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의 자는 호원 스스로 묵암이라 호했다 파주 우계에서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우계선생이라고 하였다.
성씨는 본래 창녕에서 났다 시조 인보는 고려때 벼슬이 중윤이었고 할아버지 세순은 지중추부사로 시호가 사숙이었다 아버지 수침은 은거해서 도를 강론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청송 선생이라 하였는데 부인은 파평윤씨 였다 가정을미에 성혼을 낳았다. 성혼은 나이 열 일곱에 사마 양시 에 합격하였다 으나 병으로 복시에 나가지 못하여 마침내 과거를 포기하고 자기 수양에 전심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스물에 이르러 학문이 성취되고 덕행이 높아졌다
아버지가 병이 위중하였을 때 그는 두번이나 넓적 다리를 베어 약에 섞어서 드렸고 돌아가자 3년 동안 여묘를 살았다
선조 초에 학문과 덕행이 뛰어남으로써 두번이나 참봉에 임명되고 6품에 올랐으나 다 취임하지 않았다 적성의 현감에 임명되자 은혜를 사례하고 곧 돌아와 버렸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이 모여 들어 성혼은 그들을 부지런히 가르쳐 주었고 서실의 의례를 지어 학생들에게 보여서 실행하게 하였다.
장원 사지에 임며오디고 지평으로 10여번 장령으로 두번이나 부름을 받고 심지어는 말이나 가마를 타고 오라고까지 명했으나 그는 굳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임금이 일찌기 율곡을 보고
"성혼이 어질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의 재주는 어떠하오?"
하니 율곡이 대답하였다.
"모두들 그에게 경제를 맡길 만하다고 하는데 신은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병이 많아서 책임을 감당할 수없을 것이니 한가한 직무에 두어 경연에 모시게 하면 반드시 성덕에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신사 년에 선조가 종묘서령에 임명하고 부르는 뜻이 간곡하여 성혼은 병을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왔다 임금은 의원을 보내 병을 보게 하고 약을 하사하였다
선조가 그를 불러들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물었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은 무상한 것이니 그것은 임금의 마음 하나에 다렸읍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정승을 얻어서 널리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벼슬 자리에 쓰게 한 다음에야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고 성혼은 대답하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방금 조정의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는 몸을 담아 지위 보전이나 하는 신하가 많고 임금을 이끌어 도리를 주장하는 인사가 적습니다 이것이 가장 근심되는 일입니다."
성혼은 자기가 아뢴 뜻을 다시 글로 써서 올렸는데 상소가 오랫동안 유중 하므로 정원 에서 내용을 발표해 줍시사고 청했다. 선조는
"그상소 가운데는 학문을 논한 것이 있어 내가 마땅히 반성해 살펴 보아야 하겠지만은 나라의 제도를 죄다 개혁하자고 한 것은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오."
하였다.
성혼이 서울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지 않으니 선조가 듣고 따로 쌀과 콩을 하사하였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다 임금이 말했다.
"부면 받는 것이 옛날부터의 도리가 아니오?"
성혼은 받은 쌀과 콩을 다 친척과 이웃에 나누어 주었다 대신이 선조에게 아뢰어 품계를 올려서 경연 참찬관을 겸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한가한 직위로 입시하라고 명했으나 그는 여러번 글을 올려 사퇴하고 성밖으로 나가 명령을 기다렸다 왕이 불러들여 굳이 만류하였으나 그는 더욱 간절히 물러가기를 언했으므로 선조는 비로소 허락하고 돌아가 있으라고 하였다 뒤에 다시 사헌부집의와 여러 시의 우두머리에 임명했으나 성혼은 다 취임하지 않았다.
계미년 봄에 특별히 병조참지에 임명하고 여러번 불러서 서울로 올라왔다 왕은 그를 이조참의로 옮기고 은대를 하사했다.성혼이 잇달아 세번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므로 선조도 마침내 허락하고 경연에나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율곡이 조정에 들어와 중외의 촉망이 대단하고 왕의 돌봄과 아낌이 지극 하므로 소인의 무리가 조그마한일을 들추어내서 그를 탄핵했다 성혼이 글을 올려 그들의 말이 거짓임을 밝혔다 소인의 무리들은 더욱 성이 나서 마침내 성혼도 아울러 탄핵하였다 그는 그날로 파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유생들이 연이어 들고 일어나 상소하여 그옳고 그름을 아뢰었다 임금은
"진실로 군자라면 그 당파가 있음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이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
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인의 무리를 모조리 몰아냈다 선조는 또 성혼을 이조참의에 임명하여 불렀다 그는 여러번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부임했다 다시 이조참판에 승진되었는데 그는 다섯 번이나 사직을 원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안되어 율곡이 죽었다 성혼은 더욱 세상 일에 뜻이 없어 잇달아 글을 올려서 걸해 했으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고,
"어진 재상을 잃어 나는 잠도 편안히 자지 못하오 경 이외에 누구와 더불어 함께 나라 일을 다스린단 말이오?" 하였다.
몇달이 지난뒤에 분황하러 돌아가기를 청했다.
임금은 본도에 명하여 수령에게 존문하게 하고 음식을 하사하였다.
기출년에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자 간절히 사퇴를 요청했는데 때마침 정 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선조는,
"나라에 큰 변이있으니 경이 물러가선 안 되오."
하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갔으나 시행이 서로 유언비어를 부채질하고 있어 재변이 일어날 기미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해직되어 돌아가게 되었다 태학생들이 상소하여 그를 유임시키기를 청했으나 선조는 아무런 하답이 없었고 이로부터 다시는 벼슬로 부르는 명령이 내리지 않았다.
신묘에 사화가 조작되어 성혼은 벼슬을 빼았겼다 귀양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는 사람이라 소인의 무리는 그를 해칠 마음을 먹고 기어코 한데 얽어 넣으려고 하였다.
이듬해 왜구가 깊이 쳐들어 와 선조가 서행하려고 하므로 성 혼은 나아가 국난을 극복하고자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본래 전야에서 일어나, 이제 당파사람으로 지목받아 밤낮으로 죄를 짓고 있으니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어도 감히 스스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상감께서 서행하시거든 지나시는 길에 나가 울면서 맞자 그리하여 혹시 물으심을 받는다면 마땅히 어가를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 구렁에 빠져 죽을 뿐이다.'
선조는 갑자기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성혼의 집에서 관도까지 20리인데 풍편에 들으니 어가가이미 임진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는 창황히 뒤따라 가려고 하였으나 강나루가 막히고 혼란해진 군사가 길을 메웠으므로 마침내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통곡하면서 산 중으로 피난해 들어갔다.
광해군이 세자로서 이천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혼을 불렀다. 그는 병이 깊어 갈 수가 없었으므로 글을 올려 16가지 조목을 아뢰었다 광해군은 아쉬워서 그를 검찰사에 임명히여 다시 불렀다 성혼은 병을 무릅쓰고 부름에 응해 행재에서 상감을 뵙고 장수의 선임 군사의 훈련 양식의 수집에 관한 세가지 계책을 아뢰었다. 그는 이어
"외환을 천운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제왕은 변고를 만나면 조서를 내려서 자기를 죄주고 존호를 낮추고 혹은 나라를 그르친 신하는 죄주어 전국에사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큰 뜻을 발하여 깊이 자책해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근신이 대궐 안에 드나들어 정치에 관여하는 길을 막으시고 정직한 인사를 써서 이목을 삼으시면 인심이 즐겨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의 도둑을 능히 토멸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의 상소를 본 사람은 재화의 싹이 과연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글을 전하러 온 천조의 찬획 원 황이 학문을 논했는데 그는 오로지 정주학을 배척하여 모두 그를 상대하기가 어려워 여러 사람이 성혼에게 글로 대답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성혼의 글은 말이 공손하고 이치가 바르므로 원 황이 다시는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성혼은 참찬 도헌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퇴하고 산반에 나아갔다.
적이 선릉과 정릉 두 능을 파 헤쳐서 성 혼은 명을 받들어 능을 봉심 했는데 변을 잘 처리하고 해주 행궁으로 돌아와 복명하였다.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고 성혼은 그대로 머물러 중전을 호종하고 있었는데 호서에서 이산겸의 변이 일어나 서울로 올라왔다.
전에 선조가 서행할 때 임진강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여기서 얼마나 되느냐?"
하고 물었다. 이 홍로 라는 자가 강 기슭 가까이 있는 어느 조그만 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바로 그의 집이올시다."
하고 거짓 아뢰었다 선조는
"그러면 왜 와서 나를 보지 않느냐?"
하고 되물었다 홍로가 대답하였다.
"이러한 떄를 당해 그가 어찌 와 뵙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성혼이 분조에서 처음으로 용만으로 가니 홍로가 또 선조에게 아뢰었다.
"성혼이 여기 왔는데 세자의 내선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성혼은 미처 선조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고 대죄하였다 임금은 하교하여 준엄하게 난초의 일을 추궁하였다 성혼은 황공하여 감히 변명을 못했다.
그후 참찬겸 비국제조가 되었다. 이무렵 명나라에서는 총독 고 양겸이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전관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글을 보내 왜의 화의를 잠시 들어 주고자 하니 우리 나라가 먼저 화의하고 싶다는 뜻을 명나라에 아뢰어 달라고 하였다.
이말을 듣고 모두 화의를 반대하였는데 호남을 순찰한 이 정암만이 잠시 화의를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당시는 재상 유성룡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도 역시 정암의 의견을 옳다고 하였다. 유성룡은 성혼과 약속하고 함께 입대하였다. 선조가 물었다.
"고 양겸의 말을 좇아야 하겠소 좇지 말아야 하겠소?"
성혼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싸우고 지킬 능력이 없고 권한은 고양겸의 수중에 들어 있습니다. 굳이 그의 말을 어기는 것은 좋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성혼은 말을 이어
"이 정암은 충의와 절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 말의 뜻이 나라를 근심하는데 있을 것이니 중한 죄를 내리시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고 하였다 선조가 크게 노하여 유 성룡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나왔다.
삼사에서 번갈아가며 글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였는데 그것은 성 혼을 의중에 두고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성혼은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돌아갔다.
무술년에 여름에 병이 위독하게 되자 그는 아들 문준에게 말하였다.
"나는 상감계 득죄하여 아직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뢰지 못해 죽어도 눈이 감기지 않겠다. 그러니 내가 죽거든 흰 옷을 입히고 종이로 염을 하고 띠를 엮어 관을 덮어서 소수레로 귀장하면 족하다."
6월 6일 파산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64살 이었다. 성혼이 죽은뒤 소인의 무리들은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그의 벼슬을 추탈하였는데 인조가 즉위하자 곧 벼슬을 회복시켜 좌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간이라고 하였다.
성혼은 젊을 때 율곡과 친히 사귀었다. 일찌기 사단칠정 이기선후의 설을 논란하여 서로 수천만 말이 오고 갔는데 전의 선비 들이 아직 몰랐던 것을 밝힌점이 많았다.
율곡은 항상 말하기를
"만약 이론의 주밀함을 말한다면 내가 그보다 약간 나을 것이지만 품행이 돈독하고 견고하기는 내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