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베트남!
초등학교 시절, 음산한 분위기의 배경음악과 함께 시위하는 시민들과 분신하는 승려의 모습을 빠른 화면전환과 함께 전개하면서 긴장과 불안감을 조성시키던 TV 선전...'이래서 월남은 공산화되고 패망하였다!'라는 방송을 거의 몇 달동안 몇번씩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유신헌법 아래 똘똘뭉쳐야만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을수 있다'는 TV 선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담임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월남패망의 교훈에 대해서 글짓기를 했던 기억과 함께... 열악한 무기와 장비 인원으로, 최첨단 무기와 엄청난 폭탄과 무차별적인 고엽제를 마구 뿌려대던 미국이라는 나라와의 1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
베트남 인들에 대한 민족적 호기심과 자긍심의 원천이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으로 한국군은 약 오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고엽제 피해자도 약 2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편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약9천명이 넘는다는 베트남 현지 통계와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베트남에 진료봉사를 자원하여 3월 17일부터 3월 25일까지, 일주일간의 진료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작년 이맘 때 쯤, 화해와 평화를 위한 베트남 진료단(화.평.베.진 제1기)로 베트남 진료를 다녀왔던 광주, 전남 건치의 김규탁 회장과 정태환 부회장 그리고 후배들과 베트남 평가보고 모임을 가지면서 너무도 결연한 의지와 시종 진지하고 총명한 눈빛으로 내년에는 꼭 한번 다녀오라는 단호한 권유를 받고, 베트남 진료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동경 호기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틀에 박힌 병원 생활과 조그만 미러 속으로만 들여다보는 세상 속에서 개원 10년을 맞이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가다듬고 싶은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가자! 베트남으로...>
여수 공항에서 여천의 오창주 전임회장님, 순천의 김병무 부회장님, 우수연위생사와 합류하여 서울 공항에 도착하니, 많은 건치의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맨 먼저 1.5톤트럭 한 대 가득한 공용진료장비를 옮기고 화물탑재수속을 밟고, - 실제로 1톤 가량의 공용장비와 55명의 짐들을 한 곳에 모아 싣고 내리는 일이 가장 번거럽고 힘든 일이었다. 이 과정은 돌아오기까지 11번 정도 더 해야했다.- 배웅 나온 중앙 임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서울에서 호치민까지의 만리길(4073 km)을 부푼 기대와 설레임, 각별한 다짐을 새기며 출발하였다.
저녁 8시10분에 출발하여 호치민시 탑선넛 공항에 현지시각 오전 12시 30분. 그리고 베트남 국내선을 이용하여 아침 8:30분에 다낭공항에 도착한 1차팀은 프로펠러기로 다낭에 도착하여 울분과 공포가 가시지 않은 표정의 2차 팀의 원망어린 시선을 애써 피하며-마중나와 있던 베트남 호치민 대학 동반어학과, 한국어과 학생 15명과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베트남 인(?)- 나중에 알고보니 베트남 문학을 전공하는 한국 유학생 하재홍씨와 상견례를 하고, 1기 진료단들은 1기때 학생들과 너무도 반가운 포옹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흙먼지와 5초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지치다 못해 익숙해질 무렵...,드디어 우리의 목적지, 송짜강이 내려다보이는 썬띤현의 미짜호텔에 도착하였다.
썬띤현 의료청은 우리나라의 군립의료원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치과 시설은 60년대 이발소 의자수준었고, 나머지 시설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건치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솔선수범으로 대청소부터 시작하여 순식간에 야전 치과병원이 탄생하였다.(나중에 들은 말로는 현지의 치과의사들이, 우리가 가지고 간 이동식 장비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밀라이 학살과 오월 광주>
드디어 본격적인 진료단 활동이 시작되던 첫날. 우리 1조는 우선 1968년 당시 미군에 의해 한마을의 베트남 양민 504명(노인60명,어린이173명 포함)이 불과 4시간만에 집단 학살당한, 밀라이 학살기념관을 먼저 방문하였다.
밀라이 기념관의 위령탑에서 간단한 추모의식을 가진후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분향헌화하였다.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속 학살의 장면 하나하나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아프고 슬픈, 나자신이 인간이라는게 부끄러운 사연들이 담겨 있었다. 참전 미군들의 주장대로 그 작전이 실제로 적과의 교전이나 접전 이었다면 왜 죽은 사람은 모두 베트남인들이고, 부상자는 단 한명의 흑인미군뿐일까? 그 부상당한 미군도 강제로 할아버지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후, 자책감에 스스로 자기의 발등에 총을 쏜 흑인 이었다니...
21년전, 나는 오월 광주를 내 눈으로 분명하게 보았다.
그날은 정말 봄 햇살 따사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광주일고 옆 금남로를 통과하게 된 내 눈에 비친 그 광경은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분명 우리나라 공수부대 복장을 한 그들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곤봉으로 내리쳤으며, 머리에 피가터져 쓰러진 사람을 군화발로 짓밟고, 질질 끌고가 트럭위로 쓰레기 싣듯 던져 올렸고, 그 트럭위에서는 웃옷을 벌거벗기운 채, 머리고 몸통이고 다리고 닥치는대로 두들겨 팬 다음. 한 차 가득 트럭이 채워지면 어디론가 실고 떠났다.
그러부터 며칠 후, 우리 집이 있던 전남대학교 정문 굴다리 앞쪽에서는 느닷없는 공수부대의 발포와 함께, 내 앞에 있던 한청년이 손목에 관통상을 입어, 완전히 꺽인채 핏 덩어리가된 손목을 붙잡고 황급히 피신하던 광경도 또렷하다.
그런데 슬프고도 놀라운 사실은 이 밀라이 기념관이 건립되자, 베트남 전역에서, 이보다 더 규모가 크고 생생하고도 잔혹한 학살의 증언들이 많이 쏟아졌다고 한다. 단지 '밀라이'는 역사의 기록물인「학살사진」들이 보존 되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진상파악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디엔 니엔의 증오비와 팜터메오 할머니>
꽝아이성 디엔니엔 마을에는 "증오비" 라는 학살의 증거물이 있다. "1966년 10월 9일, 남쥬띤(남조선)의 박정희 군대가 이곳에서 112명의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였다"라고 씌여진 커다란 비석에는 112명의 일련번호가 매겨진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폭우가 몰아치던 그날, 당시에 사당이었던 이곳에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집단 학살하고 쓰러진 시신들위로 수류탄을 투천하여 시신 수습조차 힘들게 학살한 만행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그곳에는 깊고 티없이 맑은 눈망울의 우리 아이 또래의 베트남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들에게 맑은 웃음으로 손 흔들며 " Hello !"를 외치는 그 아이들의 눈망울을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다.
"세상에 모든 전쟁을 종식 시키고,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자 " 는 각오를 더욱 다지면서,디엔니엔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인 팜티메오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작년 까지는 건강하게 말씀도 잘하셨다는데, 앉아계시기도 힘들정도로 쇠약해진 할머니의 모습에 너무도 죄스러웠다.
할머니는 가슴에 난 총탄자국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시신들 속에서 살아나신 이야기를 힘겹게 토해 내셨다. 우리와 함께 답사를 갔던 베트남 참전군인인 김영만 선생님께서 우리는 그때 전쟁의 광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고백한 후,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께 큰절을 올리셨고, 할머니는 무척 당황해 하시면서도 "너희들! 너무 불쌍해 " 라는 말과 "죄다! 죄다! 엄청난 죄다! 라며 삼 십 년 동안 가슴에 끌어안고 지내시던 회한을 거듭 거듭 반복하셨다.
그 누구도 아무도 한동안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명분도 없고, 도덕성도 없는 전쟁에 연합군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한국군을 용병으로 끌어들인 미국과, 4.19혁명을 총칼로 짓밟고 등장 한 박정희가 경제 발전과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독재를 옹호해 줄 미국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를 맹목적인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데에 대해 너무도 화가 났다.
왜 자기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지, 왜 베트남 사람들만 죽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젊은이들의 내던져진 삶은 어떻게 보상되어야 하는가? 그런 박정희를 위한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현실이 기가 막히고 서글퍼졌다.
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던 베트남 공안 관리자는 베트남 속담 중 "남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좋은 친구다" 라는 말을 우리에게 진심어린 말투와 태도로 전해주었다. 학살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전후세대가 먼 이국 땅까지 와서 분향, 헌화, 참배하며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는 말과 함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진실한 마음은 항상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 사랑이 넘치는 수술실 >
진료단 활동 이틀째, 나와 룸메이트인 배석기 선생님, 충남 홍성의 정철순선생님은 구개구순열 (언청이 수술) 수술 팀에서 수술지원 업무를 부여받았다. 여러 차례 베트남 현지 언청이 수술경험이 있으신 부산치대 구강외과 김종렬 교수님과 강영주 선생님의 수술을 도와드리며 좋은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전 8시에 썬띤현 의료원에서 예비진단한후, 환자를 선택하고 수술장소인 꽝하이성 의료원으로 이동하였다. 꽝하이성 의료원은 병원 건물이나 넓이로는 어지간한 대학병원 정도였으나 그곳의 시설, 장비, 진료수준은 우리나라의 60년대 중,후반 정도로 생각되었다. 수술실에 scrub 간호사도 준비되지 않은 현실에서 (나중에는 간호사가 수술지원함) 마음을 정리하신 김 종열 교수님은 "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자 "라고 선언 하신후, 직접 술전준비 scrub & Drapping까지 하시면서 첫째날 3case , 둘째날 2case 의 수술을 진행하였다. 오전, 오후 계속 서서 정말 꼼꼼하고 숙달된 솜씨로,- 게다가 베트남 스탭들, 옆에서 수술 지원하는 진료 단원들까지 일일이 격려하고 챙기시며 - 열심히 수술하시는 교수님과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강영주선생의 모습에 마음으로부터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 거시기가 거시기헝께 거시기해라 >
숙소에서 샤워를 하는데 룸메이트인 배 석기 선생이 "행님! 밥무그러 가입시더!"라고 한다. 나는 무슨 대답을 했는지 생각나지도 않는데 나중에 배석기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샤워중에 엉겁결에 나온 나의 대답은 "석기야! 거시기가 거시기헝께 거시기해라!" 라고 했단다. 잠시 멍하게 있던 슬기와 재치가 넘치는 배 선생은 바로 상황 분석후 -"(분석) 석기야! 내가 <지금 샤워 중이어서> 바로 못나가니까 문 닫아주고 <먼저 내려가서> 식사해라!" 알아서 행동했다. 며칠 밤을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우리는 바로 이심전심 이었습니다.
< 베트남 최고의 시인·소설가 탄타오 >
진료 이틀째 저녁에는, 베트남 최고 문인상을 여러차례 수상한바 있는 탄타오 시인을 모시고, 베트남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국경을 넘어 인간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는 화·평·베·진 진료단의 헌신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으며(그날저녁, 약5분정도 TV 뉴스를 통해 방영되었다함) 양심적인 양국의 지식인들과의 만남이 굉장히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의 전후 세대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과거를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아픔을 덮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사<베트콩>(종군기자)활동을 회상하기도 했다.
낮에 학살지 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봉고차 안에서 김 영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베트콩을 잡으면, 절대로 살려달라고 빌거나 비굴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욱 화가 나서 더 잔인하게 고문도 해보고, 위협도 해보았지만, 더욱 당당해지더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과 동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동포애와 자긍심의 발로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고, 나도 그 순간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본듯한, 총칼 앞에 서도 정말 당당하게 맞서던 베트콩 포로의 모습이 뚜렷하게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강의가 끝나고 우리 진료단장이시자 시인이신 이한우 단장님께서 강의에 맞먹는 아주 길고 긴 장시(長詩)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 미안해요 베트남 " CD를 증정하였다.
< 이상한 머리싸움 >
진료 마지막 날, 나는 드디어 의료원에서 직접 진료에 참가할수 있었다.
원래는 약제실에 배정되었으나, 약제실 인원이 충분한 관계로 위 유민 선생님이 하시던 소아치과 진료를 대신 하게 되었다. 가로*세로 1m 도 안되는 좁은 공간에 진료자, 환자, 보조자 unit 장비보조기구까지 정말 이런 상태에서 삼일동안 진료를 해낸 진료팀에 정말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가지고 진료한 큰 007가방 크기의 unit 장비는 그야말로 이동하면서 별 불편함없이 모든 치과 진료를 할 수 있을 전도로 힘도 세고 좋은 장비였음에도 (약800~1000만원정도 한다함), 허리와 어깨가 뻐근했는데, 계속 같이 쭈그리고 서서 suction 하고, 재료준비하고, 없는 재료 옆방에서 가져오고 했던 한은미 위생사께 진심으로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계속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통역에 힘써준 "뜨이" 그리고 불편한 자세와 비좁은 여건 속에서도 거의 울지도 않고 치료를 잘 받아준 크고 까만 눈동자의 베트남 소년 소녀들 모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비좁은 진료환경에서 handpiece를 돌리기 위해 환자 쪽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술자와, suction 및 진료상태 파악을 위해 구강내를 살피는 위생사의 머리 양보하는 아름다운 진료자세를 견지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나에게도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하게 환자와 보조자를 배려하면서 진료하는 모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개원 초 잠시를 제외하고 나에게서 별로 볼 수 없었던 모습인데...
( 우리 집사람이 늘 그런 말을 합니다. " 밖에서 하는 것의 10분의 1만이라도 집에서 해보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하여 )
진료 4일간 총 2779명의 환자와 8명의 언청이 수술을 마쳤으며, 베트남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 말로만 듣던 모짬 빤짬 >
진료를 모두 마친 마지막날 저녁에는 꽝아이성 주석(도지사) 주최의 기념식과 만찬이 거행되었다. 주석, 부주석, 행정부실장, 의료 센터장, 여러 신문, 방송사의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 참! 무지 귀엽게 생긴 주석 딸이 있었습니다) 정말 무지하게 긴 간부 소개를 일일이 또 다시하며 감사인사를 마치고, 본론은 고맙다 였고, 또 엄청 긴 끝인사로 인사말을 마쳤는데, 1기 진료단 선생님들에 의하면 " 엄청 인사가 축소된 형태여서 아주 다행 "이라는 거였다.
단장님의 간략한 감사 말씀과 CD 및 선물 교환을 마치고 연회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기념식장에서 그렇게 엄숙하던 관료들이 연회장에서 정말 즐겁고 기쁘게 노래부르며 춤추는 모습은 참 의외였습니다. 우리 5명이 둘러앉은 Table 에 주석이 한번와서 인사하고 모짬모짬(건배), 부주석이 와서 모짬모짬, 의료청장이 와서... 그 외에도 여러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술을 권하는 아주 재미있는 관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석부터 시작하여, 노래를 한 바퀴... 노래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입술(뺨이었던가?!)을 훔쳐갔다(?)는 하재홍씨는 끝내 범인색출에 실패하고 무지 안타까워했었다. 정제봉, 조 상연 선생님의 열정적이고 힘찬 노래와 춤에 힘을 얻어 드디어 진료단원들 본색을 맘껏 드러냈고, 그 이후로는 계속 못 먹어도 GO 였다. 변기 뚜껑을 깰 때까지...
< 다시 호치민시로 >
청룡 부대원들에 135명의 양민이 학살 당하고,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다시 불도저로 시신을 밀어 버렸다는 하미마을. 짓이겨진 살 조각과 뼈 조각을 모아 분배하고, 위령비를 세웠다는 하미마을에서, 우리는 당시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삼 십년이 지난 일인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증언하는 모습에 정말 미안했다.
잠시 빈 시간을 이용하여 들렸던 해변가에서는 베트남 출발부터 가졌던 모든 긴장과 피로가 겹친 상태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각자 휴식하기도 하고, 각 조별로 인간탑을 쌓으며 친목과 단합을 과시히기도 하고, 3조의 못말리는 삼총사(김동근, 조상연, 선윤식 선생님)는 급기야 팬티바람으로 바다 수영에 도전하고, 캠코더를 든 나뭇꾼은 옷 가지고 줄행랑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보다 못한 맘씨 좋은 호주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의 빨간 스카프를 빌려주고, 쇼! 쇼! 쇼!...
참 즐겁고 편안했던 오랜만의 자유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호치민시에서는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연기! 속에 마지막 남은 하룻밤을 완전히 불살랐다.
< 고마워요! 베트남! >
티벳 고원에서 발원하여 미얀마, 라오스, 타이, 캄보디아, 베트남까지총 연장 4200Km 에 한다는 인도지나반도의 젖줄, 메콩강의 하류를 관광하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렀던 음식점에서는 하재홍씨가 미리 설명해 주었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1달러를 외치며 모자와 엽서를 내미는 아이들과 아줌마가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도 따라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며 베트남 식당주인이나 종업원들이 쫒아 내지 않는, 아주 낯선 풍경에 의아했다. 우리 나라 같았으면 쪽박 바가지를 깼을 것이다. " 우리가 그 사람들을 내쫓으면, 그 들은 무얼 먹고살지요?!"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반문한다고 한다.
아마도 오랜 외세의 침탈과 가난함 속에서 몸에 밴 동포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인 것 같다. 참 부러웠다. 남과 북 거기서도 동과 서로 나뉜 나라의 국민으로서 ......
< 헤어짐 그리고 깜온 >
... 예정된 이별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우리는 마지막 저녁식사를 위해 사이공 유람선에서 선상만찬을 가졌다.
8박9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 십년 친구 였던것처럼, '헤어짐이 너무 서러워!'이곳 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맥주잔이 채워져 있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공포의 파노라마는 끝이 없이 이어지고 위유민 선생님의 '농'에는 사랑과 아쉬움의 글들로 가득 채워져 이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담아낸 보물 상자로 변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이별의 시간이 왔다.
뜨겁게 맞잡은 손, 와락 껴앉은 어깨를 놓지 못하고 8박9일간 함께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들하고는 더욱 섭섭했다. 베트남 학생들의 높은 민족적 자긍심과 착하고 예절바른 태도... 이 모든 것이 베트남을 더 아름답고 힘차게 발전시키리라 믿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아시아나 항공기내에서 오랜만에 펼쳐든 한겨레 신문의1면에는 " 정주영사망에 북한 조문단 파견소식 "이 실려 있었고, 2면의 중간쯤 1단 기사로"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실려있었다.
뒤집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배웠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는 "베트남 참전" 문제를 과연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 자유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파병했노라고, 총을 들지 않은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총을 쏜 적은 결코 없었노라고...
진정한 평화와 자유 사랑의 참 의미를 고민하게 해준 '제 2기 진료단'에
참가하신 모든 분들게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 사랑해요! 베트남 "
" 미안해요! 베트남 "
" 고마워요! 베트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