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마네, 모네, 르누아르를 좋아하는 이웃으로부터 유명한 화가들의 이야기도 써 달라는 쪽지를 받았습니다. 워낙 널리 알려진 화가들을 쓰게 되면 그림 이야기보다는 작가 이야기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아무래도 미술사 리포트 같은 글이 될까봐 그동안 피했었는데, 어쩌자고 그날은 제가 덜컥 써보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를 고르기로 했습니다. 그림과는 달리 아주 매력적인 인생을 가지고 있거든요.
파리의 퐁 네프 다리 Pont Neuf, Paris, 1872
퐁 네프 다리를 떠올리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랑에 늘 불안해하던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 <퐁네프의 연인들>이 떠오릅니다. 다리는 인위적으로 한 곳과 또 다른 한 곳을 연결하는 곳이기 때문에 만남과 이별이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가슴을 스산하게 하는 장면들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영화와는 달리, 르누아르의 퐁 네프 다리에는 빛이 가득합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풍경화 중에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작품이 많은데…, 늘 궁금합니다. 물론 빛을 담기에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았겠지만요.
르누아르는 양복장이인 아버지와 여성 옷을 만드는 어머니 사이의 일곱 아이 중 여섯째로 프랑스의 리모주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네 살이 되던 해 파리로 이사를 했는데 루브르 박물관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 견습생으로 취직을 합니다. 드로잉에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곧 고급 도자기 장식을 맡게 되었고 색과 드로잉에 대한 감각을 키웠습니다. 쉬는 날이면 집 근처에 있는 루브르를 찾아가서 프랑스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곤 했습니다. 미술관 근처로 집을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라 그르누이예르 La Grenouillère, 1869
모네의 라 그르누이예르 Monet, La Grenouillère, 74.6x99.7cm, 1869
라 그르누이예르는 센 강 근처의 유원지라고 합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함께 같은 장소를 자주 그렸습니다. 두 사람은 라 그르누이예르에 비치는 빛과 물에 매혹되었습니다. 이때 훗날 인상파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이루진 순간이라고 말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림자의 색이 검거나 갈색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대상이 가지고 있는 색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두 사람은 깨닫게 된 것이죠. 나중에 두 사람은 각자의 화풍으로 제 갈 길을 가지만 그 후에도 자주 함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미술가가 정치가보다 100배쯤 맘에 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다니던 도자기 공장이 문을 닫자 블라인드와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며 야간 드로잉 학교에 진학합니다. 정규 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르누아르는 필사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21살이 되던 해 샤를 글레이어의 화실에 들어가서 회화 공부를 시작합니다. 시슬리(Alfred Sisley)와 바지유(Frédéric Bazille), 모네(Claude Monet)를 만난 것도 그곳이었습니다. 이 시절 르누아르는 캔버스를 살 수도 없을 만큼 가난했습니다.
오달리스크 Odalisque, 1870
이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은 ‘알제리 여인(An Algerian Woman)’입니다. 오달리스크는 하렘에 있는 여인들을 말하죠. 오달리스크를 묘사한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화려한 색깔과 여인에게서 흐르는 관능미가 공통으로 보입니다. 여성의 관능성과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던 르누아르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6년간 글레이어의 화실에서 공부하는 동안 1850~1860년대 가장 혁신적인 화가였던 마네와 쿠르베, 들라크루아와 코로의 영향을 받습니다. <오달리스크>는 들라크루아에 대한 연구 결과가 가장 많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1866년과 1867년 살롱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르누아르는 연거푸 낙선했습니다. 1868년에 가서야 입선이 되었는데, 27살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었죠. 그러나 르누아르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습니다.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그 이듬해 파리 시민 3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파리 코뮌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죠.
믿지 못할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파리 코뮌 시절 센 강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르누아르를 코뮌의 멤버들이 베르사유 군의 스파이로 생각하고 르누아르를 체포해서 강으로 집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대장이 나타났는데 르누아르와 예전에 알고 있었던 사이여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센 강은 알고 있겠지요.
특별 관람석 The Theater Box, 1874
노란색과 붉은색을 배경으로 화사한 여인이 관람석에 앉았습니다. 무대를 보라고 준 망원경을 가지고 남자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인의 옷에 굵게 칠해진 검은색 무늬는 르누아르를 색채 화가라고 부르는 이유가 됩니다. 검은색은 더 이상 그림자나 어둠의 색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인상파 고유의 특징이 커 보이지는 않습니다. 부드러운 색 터치로 세부 장면을 묘사한 이 작품은 1874년 1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그의 작품 6점 중 하나입니다. 그림 속의 남자는 르누아르의 동생 에드몽이고 여인은 니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몽마르트의 모델입니다. 형으로부터 포즈를 요청 받은 동생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맨날 나에게만 이상한 포즈를 주문하고 있어.”
“그럼 네가 그리던가.”
알프레드 시슬리와 그의 아내 Alfred Sisley with His Wife, 1868
르누아르의 친구인 시슬리와 그의 아내입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서로의 초상화나 가족을 그린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대부분 가난해서 필요할 때마다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혹시 끈끈한 우정이 더 컸던 것은 아닐까요? 르누아르의 초기 작품들은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구성으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많습니다. 이 작품은 마네의 영향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초기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 다양한 화가들의 흔적이 보입니다. 물론 그가 다 존경한 화가들이었죠. 쿠르베와 마네의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을 존경했는가 하면 드가의 작품 속 인물들의 동작에 경탄하기도 했습니다. 멀리는 부셰의 작품까지도 그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장르와 시대의 폭이 넓었지요. 때문에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좋습니다.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르누아르의 작품들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해 영국의 화랑 뒤랑 루엘에 그의 작품 두 점이 전시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큰 발을 움직이게 된 것이죠.
독서하는 여인 Woman Reading, 1875~1876
여인의 등 뒤에서 넘어온 빛이 책에 반사되어 여인의 얼굴을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여인의 얼굴에는 정말 많은 다양한 빛이 있습니다. 살짝 눈을 내려 깔고 책에 집중하고 있는 여인의 붉은 입술과 뺨이 오랫동안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여인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책장을 넘길 것 같은 생동감이 있습니다. 인상파 그림에서 체온이 느껴지는 것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The Ball at the Moulin de la Galette, 1876
19세기 후반까지 몽마르트의 언덕이 많은 지역은 아직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일요일 오후, 젊은 선남선녀들이 맑은 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신나는 판을 벌렸습니다. 술과 춤이 어우러졌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섞였고 사람과 배경이 섞였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가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건너오고 잇습니다. 햇빛은 나뭇잎에 부서져서 그늘에 앉은 사람들의 옷에 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르누아르는 1년 반 동안 수많은 스케치와 습작을 했습니다. 120호나 되는 크기의 캔버스를 들고 언덕을 매일 올라 이 장면을 그렸다고 하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정한 의미의 노작(勞作)입니다. 3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이 작품을 구입한 사람은 화가이자 인상파의 후원자였던 카유보트였습니다.
이렌 카엥 당베르 양의 초상화 Portrait de Madmoiselle Irene Cahen D'Anvers, 1880
가볍게 무릎 위에 포갠 손과 살짝 기울어진 머리 그리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자세와 깊은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사랑과 고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붉은 머리는 배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그래서 소녀의 얼굴은 더욱 밝아 보입니다. 8살 된 이 소녀는 르누아르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던 은행가 루이 카엥 당베르의 딸입니다. 당베르의 집에서 그린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을 저는 한동안 10대 여인으로 보았습니다. 지금도 8세 된 아이의 분위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르누아르의 섬세한 묘사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요.
선상에서의 점심 파티 The Boating Party Lunch, 1881
르누아르의 작품 중에서 가장 행복한 그림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일견 그렇게 보입니다. 왼쪽 모자를 쓴 남자가 있는 곳에서 들어온 빛은 식탁의 흰 천에 부딪혀서 배 안의 사람들의 얼굴도 환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작품 속의 인물들의 시선을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왼쪽 모자를 쓴 남자는 화면의 오른쪽 구석을 보고 있습니다. 난간에 턱을 괸 채 몸을 기대고 있는 여인은 오른쪽 웨이터를 바라보고 있지만 웨이터는 의자에 앉은 여인의 밑을 보고 있습니다. 여인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르누아르의 후원자였던 카유보트이고, 그 옆의 여인은 역시 르누아르의 모델이었던 앙젤입니다. 의자에 앉은 앙젤은 모자를 쓴 카유보트를 보고 있지만 카유보트의 시선은 배의 바깥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작품 속 인물들의 시선은 빗나가고 있습니다. 행복한 건가요, 외로운 건가요?
맨 앞의 강아지와 놀고 있는 왼쪽 여인은 나중에 르누아르와 결혼하는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라는 모델입니다. 르누아르와는 21세 차이가 났지만 아들 셋을 낳습니다. 그중 두 아들이 나중에 각각 영화 제작자와 연극배우가 되는데 작품을 그릴 당시 이미 둘은 사실상 결혼 상태였습니다. 르누아르는 그의 후원자 중의 한 명인 뒤랑 뤼엘이 이 작품을 구입하자 그 돈으로 이탈리아와 알제리, 스페인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여행의 결과, 그는 또 다른 변화 욕구에 몸을 얹게 됩니다.
우산들 Umbrellas, c.1883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입니다. 우산과 사람이 얽히고 손과 손이 얽혀서 무계획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우산들의 위치를 보면 상당히 주의 깊게 구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두 번에 걸쳐 그린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아이와 여인은 굵은 붓을 사용해서 인상파 기법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왼쪽 여인의 모습은 섬세한 붓을 사용했습니다. 소위 고전주의적인 기법이죠. 나중에 X–ray로 투시한 결과 처음에는 왼쪽 여인도 오른쪽 여인과 같은 스타일로 그려졌지만 나중에 새로 고쳐 넣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르누아르의 화풍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죠.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before – after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그는 라파엘로와 티치아니의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상파 화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 후 몇 년간 그의 작품에는 고전주의 기법이 등장하면서 소위 르누아르의 ‘앵그르 시대(Ingres period)’가 열립니다. 물론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그의 다른 시대 작품에 비해서 평가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 중에서 그만큼 끝없이 화풍에 대한 변화를 꾀한 작가도 없습니다.
시골에서의 춤 Dance in the Country, 180x90cm, 1883
몸치인 저는 춤을 잘 추는 모습을 보면 부럽습니다. 방금 식사가 끝났는지 테이블 위에는 아직 식기가 남아 있습니다. 흥이 나면 때가 문제이겠습니까? 잔 꽃무늬가 들어간 옷으로 한껏 멋을 낸 여인의 표정이 행복합니다. 남자의 표정도 지긋합니다. 언제고 춤을 좀 배워서 저렇게 근사한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도시에서의 춤 Dance in the City, 180x90cm, 1883
앞의 <시골에서의 춤>과 연작인 작품입니다. 구성은 거의 유사하지만 깨끗하고 세련된 것이 금방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따뜻한 맛은 덜합니다. 격식과 예의가 사람 사는 기준이 되지만, 그 기준은 모든 사람이 다 공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차갑게 되는 것이죠. 앞의 두 작품은 1860년대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보였던 선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선은 고전주의 기법에서 가져온 것이죠.
부지발에서의 춤 Dance at Bougival, 182x98cm, 1882~1883
부지발은 인상파들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19세기 후반 최신 유행의 교외 주택지였는데 그곳의 하늘과 물 그리고 햇빛이 인상파 화가들을 사로잡았던 곳이죠. 그림 속의 여인은 르누아르의 모델이기도 했던 그 유명한 쉬잔 발라동입니다. ‘슬픈 그림은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았던 유일한 화가’라는 말을 들은 르누아르의 작품 속 주인공이지만 묘하게도 이 여인의 입을 보고 있으면 행복한 표정이 아닙니다. 혹자는 르누아르가 거친 성격의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글쎄요…, 과연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에서 르누아르는 작곡가 바그너를 만났던 모양입니다. 35분 만에 뚝딱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하는데 르누아르답습니다. 건조했던 그의 ‘앵그르 시대’는 1890년경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의 기념비적인 빛나는 누드화와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 숲이 우거진 풍경화 등이 그의 말년을 장식합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의 전성기였던 1870년대 작품들과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테라스에 앉은 두 자매 Two Sisters on the Terrace, 100.5x85cm, 1881
두 자매가 앉아 있는 테라스는 앞서 본 <선상에서의 점심 파티>와 같은 곳인 푸르네즈 식당입니다. 때는 봄, 앉아 있는 소녀들 뒤의 풍경은 꽃과 초록으로 가득합니다. 숲 사이로 센 강이 보입니다. 이제 피기 시작한 꽃은 소녀들의 머리에도 바구니에도 가득합니다. 순한 어린이 얼굴과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젊은 청춘 그리고 봄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요.
목욕하는 여인 Bather, 1887
‘루벤스와 와토로 이어지는 전통의 마지막 대표주자’라고 르누아르를 말하는 것은 그의 빛나는 여인의 묘사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감정의 풍부한 표출을 그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림 속 벗은 몸의 여인은 맑고 순박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관능적이어서 그림에 손을 대면 체온이 옮겨 올 듯합니다.
50세가 넘어서면서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에 걸립니다. 의사들의 권유를 받고 더 따뜻한 지역을 찾아 지중해에 인접한 카녜스 쉬르 메르(Cagnes-sur-Mer)로 이사를 하지만 병세가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 20년 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른쪽 어깨에 관절 경직이 오자 손에 붓을 묶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평생 6,000점이 되는 작품을 그린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피아노 앞의 소녀들 Girls at the Piano, 116x90cm, 1892
피아노 앞에 앉은 두 소녀의 선이 참 곱습니다. 당시 중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피아노 연주는 매우 고급스럽고 인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소녀들의 표정과 부드러운 선의 흐름 그리고 빛나는 색상은 르누아르 작품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보았던 그림입니다. 그동안 저는 나이를 먹었지만 그림 속 소녀들은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혹시 앉은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들리시는지요?
1919년 여름 르누아르는 루브르 박물관을 찾습니다. 그의 작품이 대가들의 작품 사이에 걸리게 된 것을 보러 간 것이죠. 쉬는 날이면 루브르를 찾았던 꼬마가 80이 다 된 나이에 자신의 작품을 그곳에 걸게 된 것입니다. 그해 12월 르누아르는 고환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고환을 먹으면 살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르누아르에게 자신의 고환을 먹으라고 합니다. 물론 르누아르는 거절했지요. 자신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먹는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그냥 웃음이 납니다.
르누아르 말년의 작품들은 크게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크고 모호한 누드화들이 황금빛 색으로 남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은 너무 강렬했습니다. “만일 여인의 가슴과 엉덩이가 없었다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한 말씀은 아직도 유효한가요, 르누아르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