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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대한제국이 탄생한 1895년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이해된다. 당시에는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지칭되는 가혹한 수탈로 인해, 점차로 세차게 타오르던 동학의 불길이 혁명으로 치닫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배계층의 시각으로 보자면, 동학혁명은 그저 민중들에 의한 ‘반란’으로 치부되었을 따름이다. 당시 관료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독립협회의 회원이었던 저자 정교의 시선에서도 동학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독립협회에 대한 기대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대한계년사>의 제4권은 1898년 11월과 12월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당시에 활발했던 독립협회의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만민공동회의 설치에서부터 혁파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대체로 당시의 관보와 신문 기사 등을 인용하고 있기에, 자료로서의 특별한 가치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는 편찬자인 정교의 역사 자료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독립협회의 당시 활동 상황이나 참여했던 이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라 하겠다.
이 책을 자세히 읽다 보면, 정교는 대한제국의 황제로서의 고종과 개인으로서의 고종을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당시의 상황에서 우유부단한 고종의 모습을 자주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 태도에서 개인으로서의 고종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당시 민중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을 단지 계몽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지식인으로서의 우월의식이 그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해석되는 면모라 하겠다.
당시 한반도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던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서술도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자신이 러시아에 의해 피살될 위험을 겪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강도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만민공동회의 지속적인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그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처럼 비록 개인의 기록이지만, 다양한 사료들을 통해서 당시의 정세와 사건들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잇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 성리학적 인식을 토대로 한 지식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강조하는 점은 매우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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