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말만 듣는 ‘답정너’(문병하)
어느 부대에서 소대장이 신병에게 국기 게양대의 높이를 재라고 했습니다. 신병이 줄자를 가지고 국기 게양대 위로 올라가려고 끙끙거렸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병장이 궁금해 물었습니다. “야! 위험하게 거기는 왜 올라가냐?” 이등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네. 소대장님이 게양대 높이를 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병장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야! 힘들게 왜 올라가! 게양대 밑에 너트를 풀어서 눕혀놓고 길이를 재면 되잖아?” 그러자 이등병은 인상 쓰면서 대답했습니다. “소대장님이 원하는 건 높이지 길이가 아니지 말입니다.”
자신의 머리에 이미 답을 정해두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듣기는 듣되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로 ‘답정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답정너는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결론을 남들이 똑같이 말해주기를 바라는, 그래서 내가 옳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확증편향의 답정너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증편향은 인류가 생존하면서 터득한 심리적 도구였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결론 없이 움직인 사람보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승자로 살아남았기에 그것이 심리적인 안정성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칵테일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시끄러운 주변 소음이 있는 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자와 하는 이야기를 선택적으로 집중해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우리의 뇌는 확증편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낼 때 어떤 것이 맞는 말인지 맞지 않는 말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울 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답정너 경향은 더 심화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모두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답이 아예 없거나 여러 개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통해서 선택의 폭을 넓히고 바른 정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답정너를 강요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입니다.
종교는 본래 자신들이 믿는 것이 진리라는 확증편향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인이라는 자기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해방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교권화된 기독교는 이렇게 자유로워진 인간을 다시 교리의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고 하면서 진리를 교리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원수의 정의를 교리화함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이것은 닫힌 사회로의 회귀이며 반진리의 행태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답정너에 기반을 둡니다.
그러나 진리는 늘 시대와 소통합니다. 과거에는 옳다고 믿었던 것이 오늘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살아 있어 시대와 소통하며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줍니다. 답정너를 강요한 교권주의적 교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열어두신 것을 사람이 닫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더는 그곳에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병하 목사(양주덕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