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1. 승자와 패자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①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고 있다. 사회 위계질서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소수자로 밀려나는 일’, ‘고향에서 이방인 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②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노동계급의 분노, 일자리는 저임노동자들의 나라로 아웃소싱 되거나 로봇에게 넘겨져 새 경제질서에서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은 끝났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꾸준히 낮아진 것은 주류 정당들과 집권 엘리트가 정책을 그렇게 폈기 때문이다.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①기술 관료적 정치, 시장경제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 기본적 도구라 여기며 시장을 신뢰한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면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탄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뛰어나다고 치켜세우면서 보호주의, 종족주의 갈등 등이 갖는 협소하고 파편적인 정체성과 비교했다. 시장 친화적이고 기술 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이런 정책들의 혜택은 대부분 최상위층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런 불평등 심화와 금권정치에 대해 별 내색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경제 권력을 민주적으로 제어한다는 원래의 사명에서 벗어난 진보 진영은 그 매력을 상실해 버렸다.
빈부 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성공과 실패의 관점), 노동계급 및 중산층 유권자들이 엘리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게 된 계기는 뭘까? 그것은 사회적 인식 및 존중감의 조건과 관계가 있다.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에게 돌아갔고 하위 50%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1%가 하위 50%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다. 이처럼 최근 수십 년 동안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 시킨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능력주의 윤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민자들이나 아웃소싱에 대한 반항 차원을 넘어 포퓰리즘의 불만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향한다. 능력주의는 성공과 실패를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굴욕의 정치,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트럼프는 굴욕의 정치에 아주 능란했다.
기술 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노동자 대부분은 그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