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에 머무를 때, 쇼핑을 나가 슈퍼마켓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혼자 걸어나오는데 노숙자로 보이는 중년의 백인 남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야윈 몸에 긴 머리칼, 잔뜩 그을린 피부, 남자는 간편한 옷에 샌들 차림이었다. 복장은 호놀룰루 일반시민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적어도 호텔 수영장 가에서 다이키리를 마시며 일광욕을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대충 상상이 됐다.
"미안하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햄버거를 먹고 싶은데 1달러만 주지 않겠습니까?" 그는 나직하게 물어왔다.
나는 좀 놀랐다. 길모퉁이에 서서 "동전 한 푼 줍쇼" 하는 노숙자는 종종 보지만, 목적과 금액을 그렇게까지 분명히 정해서 원조(랄까?)를 요청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차장 끝에 '버거킹'이 있었고 고기 굽는 냄새도 은은히 풍겨왔다.
물론 나는 그 사람에게 1달러를 주었다. 첫째 몹시 배가 고플 때 어디선가 햄버거 냄새가 풍겨오면 그건 정말 고통일 거라는 동정심 때문이었고(거기에는 확실한 공감대가 있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노숙자와는 전혀 다르게 독창적으로 호소하는 그의 기획력에 순순하게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갑에서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햄버거 맛있게 드세요"라며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 사람은 이번에도 나직한 목소리로 웃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1달러짜리 지폐를 주머니에 찔러넣더니 버거킹 쪽으로 쿨하게 샌들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햄버거와 같이 밀크셰이크라도 드세요"하고 3달러 정도를 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나중에 문득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사소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는 데도 남들보다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대체로 이미 차가 떠난 뒤다.
그래서, 이 얘기의 교훈이 뭐냐고?
이렇게 물으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인간의 상상력은 어느 정도 한정된 영역이 아니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배가 고픕니다. 얼마라도 좋으니 돈 좀 주세요"라고 막연히 말하면, 이쪽도 그리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고작해야 25센트 정도를 의무적으로 주고 끝냈을지도.
하지만 "햄버거를 먹고 싶은데 1달러만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이미지를 제시하니 그것만으로도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사정이 생겨 내가 만약 상대의 입장에 처하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1달러를 주게 됐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으로 기도까지 했다. 그가 그 돈으로 햄버거를 먹고 조금이나마 행복해하기를.
기왕이면 밀크셰이크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집 「채소의 기분,바다표범의 키스」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