되어 왔다. ‘참여’라는 용어는 1923년 카프(KAPF)의 출발에서 사용됨과 동시에 그 대립항목으로 ‘순수’라는 용어가 의미와 체계를 가지고 사용되어 왔다. 이후 순수-참여논쟁의 발단은 1930년대 말 평론가 유진오와 작가 김동리로 대변되는 세대-순수논쟁과 맞물리게 되었다.
이처럼 해방공간에서 전개된 조선 문학가동맹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사이의 순수-참여논쟁은, 휴머니즘에 관한 이해와 인식의 차이에 의해 두 조직의 문학적 이념을 수립하게 된다. 다소 시대착오적인 이론의 미완에 의해 순수-참여논쟁은 50년대 초반에 다소 잠잠해졌다가, 50년대 중반 이후 신세대 비평가들에 의해 논쟁이 다시 격돌하게 되는데 바로 김우종, 이어령, 유종오, 윤병로 등이 소위 이 시대의 비평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현대문학사에서 이데올로기의 횡포에 초연하게 투항하며 예리한 비판정신으로 독재정권 압제에서 우리문단을 질타하며 직격탄을 날린 김우종 교수는 1960년대 참여문학의 논쟁을 주도하였다.
한편 대다수 문인들이 순수문학의 시대적 정조(情調)에 안주할 때 <저 땅위에 도표를 세우라>, <인간구원으로서의 문학> 등의 평론을 통하여 기존문학의 풍토를 극열하게 비판하며 문학인의 시대적 소임을 일깨운 진정한 민족의 지성이며, 양심이었다. 그의 역저인『한국현대소설사』는 일본에서 출판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1974년 직후 교수직에서 해직되고 투옥되는 수난으로 집필이 허락되지 않은 형극의 시간대를 화필생활로 생계를 연명하였다. 그는 집념의 문인으로 독일청년문학파의 거두격인 ‘영원한 자유의 병사’ 하이네와 견주어도 결코 지나치거나 거부감이 없다.
암울한 민족사의 격동기에 일방적인 이광수의 친일행적에 관하여 김우종 교수는 친일문학가로 폄하된 ‘춘원을 위한 해명과 복원’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필자도『한국현대문학사』(새문사, 2005)에서 춘원의 친일은 ‘보살정신에 의한 자기희생’으로 서술한 바 있으나, 한편 김우종은 문학계간지인「휴먼메신저」(2007, 가을호)의 소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에서 "친일에 대한 이광수의 업보는 남들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수십 년간에 걸친 그의 항일운동과 문학적 업적은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기술하면서, 해방정국에서 반민특위가 춘원을 친일혐의로 구속 투옥한 것에 관해 서도 “친일인사 다수 중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참작 없이 구속투옥에 의한 재판을 진행한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다. 힘없는 사람들만 처벌했다는 점에서 큰 과오가 있으며 법이 대중적 인기논리에 편승한 것”을 강한 논조로 비판하였다.
3. 지사적 문인으로의 소임과 도전정신
또 하나 유념할 기억 흔적은 2008년 7월말 오후 서울 메리어트호텔 중식당에서 필자가 주간이던 「아세아문예」특집대담을 통해 소박한 심사(心事)나마 존경의 뜻을 담아 정신적 큰 스승을 기리는 정성으로 「펜으로 지켜온 양심, 평론가 김우종」이 ‘지사적 투혼으로 올곧게 글쓰기로 일관해온 한 시대의 진정한 문사요, 예언적 선구자임’을 그 나름으로 조명한 바 있다. 근간에도 ‘휴머니즘의 전도사’를 자처한 그 자신은 생명외경의 기치 아래 <문학은 소외계층에 희망임>을 역설하며,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존중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인간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 우리생활에 필요한 것을 유용하게 쓸려면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돼야 한다.” 이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정신적 실향의식에 시달리는 소외계층을 향해 공동체인식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어려운 현재성에서도 순수서정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계간『창작산맥』을 몸소 발행하는 정신작업에 눈물겹게도 열정을 쏟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예언자적 존재로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새로운 출항을 위해 그물코를 반드시 기워야 하듯이 항시 역사는 노력하는 자의 편에 서야하는 까닭에,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일지라도 생산적인 정신작업에 적극 동참할 바다. 일제강점기 비중 있는 민족 시인으로 새롭게 학계의 조명을 받는 ‘심연수 선양사업’을 20여년 필자가 주관한 것이나 「선으로 가는 길」의 이종철 발행인과 중국 용정 현지에서 3년 전부터 “민족시인 윤동주 문학상”을 시행하는 일 또한 아름다운 예술 혼을 불꽃처럼 꽃피워 도전과 화합의 지평을 열고, 작게나마 겨레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이 같은 역할의 수행이다.
비록 격랑에 밀리고 황혼의 길목에 머물고 있는 삶일지라도 보다 깊이 성찰할 때, 우리문단에서「한국문인의 양심(良心)」으로 평가받으며 보람찬 미수(米壽)의 삶을 영위하는 ‘모두의 정신적 큰 스승이신 김우종 교수님’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항상 자상하고도 겸허하며 고매한 품격과 이 시대의 마지막 자존감을 지닌 지사적인 선비다. 그렇다. “엄선생은 산과 호수, 그리고 바다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광 좋은 고향에 몸담고 있지만, 가급적 낚시는 취미로 하지 말아요.” 이것은 대학원 당시에도 창조적 영혼으로 삶의 존엄함을 다독여 주시던 엄격하되 다정한 일깨움이다. ”내가 대학 강단에서 엄창섭을 만났다는 그 사실은 나에게 큰 행운이다.”라며 제자에게 존재감을 불어준 것은 내 삶의 항해에서 진정한 선장(船長)으로 자상한 품격의 큰 스승임에 틀림이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 감사하게도 평생을 고향의 산자락에 머물고 있는 필자에게 지난 「현대문학」50주년 기념호와 「한국일보」사설에서 사제 간의 연이 잇닿아있는 이순원 작가가 ‘그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지적이나 또는 세계적인 뮤지컬「마타하리」의 박용재 예술고문이 자신의 시집을 간행할 때마다 ‘아주 오랜 동안 제 영혼의 곁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지난 2011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시행된「제2회 박인환시문학상」행사 중 ‘김우종 심사위원장의 심사평’을 글의 말미에 옮겨 결론에 가늠하며, 모쪼록 이 땅의 존경받는 평단의 상징적 존재로서 강건하시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정신과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다. 그 사람이 엄창섭 시인이다. 박인환 문학상수상자로서 엄창섭 시인이 선정된 것은 그 동안의 어떠한 문학상 선정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엄창섭 수상자보다 ‘박인환 시문학상 자체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문학사 속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한국문단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