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6월항쟁’.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거(居)’할 때다.
임시직들은 취재 권리가 없었지만 외근에서 돌아오는 취재기자들의 몸에서 쏟아지는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아픈 시국을 체득하는 중이었다.
바깥 출타 기회는 딱 한 가지 루트. - 명망가들의 원고를 받아오는 경우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회사 승용차를 대동한 채 원고를 받으러 가면 저명 인사 필자들이 모두 비정규직 기자가 올 때까지 꺼박 기다려주곤 했다.
밤꽃 피는 유월 어느 오후였던가.
某교수의 글을 받으러 연세대 캠퍼스에 출타 중인데.
교문을 사이에 두고 연세대생과 전경들의 투석전이 한창이었다. 담벼락 사이로 쟁쟁 쏟아지는 유월의 땡볕 그리고 최루탄 냄새가 라일락 향기를 보자기 덮듯 확 엎어버린 자욱한 교정이었다. 최루탄 가스를 피하는 사내들을 부축하는 여학생들의 눈빛이 호수처럼 출렁여서 그 와중에도 젊은 청춘들은 눈물겹게 아름다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시위대 반대편 저지선 대열 뒤쪽에서 머리 깨진 채 쓰러져 있는 전경들의 모습이 문득 짠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가슴이 아팠던 그 시국을 혼신으로 끌어안고 싶었던 그 시대의 기억들이다.
윤중호와 동거하던 흑석동 시절이었고.
먼저 그 ‘전투경찰 복장을 배경으로 한 옛 출판쟁이 조성일이다.
윤중호와 조성일.
그들은 유신의 절정인 1979년 부마항쟁 시위진압을 맡은 이차구차 기동타격대 소속이었다. 쫄따구를 거쳐 서로 옆 숙소의 내무반장의 직책을 가지게 되었으니 전투경찰 생활도 이제 어지간히 이력이 붙을 즈음이다.
일단 가투에 붙으면 시위대만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 경찰 또한 고단하고 예민한 상태라고 했다. 시위대 쪽에선 방패를 앞세우고 최루탄이나 쏘아대는 전경들이 바퀴벌레 군단처럼 무표정하게 보이겠지만 정작 전경들의 입장도 녹록치 않다. 어두운 시가지에서, 아무도 편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불안한 출정식에 나서야 하는 그들 역시 방어의 두려움에 싸이는 것이다. 특히 밤의 출행은 더 리얼하다. 행여 빌딩 꼭대기에서 화분이나 의자가 날아올 수도 있으니, 공포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더욱 독기가 오른다. 탁배기 한 사발로 고단한 몸 방치하고 싶은 저물녁 휴식의 찰나에 ‘비상 싸이렌’ 소리로 순식간에 5분대기조 출동이라니 목표 없는 위급함이다. 게다가 고참들은 쫄따구들에게 시위대를 제대로 막지 못한다고 닥달하니 이래저래 불안증세 폭발 일촉즉발의 상황이 수시로 연출된다.
그 혼돈의 어느 날.
조성일 내무반장이 쫄따구 전경들을 내무반에 집합시키는 것이다. 옆 내무반 동료 윤중호 수경은 ‘혹시 이 친구도 또 시위대 진압을 핑계로 쫄따구들의 군기를 잡으려나’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조성일 왈.
“시위대들을 너무 괴롭히지 말자. 그들도 시대의 역사 현장에 동참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고 또 우리들 역시 동시대의 대학물을 먹은 젊은이가 아니냐?”
그 뜻밖의 신선한 연설 이후 단박에 친구가 되었다. 윤중호가 ‘대학물’이란 먹물 단어보다는 ‘신문 줄이나 본’으로 문장을 고쳤으면 했다는 글쟁이식 후일담도 있었단다. 아무튼 그 타격대는 시위대의 지난함을 끌어안는 덕망있는 진압대가 되었더란다.
훗날 조성일은 캠퍼스까지 윤중호네 공간으로 적을 옮기더니 나이 서른 이후에도 출판사
나 기획실, 선술집과 포장마차 그리고 옆 동네 비슷한 직종으로 오랜 세월 가깝고 먼 고락을 나눴으니 그들이 소비한 맥주병이 낟가리처럼 쌓였다 한다. ‘이후 지구가 폭발해도 후회가 없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출근길 선술집마다 외상 장부 안 깔린 집이 없었다나 어쨌다나.
제대 후 조성일은 탄광 광부를 거쳐, 남녘출판사 영업부장과 책임자를 거쳐 ‘건달농부 → 고려당 → 나들목 편의점 → 커피나무’로 성업 중인데, 윤중호는 나들목 시절에 마지막 술자리를 가진 다음 세상을 떠났다.
다음 강병호 얘기는 순전히 윤중호한테 들은 삽화다.
윤중호는 강병철을 통해 소개받은 친동생 강병호와 시나브로 더 가까워졌다. 윤중호의 사무실 ‘들불 기획’과 강병호의 작업실 ‘하수와 고수’가 홍대 입구 5분 거리에 소재한 것도 이유가 되겠다. 둘 다 원고지를 채우고 붓질을 통해서 먹고 사는 프리렌서로 식솔을 거느린 사무실 좌장인데다 일단 술판이 시작되면 ‘아산이 박살나든 평택이 아작나든’ 날밤 새우는 무대책 작가 스타일들이었던 것이다.
신촌 대학로, 화려한 젊음의 싸이키 너머.
빗바랜 수은등처럼 희뿌옇게 잦아드는 생업 작가들의 뒤안길을 상상해보라. 게다가 대책없이 쌓여만 가는 술병들이 문제다. 시장통 개다리밥상으로 쏘주병이 끝도 없이 올라오던 그 징한 풍속도가 막판에 작업실까지 연장되기도 한다.
윤중호의 작업실 ‘들불 기획’에는.
날이면 날마다 들락거리는 지인들로 문턱이 너덜너덜 닳아 버렸다. 온갖 종목의 부류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더러는 원고 청탁이나 기획 카운슬링 같은 업무상 방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시도 때도 없이 ‘술 죽이는 공간’ 찾아 달려드는 각다귀 떼가 대부분이다. 윤중호가 작업하는 내내 소파에서 죽치고 있는 ‘기다림파’, 아예 밀가루 반죽으로 부침개를 대령하는 ‘순정쟁이 헌신파’, 그리고 바깥 주점에 자리잡고 느긋하게 전화로 확인하는 ‘자존적 품위파’까지 종목별로 다양하게 배치되어 기다리는 중이다. 그중 강병호는 막장에 합류한 다음 운동화끈 풀러놓고 날밤을 새우는 대책 없는 유형이었으니, 그 술도가니 속에서도 사람을 만나고 책을 펴내는 게 프로의 세계다.
지금은 불교잡지 기자이자 동화작가인 박선영은 그즈음 들불 기획을 직장으로 잡아 원고지와 씨름했었고, 만화가 강병호는 술상 찾는 노총각 부나비 떼 중의 하나였던가. 그렇게 밥상 술상 과객으로 수두룩 술청 속에 둘이 섞이기도 했는데 윤중호는 일단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어쨌든 윤중호는 술떡이 되어 막차가 끊어질 때마다 식솔의 둥지인 일산 신도시를 포기하고 강병호의 작업실에서 하룻밤 ‘유(遊)’하는 자동빵 코스로 자리잡곤 했는데, 하루는.
그날도 거의 파장까지 술판이 익었는데, 어렵쇼, 이상하다. 이쯤되면 강병호가 먼저.
“성님, 즈이 집에서 딱 한잔만 더 하고 고꾸라질튜?”
그게 순서인데 이상하다. 아직 그런 말이 안 튀어나오는 것이다. 윤중호가 갸우뚱하다가 먼저.
“오늘 니네 집에서 잔다, 잉.”
그렇게 선수를 쳤는데도 우물쭈물 시큰둥하는 내막을 알 수가 없다. 단도직입이 아닌 대략 난감 아리송이다. 어쨌든 합정동 좁은 골목 지나 주정뱅이 그림자 두개가 흔들흔들 어쩔 수없이 반지하 사무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다. 그때 돌연 강병호가 반(半)지하 현관 앞에서 소리 지른다.
“윤중호- 윤중호오-헝.”
‘중호형’도 아니고 ‘윤중호오-헝’이라고 아리송하게 부르는 것도 수상하지만, 앞에 가는 작자가 뒤를 쳐다보고 부르는 게 아니라 바로 문 앞 정면을 향해 생뚱맞게 윤중호를 부르는 사연이 궁금하다. 순간 ‘윤중호가 떴다’는 신호를 받은 현관 안쪽에서 화들짝 하더니.
‘숭구리 당당 퉁탕퉁탕’
짧은 정리 모드 시간이 흐른 후 웬걸,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가 사무실 동지 박선영이었으니. 왈.
“앗, 선생님, 나 오늘 여기 처음 왔는데.”
그 후 윤중호의 입회로 그니들은 늦깎이 공식 커플로 등록되었고.
이번에는 다시 흑석동이다.
해직교사였다가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나 신문사 비정규직으로 부평초처럼 전전하던 기우는 젊음 막바지 즈음이다. 나는 동아일보사 비정규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집에 열흘쯤 쉬었다가 회사에서 부르면 출근하고 그나저나 함흥차사면 다시 실업자로 뭉개야 하는 살얼음판의 연장이었다. 출판부에도 있었고 신동아에도 근무하던 와중에 흑석동 달동네 입문한 것이다. 윤중호의 수작 ‘안면도’ 연작시 옆댕이에 따로 묶었던 ‘흑석동 시리즈’ 그 전설의 공간이다.
그리고 겨울이었다. 골목길 수백 계단 굽이굽이 올라서야 겨우 한숨 돌리는 그 ‘대문 쪼개진 집’에 올라서면 일단 하체에 힘이 빠졌고 식은땀으로 오한이 서렸다. 뜰안 수돗가를 중심으로 일곱 세대가 칸막이로 버티며 세월을 때우는 중이었고 나와 윤중호는 달동네 두 번째 문간방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독약품에 다니던 벗 이정화와 함께 머물던 ‘무늬만 자취방’에 객꾼 하나가 어정쩡하게 끼어든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서면 좁은 방인데 불청객이 끼어 여섯 사람이 완전 칼잠으로 버틴 적도 있다.
그는 새로운 입주자를 주인집에 인사시키지 않았으므로.
나는 세숫대야를 잡을 때마다 뒷덜미가 쭈삣쭈삣 서는 것 같았다. 수도세 변소세를 추가로 내라는 것도 아닌데 실체없는 감시망 노이로제에 걸려 웬만하면 오밤중에 들어갔다가 신새벽에 후다탁 탁구공처럼 튕겨나왔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세수도 생략했다. 일단 동아일보사 1층 화장실에서 해결했고 머리는 빨래비누와 찬물로 뚝딱뚝딱 빨아버렸다. 더러는 겨울 잠바도 벗지 않고 푹 떨어졌다가 그대로 일어나 지긋지긋한 여의도행 만원버스에 몸을 실었던가.
도대체 윤중호를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 꺼진 여닫이 사이로 쿵 쓰러진 다음 아침에 눈을 떠보면 그가 옆에서 코를 골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열한 시에 들어가면 윤중호는 한 시에 들어왔고 내가 술떡이 되어 한 시에 들어가면 그는 ‘아예 질기 놈 시합’하듯 새벽 세 시쯤 들어왔다. 마침내 내가 작심을 하고 세 시에 들어간다.
‘자, 이번에는 이 화상이 먼저 들어와 있겠지. 오늘은 내가 늦게 들어간다. 아좌좌좌.’
기합을 질렀는데 정작 자취방의 불이 꺼져있는 것이다. 그는 외박이었다. 아주 이따금 한밤 중 연탄불을 가는 소리와 함께.
“이젠 뜨뜻헤질 껴. 깡."
그렇게 쓰러지는 실루엣을 비몽사몽에 느끼기도 했다. 잠들기 직전 ‘깡’하고 박기당 만화책 흉내를 내며 쓰러지는 나이 삼십의 몰골이라니.
문간방 아저씨는 순종 경상도 보리 문둥이 종자였다. 원인불문. 감옥살이 일년인지 이년인지 지난, 실업자에 술주정뱅이 특유의 헬레레거림만 오려내면 윤중호 이웃으로 아주 ‘딱’이었다. 아니, 그 헬레레 스타일 역시 윤중호와 교집합이었다.
“돈 벌어왓!’”
은행에서 청소용역을 하던 그니의 천사표 아줌마가 짧은 순간 악마의 얼굴로 변한 채 앙칼지게 삿대질하면, 그냥.
“나 좀 내비둬.”
하며 실실 자리를 피해서 무허가 판잣집 너머 헐리운 담장 앞에서 해바라기로 서성이기도 했다. 이따금 윤중호에게 낚아채여 탁배기로 순대를 채우는 게 가장 재수 좋은 타이밍이었다는데.
하루는 그 문간방에서 흐르는 뽕짝 ‘흑산도 아가씨’에 늦잠을 깨었다. 눈을 뜨니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오뉴월 햇살이라서 일단은 괜찮은 컨디션이다. 벽을 뚫고 스며드는 라디오 가락에 취해 유목 시인 윤중호 스타일로 발바닥 장단을 맞춘다. 이번에는 오리지널 고전 이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다.
그는 옆구리 치고오는 음악소리에도 손발을 주체를 못하고 손발을 뒤흔드는 광대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구경꾼들은 윤중호의 춤사위를 기다리느라 오줌보 참으며 조바심하곤 한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라디오 가락에 혼자 발바닥 박수 장단이니 완전 맛 간 영상이다. 숙취 탓도 있으니 깰 때까지는 이 동작이 이어지리라.
‘쿵짜라쿵짝 쿵짝짝’
헛둘헛둘 팔다리 체조로 수돗가로 나오면 요강을 부시러 나온 문간방 할머니 등허리에서 달개비꽃 자줏빛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그럭저럭 괜찮은 아침 풍광이다. 에라이, 문간방 아저씨나 불러내어, 어젯밤 술작업이나 연장할깡.
“인 나쇼. 잉.”
망상망상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웬걸, 아차, 후회 막급.
아저씨가 울고 있었다. 문간방 아저씨는 얼굴까지 군용모포를 뒤집어쓰고 훌쩍훌쩍 흐느끼는 중이고, 중고품 라디오 혼자 고성능으로 뽕짝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럽게 우는 동포 옆에서 라디오 장단을 헬레레 때렸으니, 그게 바로 놀부 심뽀 수준.
흑석동 시절, 근무처이던 청소년 잡지 ‘우리 시대’는 주제와 배경 모두 그에게 가장 ‘딱’ 맞춤형 직장이었다. 장한기 선배, 신상철 선배(소설가 유시춘의 남편), 디자인쟁이 장영도 등과 술을 마셨고 나도 이따금 동숙자 신분으로 틈새에 섞였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몇몇 한샘출판사 직원들도 ‘부어라, 마셔라. 해결해 보자.’ 퇴근길 전의를 불태웠다. 먼저 생맥주 집에서 노가리 한 접시와 1000cc 짜리 몇 개를 들이킨 다음엔 감자탕집에서 쏘주, 막판엔 껍데기집이나 포장마차를 방문했고 기분이 땡기면 드물게 스탠드바 오브리도 때렸다. 나는 해직교사였으므로 거의 모든 술값을 윤중호가 지불했으니, 이제와 생각하면 참으로 멋쩍은 일이다.
막판에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주로 윤중호의 독무대였지만 이따금 편집 문제로 옥신각신 중.
‘나 내일 출근 안 해. 쌈발’
강짜를 놓아서 무르익은 술판 분위기를 폭삭 다운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출근을 안하기도 했다. 자취방에 누워 빈둥거리는데 신상철, 장한기 두 식자층 선배가 이웃집 밤마실 오듯 방문을 걷어차고.
“중호야, 목욕 가자.”
한 바탕 불은 때를 벗겨낸 다음 간신히 걷어낸 숙취를 다시 채울 채비다. 목욕탕 맥주 몇 병으로 딴소리만 능청능청 술상에 올리다가 그렇게 묵언의 소통으로 벌겋게 출근하기도 했다.
기실 윤중호는 글판에 몸을 거의 내밀지 않았지만.
문단의 지인들은 그의 카리스마를 안다. 깊이 골똘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든 사물에 진한 색소를 쏟아 붓는다. 게다가 생김새와 딴판으로 꼬장꼬장하다. 토굴 속에서 한 달쯤 살다가 나온 양산박 스타일이지만 속내 한 구석은 원조 물빤드기 기질이다. 전공부터 국문학도가 아닌 영문과 출신이어서 서양 원서도 좔좔 읽어내었다. 게다가 술안주 하나하나를 따져 맛보는 미식가이다. 두부는 살짝 데쳐서 먹었고 김은 주로 생김을 접은 다음 조선 간장에 찍었으며 이따금 김치도 물에 살짝 빨아서 ‘느슨한 매운 맛’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꼭 만연필을 사용했으며 기타를 아주 잘 치고 노래를 자기 식으로 편곡해서 부르던 유미주의자였다. 나는 그를 통해서 감나무 새순이 가장 늦봄에 싹을 내민다는 사실도 알았고 붓글씨용 짐승털은 햇볕이 아니라 그늘에서 느슨하게 말린다는 지식도 전수받았다. 그는 담벼락 햇살 아래에서 서캐를 잡던 행려병자조차 무심히 지나치지만, 어느 새 다시 필름을 돌려 용모와 행태를 완벽하게 재생시켜 글을 만드니 그 무심함 속의 집요함이 행간이 된다.
그러면서 순정파이다. 성깔이 까탈스럽지만 천년 고사(古寺) 앞에서 눈시울을 적시는 천상 오리지널 시인이다. 그는 교통사고로 꽉 막힌 양화대교를 기다리며 부글부글 끓는 운전기사에게 ‘세월이 좀 먹나유. 모래알이 싹 트간유. ’너덜너덜 농담을 건네는 양산박 불도화다. 부처님처럼 입을 다물다가 파계승처럼 낄낄대는 화상이라니.
어느 날 마(魔)가 왔다. 지인들의 구심점 윤중호에게 ‘췌장암’이란 ‘마’가 운명처럼 옆구리를 기습한 것이다. 스스로 타고난 강골로 규정하고 몸을 업수이 여김을 뒤늦게 반성했으나 결국 곡절 끝에 세상과 결별했다. 온누리 출판사의 김용항 사장, 채진홍 교수, 김혁 원장, 편집쟁이 이대건 벗 김광식 조기호 등의 노고도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우리와 영원히 작별했다. 분하고 억울하다. 산이 무너지자 ‘헤어지기 위한 지인’들이 일산 암병원 센터에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때 소설가 김성동님은.
양평 산골짜기 너와지붕 처소에서 칩거 중이었다. 그는 컴퓨터나 TV는 당연히 없고 지금까지 책상도 없이 원고지에 글을 쓰신다. 그래서 윤중호의 장례식장에 오지 못했고 대신 양평 깊은 산 그의 거처에서 49제를 지냈더란다. ‘중과 속’을 함께 넘던 정 많은 후배의 탁배기잔을 떠올리며 지성으로 손을 모았던 마지막 밤이다. ‘타오르는 산, 가라앉는 늪’ 모두 분해시키고 헤어질 찰나다. 그런데 함께 49제를 올리던 젊은 보살 왈.
“선생님, 윤중호 시인이 금방 오셨다가 사라지셨어요.”
소설가의 눈빛이 안도감으로 반짝인다. 망자를 설명하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똑같은 것이다. 윤중호를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젊은 보살이 그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검고 성성한 머리칼과 피부 그리고 영락없는 달마 화상까지 그대로 그려내었다.
“머라고 했나요?”
“먼점 가유. 성님.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봐야 맛을 아남유. 먼저 가나 야중에 가나 똑 같은 자리쥬.”
그로써 김성동 선생은 편안하게 49제의 막을 내리셨다. 아!
그대, 푸른 하늘 어디쯤에서 굽어 보며.
“여이, 먼저 가나 늦게 가나 쬐끔 차이여.”
걀걀대는가.
입으로 밭을 갈던 사람들에게 냅다 야단치지 않고, 청산 깊은 곳에 벌 나비로 은둔해 있는가. 개나리, 목련꽃, 흐드러진 진달래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봄날이다.
첫댓글 본동 그 시절 그때가 봄날이었던거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