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오죽헌 처가에 가는 이원수
강원 강릉은 태백산맥 너머 동해에 접해 있지만 논밭이 드넓고 기름진 데다 기후가 따뜻해서 예부터 천석꾼 부자가 수두룩했다.
평산 신 씨 신 명화는 강릉 토호로 노비를 무려 170여 명이나 거느린 거부였다.
드넓은 집 안에 검은 대나무를 담 밑에 심어 사람들은그 집을 오죽헌(烏竹軒)이라 불렀다.
그에겐 슬하에 딸이 다섯 있었다.
둘째 딸 신 인선은 다섯 살에 글을 깨치고 일곱 살에 시작한 그림은 열 살이 되자 화가 반열에 올랐다.
신 인선이 혼기가 찼을 때 아버지 신 명화는 한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시집살이를 하게 되면 딸의 재능이 빛을 잃고 사그라져 버릴까 고심하게 된 것이다.
신 명화는 결국 경기 파주의 덕수 이씨네의 이 원수, 자신의 집안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집안의 아들인데다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만만한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였다.
당시 사회 풍조(風潮)가 신랑(新郞)이 신부집으로 장가와 처가 살이하는게 보편적이었다.
신 인선은 만석꾼 부잣집 친정에서 신랑 눈치보지 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신 인선은 스스로 호를 ‘사임당(師任堂)’이라 지었다.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사표(師表)로 삼겠다는 뜻이다.
어느 날 이 원수는 파주 본가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골똘히 부인 생각을 하다가 책을 덮고 단봇짐을 챙겨 강릉으로 향했다. 처가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그가 어느 주막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갈 때 주모가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개다리 소반에 술상을 차려 와 종일 걸어 잠이 쏟아지는 이 원수에게 술을 권하고 연방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희멀건 허벅지를 드러냈다.
이 원수는 과거를 보러 가다가도 풍악이 울리면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한량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처가에 가는지라 신부에게 온 힘을 쏟아야할 판인데 모아둔 힘을 주모에게 쏟아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는 이를 악물고 주모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 원수는 강릉 오죽헌 처가에서 달포를 머물다가 다시 파주로 가는 길에 지난번 남자답지 못한 짓이 마음에 걸려 그 주막에 들렀다.
그렇게 자신을 유혹하던 주모가 쌍심지를 켜고 삿대질을 하며 이 원수를 내 쫓았다.
지난번엔 주모가 전날 밤 꿈에 황룡이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잉태하면 큰 인물이 태어날 터였다.
장돌뱅이만 오가는 주막집에 갓을 쓴 이 원수가 들어오자 바짝 매달렸는데 한사코 뿌리쳐 절호의 기회를 놓쳐 이를 갈았다.
꿈 약발이 다 떨어진 이제야 찾아오니 천하의 밉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야사에 따르면 이 원수가 지난번 강릉으로 내려갈 때 그 귀한 씨를 그렇게 매달리는 주모한테 뿌리지 않고 고이 간직해 부인에게서 낳은 셋째 아들이 이 율곡이다.
아홉 번 과거를 봐 아홉 번 모두 장원으로 합격해 구도 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천하의 큰 인물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현모양처의 표상(表象)으로 알려졌지만 솔직히 말해 현모(賢母)임에는 틀림없지만 양처(良妻)라 할 수는 없다.
남편 이 원수는 여러모로 부인에게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과거는 봤다 하면 낙방이고, 파주에서 머나먼 길을 걸어 강릉 처가에 가면 밤에 부인을 안는 것 말고는 그림 그리는 부인 곁에 쪼그려 앉아서 먹을 가는 일이 전부였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19세에 이 원수를 남편으로 맞았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3년상을 치르고 신사임당은 정든고향 강릉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대관령을 넘어갈 때 그 유명한 사모곡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 탄생했다.
‘늙으신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이 원수는 과거에 계속 낙방하자 우의정으로 있는 당숙 이기를 찾아갔다.
이기가 윤 원형과 결탁, 을사사화를 일으킨 간신임을 간파한 신사임당이 간곡히 만류하자 결국 받아들여 훗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 원수는 천박한 주모권 씨와 바람을 피웠다.
사임당 어머니 기일에도 권 씨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찾아 나선 사임당에게 똑바로 걸리기도 했다.
신사임당은 죽을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고 유서를 썼다.
남편에게 4남 3녀를 낳아 줬으니 재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 원수는 부인한테 한평생 눌려 살던 걸 한풀이라도 하듯 신사임당이 죽자 주모권 씨를 데려와 안방에 앉혔다.
일곱 자녀가 아무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셋째 이 율곡(李栗谷)은 삭발을 하고 아버지도 모르게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깐의 승려생활이지만 이것은 훗날 억불숭유(抑佛崇儒)를 국가(國家) 기조로 삼았던 조선에서 두고두고 정적(政敵)의 시빗거리가 됐다.
= 옮겨온 글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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