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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격변을 겪어야만 했던 시기를 살아간 사람들도 당대를 혼란스럽게 여겼던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를 흔히 근대로의 전화기라고 표현한다. 어쩌면 당시의 시대적 변화는 그 이전에 겪었던 어떤 시대보다도 급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강압에 의해서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서 한때 외부로부터의 관문을 폐쇄하는 쇄국정책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무능한 정권 담당자로 인해 외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갔고, 마침내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격동하는 시기를 살았던 정교는 시대의 목격자로서 자신이 보고 겪은 바를 기록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대한계년사>를 편찬했다. 이 책은 비록 개인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대한계년사>의 5권은 1899년부터 그 이듬해인 1900년 4월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정교는 독립협회 회원으로서 당시의 보수적인 내각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것을 목도하고, 그에 항의하는 회원과 대중들이 개최한 만민공동회마저 무력으로 진압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독립협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독립협회의 해산과 만민공동회의 무력 집압에 대해서 비판적인 내용들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다.
결국 독립협회의 주요 인사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되는 일들이 발생했고, 이에 항의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 보수파들에 의해 장악된 정권의 등장은 어쩌면 일제 강점기로 치닫는 수순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이 표제로 등장하지만, 그 실상은 청나라와 조선의 교섭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그치고 있는 내용이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지칭하는 것을 통해서, 정교가 성리학적 이념에 투철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편찬자인 정교는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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