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과불식(碩果不食)(장경식)
큰 과실은 다 먹지 않고 남긴다는 뜻으로,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자손에게 복을 끼쳐 줌을 이르는 말이다.
碩 : 클 석(石/9) /果 : 열매 과(木/4) /不 : 아닐 불(一/3) / 食 : 밥 식(食/9)
이 말은 주역(周易)에 등장하는 말이다. 주역이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의 역(易)이란 말이며 역(易)이란 말은 변역(變易), 즉 ‘바뀐다, 변한다’는 뜻이며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고 풀이한 것이다.
해석을 보니 ‘씨 과일은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마지막 씨앗은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굶주린다고 씨앗까지 먹어버리면 내일을, 새 봄을 기약할 수 없다. 석과(碩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희망의 씨앗이라는 뜻이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주역의 23번째 괘(卦)인 산지박괘(山地剝卦)에 나오는 말로서 효사(爻辭)의 설명을 보면 ‘큰 실과를 먹지 아니하니(碩果不食), 군자는 수레를 얻고(君子得輿), 소인은 집을 깎는다(小人剝慮)’고 하였다.
소인은 비록 선한 마음으로 집을 깎아 없앴지만, 군자는 오히려 수레를 얻어 집이 없어진 소인을 구제해 준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늘은 전부 다 죽이는 이치가 없다(天無盡殺之理)는 뜻으로 풀이된다.
씨를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고, 세상에 인정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고, 아무리 난리가 나서 세상이 뒤집혀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어 씨가 전해지는 것이다. 즉,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한 것이다.
산지박괘(山地剝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나오는 사자성어이다.
上九 碩果不食.
상구 석과불식.
상구는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君子得輿 小人剝廬,
군자득려 소인박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象曰 君子得无 民所載也
상왈 군자득무 민소재야
군자는 얻는 것이 없으나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소인박려 종불가용야.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주역에 관하여 시중에 여러 해설서들이 나돌고 있으나 거의 모두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고 써 놓았는데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가 올바른 해석이다.
먹지 않는다는 것은 그 과일이 싫어서 또는 배가 불러서 먹지 않는다는 것이고,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귀중한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형이상적인 표현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큰 능력자를 능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근세의 이름난 주역 연구가 고형(高亨)은 “이로운 재화가 눈앞에 있어도 취하지 말라고 깨우친 것이다(喩 貨利在前而不取)”라고 주석하였다. 취하여 먹으려 해도 먹혀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산지박괘(山地剝卦)는 주역 64괘중 사대난괘(四大難卦)중의 하나로 박(剝)은 빼앗긴다, 박탈당한다는 의미다.
괘상(卦象)을 살펴보면, 아래로 다섯 효(爻)가 모두 음(陰)이고, 위로 단 한 효(爻)가 양(陽)이다. 그래서 큰 과실의 형상으로 다른 음(陰)이 먹으려 해도 먹힐수 없는 존재이다.
소인이 군자의 존재를 집어 삼키려 해도 먹히지 않는 존재를 형상화한 괘상(卦象)이다. 이치적으로 구월(九月)에 해당하는 괘(卦)임으로 가을철인 구월에 큰 열매가 열리는 시기이다.
석과(碩果)라는 어휘를 역사적으로 사용한 내력을 살펴보면 거대하게 쌓아서 이룬 공적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적있는 인물을 소인배들이 감히 능가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여왔다.
근세에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毛澤東)이 그 동지들과 감행한 대장정의 결과를 비유하여 전기작가(傳記作家) 서지(徐遲)는 정강산기(井岡山記)에서 “모택동 동지의 사상은 이미 싹이 트고 잎이 피어 우거젔으며, 꽃이 피워서 크나큰 열매(碩果)를 맺었고, 나무는 다 자라서 대수(大樹)를 이루었다”고 피력하였다.
야산(也山) 이달선사(李達禪師)는 제자인 대산(大山)의 호송시(號頌詩)에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하였는데. 과연 대산 김석진 옹은 우리 역사 이래 최초로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을 알기 쉽도록 순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함으로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느 누가 그 존재를 능가하려 해도 능가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연 야산 선사(也山禪師)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호송시(號頌詩)를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수상록(隨想錄)이라는 찬사를 받는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정년퇴임 강의를 하면서 후학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다.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인생의 황금기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그 절망적 상황에서 오히려 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관조하는 사색의 글로 감동을 주었다.
출소 후 성공회대 교수가 된 이후에는 논어(論語) 등 동양 고전을 해박한 지식과 알기 쉬운 현대적 설명으로 풀어가는 명강의로 유명했다.
주역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신 교수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앙상하게 뼈대가 드러난 나무의 가지 끝에서 빛나는 가장 크고 탐스러운 씨 과실은 한 개에 불과하더라도 희망이다. 그 속에 박혀있는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 교수는 이 말을 희망의 언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욕심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나눠 준다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과일을 딸 때 모두 다 따지 않았다. 몇 알은 반드시 남겨 소위 까치밥이라 해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벼도 마지막 끝 부분은 베지 않고 남겨 두어 가난한 이들의 식량이 되게 했다.
---
이익을 독점하는 데서 분쟁이 생긴다.
이익을 독점하는 데서 전쟁이 생긴다. 우리 사는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것은 이익을 남과 더불어 나누려 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경제구조로는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기대하기 어렵다. 일인백보(一人百步)보다 백인일보(百人一步)가 더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치열한 경쟁에 내 몰려 있다. 성과급이란 말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같은 직장 같은 급수의 동료라도 능력에 따라 성과급이 다르다.
달리기 하다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함께 달려와 입상하지 못한 학생을 장한 학생이라고 칭찬하던 시대는 지났다.
한 발작이라도 남보다 더 앞서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의든 타의든 때로 남을 밀치게 되고 쓰러져도 그를 일으켜 세우기보다 딛고 넘어서야 하는 시대가 됐다. 한마디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다.
맹자(孟子)가 가장 경계한 것이 저 마다 이(利)를 다투어 싸우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맹자가 가장 혐오한 이익 중심의 경쟁사회가 됐다.
이순신(李純信)이 만약 지금 태어났다면 백의종군(白衣從軍)이 가능했겠는가? 예(禮)와 충(忠)과 의리(義理)를 목숨같이 숭상하던 시대에도 갖은 수모를 다 당했거늘 아마 지금 태어났다면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왕따를 당해 싹이 커 보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는 양보의 사람이었다. 이 시대의 병을 치유하는 길은 까치밥을 남기던 선인들의 인정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큰 과일을 욕심내어 남이 먹을 새라 다 먹어치워 버리면 정말 어려운 이는 굶게 된다.
이 나라가 가난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다니 기막힌 일이다. 또 나와서야 되겠는가?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베푸는 손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