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입주 축하 드립니다.
바쁜 회사일에 언제 그리 심오한 글을 쓰시는지
그 정열 놀랍습니다. 존경 스럽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소서.
들른 기념으로 고향길 달린 이야기 여기에 올리고
계룡산 등반기 아래 "계룡산맥"에 올립니다.
그냥 끄적거려 본겁니다.
즐거운 성탄과 새해 맞이 하옵길 비오며...
후배 나강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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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강하 (kanghan4220@hanmail.net) 추천: 4, 수정: 5, 조회: 113, 줄수: 141, 분류: Etc. 2002/2/14
오랜만에 달려 본 幼年의 시골길
할아버지와 할머니, 종조할아버지들, 고모들, 당숙들,
그리고 사촌들과 뒤엉켜 살던 유년의 시골 마을, 지금 거기에는 피붙이가 아무도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산의 양지바른 둔덕에 계시고
종조할아버지, 고모들은 한 분도 안 계시고 당숙들은 대처(大處)에 나가 사신다.
아버지와 어머니만이 읍내에 나와 사시며 선산(先山)을 지키고 제사를 모신다.
그리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부모님을 찾아뵙고
내가 사는 도시의 아파트와 똑같은 방안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다가
친구들 연락되면 읍내에서 만나고, 차례 지내고, 산소에 가고,
먼발치에서 유년의 시골을 바라보고 삶터로 돌아오는 사이클의 반복이었다.
그래! 올해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읍내 중학을 다녔던 들판길,
그리고 재빼기(고개) 너머 국민학교를 다녔던 길들을 한번 달려보자.
그래! 용침백이(문둥이)가 숨어있던 그 길이 그립다. 한번 달려보자.
이미 고향 올 때 한번 달려보려고 달리기 복장을 준비해 온 터였다.
명절 전날의 오후는 차가운 바람만 몰아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읍내에서 신송리까지의 비인 들판 길은 그 옛날의 추억을 부추킨다.
들판 너머의 정겨운 남산(雲隱山)이 범고래처럼 오두마니 누워 있다.
토성의 유해(遺骸)가 널려 있는 산 위에 오르면
근처의 너른 평야며, 금강 입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본으로 향하던 백제인들 그리고 나당 연합군, 백강구 전투,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의 행렬, 육지로 향하는 세곡선들,
일제 때의 공출미와 징용, 징병자들, 지금은 새만금의 뚝이 다가오고...
모두 모두 저 금강 입구에 눈물을 뿌리고, 웃음을 뿌리고 오갔을 요충지다.
거기에 지금은 TV송신탑만이 우뚝 서 있다.
그런데 근처 여기 저기 자세히 살펴보면 한양으로 변고를 알리던
봉수대의 흔적이 아직도 널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년 명절 때 올라가 본 山頂에는 토기와 瓦片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어 고고학자가 아닌 내가 봐도 안쓰러웠다.
아직 남산 너머는 "성너머", "한적굴", "오빠굴", "간저울", "합전"으로
남산 이 쪽은 "복룡굴", "구슬매", "남상굴", "분절"이란 동네가
일제의 개명정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점점이 산재해 있다.
머얼리 조그만 야산이 누워있는 평야지대의 그 읍내길은
봄이면 사울사울 불어오는 남풍에
이제 막 패어나는 청녹색 보리밭이 동으로 서으로 눞혀지며
오뉴월의 파아란 하늘가에 피어오르는 하얀 뭉게구름들을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보릿고개의 이삭은 더욱 파랗게 하늘가에 물감을 풀어놓다가 낫에 잘리워졌다.
그 보리 이삭이 누우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모내기하던 농부들이 보리밭 그늘 아래에 앉아 새참 막걸리를 들이켰다.
여름이면 온 들녘은 지독한 농약의 뿌우연 연무로 가득 차고
연무에 쫓겨난 날타리(하루살이)들이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백로와 해오라기도 뜨거운 날씨에 날개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가을이면 끝간데 모를 샛노란 황금 들녁을 지키는 허수아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참새 떼들은 미끈하게 패어나는 갈꽃 사이를 씩씩하게 날아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양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솥뚜껑 만한 참게들이
둠벙에서 어그적거리며 기어 나와
발길에 밟힐 정도로 똘뚝(水路)을 따라 어슬렁 거렸다.
겨울이면 황량한 들판은 찬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줄 울타리 하나 허용하지 않고
읍내 중학을 가는 우리들의 손발을 사정없이 꽁꽁 얼게 하였다.
그러한 겨울 들녘의 낙곡들과 말라버린 수초와 갈밭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황새와 큰기러기, 그리고 개리등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커다란 날개로 지붕을 덮으며 날아가는 황새에게 부지깽이로 삿대질하며
"황새야! 황새야! 어디가니? 나하고 노올자"하고 부르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들판의 가느다란 농로까지 깔끔히 포장되어 있지만
그 옛날 요즈음 같은 해빙기 무렵이면 읍내 가는 길은 고단하기만 하였다.
푸르스름한 보릿잎이 서릿발을 헤집고 기지개를 켤 무렵,
겨우네 꽁꽁 얼어있던 비포장의 읍내길은 땅이 풀어져 질척질척하여
신발이 시궁창에 빠지고 아랫도리는 온통 덕지덕지 흙투산이였다.
그 몰골로 학교에 가면 조개탄 난로 옆에서
바지에 덕지덕지 영글어 붙은 흙의 알갱이를 떼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전거라도 타고 갈 때면 읍내 길의 태반은 낑낑거리며 떼 매고 가기 일수였다.
신송리에 다다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이 야산 중턱에
수 백년의 풍우에 지면이 패여 등걸(뿌리)를 드러내놓고 있지만
위의(威儀)롭게 사방으로 쭉쭉 뻗은 커다란 가지는 아직도 건강미를 자랑한다.
우산을 펼친 듯 그림처럼 앉아있는 우아한 저 곰솔 한 그루는
이 서해안 평야지대에서 일어난 400여년의 역사를 가슴에 안고 있다.
그 곰솔! 내 유년의 읍내 가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본 곰솔이여!
정겨운 소나무 이름들을 불러나 볼까?
곰솔(海松, 黑松), 적송(赤松, 陸松), 백송(白松), 잣나무(紅松), 리기다松, 백두송(白頭松), 유송(油松), 청송(靑松), 금송(金松), 여복송(如伏松), 처진솔(盤松, 삿갓솔), 은송(銀松), 금강송(金剛松, 春陽木), 만주흑송(滿洲黑松), 테에다송, 흑반송(黑斑松)...........
아휴 많기도 해라. 소나무여! 소나무여!
유명한 소나무로 사람들에게 접대 받는 나무로는
예천의 석송령(石松靈)과 속리산의 정이품송(正二品松),
그리고 1990년 벼락으로 죽어버린 수령 600년의 서울 통의동 백송(白松)정도 이겠지만
나에게는 유년의 내가 오가는 모습을 지켜 본 저 곰솔이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본 소나무 중 가장 멋진 소나무다.
이제 화송리 "장마루" 어간인데
비닐하우스에 뒤덮여 빠알간 황톳길은 보이지 않고
다리를 쉬어가던 언덕배기는 아예 흔적도 없다.
얕으막한 언덕을 내려와 꾸부렁길을 치달려 가니 "섭다리"다.
조그마한 다리는 난간대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아
여기를 건널 때마다 간이 콩알만해 졌었다.
지금 보니 그 조그만 다리가 제법 넓혀져 있는데
다리입구의 수리조합과 상점을 겸하던 함석집은 흔적도 없다.
학교 가는 시오리 길, 그 집 아줌마는 가끔 밥도 먹여주고,
꽁꽁 언 손 녹이고 가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함석집은 양옥집으로 좁다랗던 "섭다리"는 현대식 교량으로...
흐흠! 그래! 세월이 흘렀지. 많이도 흘렀지.
"섭다리"를 넘어가니 "간사지"의 논두렁길이다.
"간사지" 너머 야산의 완만한 곡선은 예전 그대로인데
그 야산 속, 소풍가던 "봉탱이 절"은 그대로인지 알 수 없다.
거기도 가보고 싶지만 후일을 기약하자. 오늘은 내 살던 동네로 만족하자.
여기에 다다르니 "섭다리" 둔덕에서 "간사지"에 이르기까지의 뚝방에
독사풀과 토끼풀 그리고 연분홍 자운영이 이불처럼 깔려
불어오는 남풍에 굽이굽이 파도칠 즈음,
대나무로 물총을 만들어 개구리를 잡고 삐비를 뽑으며
흑염소를 몰아야만 했던 기억을 뒤적거리게 한다.
뚝방에 염소를 매어놓고 낚시하던 기억을 뒤적거리게 한다.
쟁기로 이랑을 갈아 엎듯 유년의 기억이 새롯이 피어난다.
이제 들녘 끝, 솔밭의 오솔길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옛길은 잡초에 묻혀있어 도무지 알아 볼 수 없다.
솔잎을 밟으며 한참을 달려가니 내 살던 동구인데 "똥뫼"이다.
여기만 오면 똥이 마려워 숲에 들어가 일을 보곤 하였다.
일 보던 숲은 앉은뱅이 나무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이제는 웃자란 어른 나무들로 꽉 들어차 있다.
"똥뫼"에서 내려다보니 겨울이면 물을 가둬 얼음판을 만들어
썰매를 만들어 지치고 연을 날리던 "지난자리"인데
그 "지난자리"에 얼음은 없고 나와 노는 아이들도 없다.
집안에서 TV를 보는지 연 날리는 이이들도 하나도 없다.
이어서 반으로 잘린듯한 형상을 한 "반산"을 오른다.
산 위에는 축구장 만한 평지가 있다.
잔디밭인 거기에 서서 보면 사방으로 조망이 좋았는데
이제는 커다란 소나무들이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낯선 풍경은 머언 기억의 뒤안길을 꺼내 보려는
나의 의지를 이내 사그러들게 하지만 지금의 나의 족적은
또 하나의 새로운 추억을 창조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며
발길은 또 다시 앞으로 힘차게 달려 나아간다.
6.25때 인민군들이 물러가면서 이곳에 사람들을 생매장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반산을 쳐다만 봐도 왠지 으스스하여
그 옛날 전쟁놀이를 하면서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다.
반산을 내려오니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있는 "새멀"이다.
그 시절 목조 교사는 전부 개축되었지만 거기 아름드리 서있던
플라타너스는 아직도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뛰어 놀고, 운동회하고, 공놀이하던 그 운동장은 그 때 그대로다.
국민학교 뒷산에는 "반공오열사묘소"가 있다.
6.25때 농업중학 5학년(현 고교 2년)이던 5명의 어린 학생들이
애국 활동을 하다 어부의 밀고로 인민군에 잡혀 靑雲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 중의 한 분은 바로 우리 집 윗집에 살았었는데 유족들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사리 살아가야 했던 예전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빠알간 해당화가 모듬모듬 군락을 이루곤 했던
"눈돌"이란 동네의 길고 긴 모래사장하며,
하얀 파도가 일렁이는 서해바다며,
금포, 월포, 죽산, 한성굴, 마동, 송내, 동지매, 갈목등의 동네와
모치레, 도둔리 너머 마량리의 동백정과 춘장대 그리고 서해 화력발전소의 굴뚝,
송림리 백사장 너머 장항제련소의 우뚝 솟은 굴뚝과 더불어 금강하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제 때 세운 장항 제련소는 포항제철이 들어서기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유일의 제련소였고 척박한 우리 고장의 자랑거리였다.
인근의 그런 동네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며
수십 년 만에 먼발치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쳐다보고
또는 직접 두 발로 밟아 본다는 것 자체가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에는 오열사의 암약이 인민군에 발각된 "아목섬"이
옛날과 변함 없이 일렁이는 바다에 알몸을 던지며 섬 그리매를 드리우고있다.
그들 오열사가 어부로 가장하고 연통(連通)했던 "연도(鳶島)"는
수평선상에 하늘에 뜬 연(鳶)처럼 걸려있다.
더 큰 섬 "개야도"는 커다란 외항선처럼 어슴푸레 누워있다.
"오열사묘소"를 내려와 국민학교 등하교 길이었던 숲길을 달려본다.
역시 별로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은 흔적만 남아 있다.
아이들도 차 타고 학교 다니는 모양인지 지름길은 잡초에 묻혀있다.
오솔길에는 솔가루며 낙엽들로 수북하다.
나무가 연료이던 그 시절에는 가을부터 온 산을 누비는 나무꾼들로 분주하였는데
이제 수십 년 만에 와 본 길은 인적조차 드물 정도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고
잡목이 무성하고 낙엽이 수북한 닫혀진 길은 왠지 서운한 느낌이다.
그러나 낙엽을 밟고 달리는 오솔길의 감촉은 그만이다.
"골매" 고개아래 다다르니 거기 있던 외딴집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인적은 없는 것을 보니 빈집인 것 같다.
그 집 뒤꼍의 먹음직스럽던 빨간 앵두가 생각난다.
바로 그 "골매" 소나무 숲이 용침백이(문둥이)가 숨어 있다고 소문났던 곳이다.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고 하여 학교에 오가는 우리들을 벌벌 떨게 하였는데
정작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골매" 재빼기(고개)를 올라서니
어렸을 적 전쟁놀이하며 놀던 뒷동산이다.
거기 꼭두서니에 있던 큰 소나무는 버혀지고 없고
아이들의 놀이터로 민둥산이었던 산마루는 온통 아카시아 잡목으로 무성하지만
"슴갈목"이 보이는 서해의 붉은 낙조는 예나 이제나 변함 없다.
저 아래 내가 나서 자란 집터는 그대로인데,
아직도 예전처럼 탱자나무 울타리를 두르고 채전(菜田)을 옆에 두고 있는데
아래윗집 게딱지같이 붙어살던 우리 동네 초가집들은
간혹 신축도 하고 원색적(原色的)으로 울긋불긋한 치장을 한 지붕은 예스런 맛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변하는 것, 다만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금 내가 나서 자란 동네를 내려다보니
나를 끔찍이도 귀여워 해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산에서 그만 내려오라고 손짓하시는 것만 같다.
아주 어릴 적 할머니를 비롯한 우리동네의 아낙네들은 모시 째는(모시 삼는) 일이 일과였다.
밤이면 이 집, 저 집으로 번갈아 마실 다니면서 모시 삼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우리 고장의 한산 세모시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한산과 가까운 우리 동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시 삼고, 다시 베틀에 잉아와 북을 걸어 모시 짜던 부지런한 아낙네들의 모습이 그립다.
봄이면 삐비(삘기)를 뽑아 먹고, 설익은 보리를 삶아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 때 등잔불 밑, 쩐지(모시 걸게) 밑에 누워 배고픔으로 칭얼대는 손주가 안스러운 할머니는
두 손을 잡고 얼르면서 "들깡달깡"타령을 불러주셨는데 그 노래가락을 듣고나면 이상하게 배고픔이 가셨다.
그리하여 또 다시 배고픔이 밀려오면 할머니께 "들깡달깡"을 들려 달라고 졸랐는데
그러면 할머니는 모시 삼던 "쩐지"(모시 걸게)를 재껴 놓고 귀여운 손자를 쓰다듬으면서
가락도 구성지게 예의 그 타령조의 "들깡달깡"을 기꺼이 들려 주시는 것이었다.
내가 나서 자란 동네 "벌천" 구석구석,
영모네, 장근이네, 석순이네, 형설이네, 하봉이네...
소리쳐 부르면 지금이라도 모두 모두 뛰쳐 나와
자치기, 빠치치기, 팔방놀이, 흙구슬치기, 연날리기, 팽이치기하러 가자고 할 것 같다.
그 옆 마을 공터에서는 단발머리 팔락이며 고무줄놀이와 보재미놀이, 공기놀이하던
영숙이, 정희, 방아꼬, 미숙이, 미라등 계집애들도 그 모습 그대로 뛰어나올 것 같다.
아니지! 사내애들은 이제 세파에 찌들어 주름도 생기고 배도 나오고
계집애들은 주렁주렁 애들을 매달고 하루하루 일부종사로 살아가겠지.
다만 물장구치고, 구럭(꼴망테)에 풀을 뜯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공간들은
온통 비닐하우스와 덩치 큰 자가용들이 군데군데 점령하고 있어
그러한 추억의 공간을 상정(想定)하고 온 나의 발길을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케 한다.
우리 집은 오리를 많이 키웠었는데 이따금 하룻밤에 몇 마리씩 행방불명이 되곤 하였다.
그런 날, 이 뒷동산에 올라와 보면 속이 텅 빈 오리가 영락없이 널부러져 있었다.
음흉한 살가지(삵쾡이)의 소행이라 하였다. 살가지는 내장만 빼 먹었다.
그 날은 모처럼 맛있는 오리국물을 들이켜는 날이었으니
어린 우리 형제들은 오히려 살가지가 스며드는 날을 기다리기조차 하였다.
이 곳에서는 돌칼, 돌도끼 등이 발굴되곤 하였는데
선사시대 부족국가가 형성되던 때 여기는 "兒林國"이었다.
예전에는 여기저기 조개무지(貝塚)가 많았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
뒷산을 내려오니 "돌방재"이다.
"돌방재"길을 내려오니 "샛태"인데 여기에 우리 밭뙤기가 조금 있었다.
손바닥만한 밭에 수박, 참외, 오이, 고구마, 고추, 목화, 보리, 가지, 무, 배추, 팥, 녹두를
심구고 가꾸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온 집안 식구가 나서서 수확을 하였었다.
지금은 그 밭두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일하던 식구들의 잔영(殘影)만 어른거리는데
조부모님은 선산에, 부모님은 읍내에,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현실과 대비되어
대가족이 엉켜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강한 유혹이 일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환각, 다시 보니 역시 온통 비닐하우스로 뒤덮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저 아래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곰솔밭 사이로
자주 놀러가던 하얀 백사장과 해당화가 그림 같던 "뒷장불"이 보인다.
곰솔 밭을 거쳐서 불어오는 해풍의 쏴아쏴아하는 소리가 지금도 변함 없다.
그 때 거기 "뒷장불" 절벽 아래 개펄에는
빠알간 집게발을 치켜든 농게가 거품을 한없이 피워 올리곤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뚱장어며, 갯지렁이, 칠게, 밤게, 따개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해창"을 지나 "장구지"에 다다르니
명절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김 공장의 분주한 금속성 기계음이 들려온다.
그리고 내쳐 어릴 적 한 아이가 빠져 죽은 "물구내" 다리를 건넌다.
서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은 구부러져 깊숙이 이곳까지 들어와
고깃배가 들어오는 만조 때면 할아버지 손을 잡고 종종 놀러 오곤 하였는데
변변한 안전시설조차 구비되지 않은 이 간이 선착장은 아이들에겐 위험천만이었다.
당정리 "산막굴"에 이르니 제법 땀이 나고 다리가 고단하다.
"사기정굴"로 가는 이 길은 원족(봄소풍) 가던 길이다.
"사기정굴"에 수원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왕 벚꽃이 즐비하여
사발 만한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나무 그늘 아래
원족을 따라온 온 동네 사람이 모여 하루를 어우러져 즐기곤 하였다.
가을이면 땔감을 하러 가는 숙부를 따라 가서 머루며 다래며 몽감이며 많이도 따왔다.
"뚜드랭이"를 돌아 길고 긴 화산리 언덕을 내려오니
도만리 희리산(希夷山, 329m)입구인데 이 곳도 온통 곰솔밭 투성이다.
지금 새로 조성된 "희리산 곰솔밭 자연 휴양림"은 외지의 심신이 지친 도회인 들을 유혹하고 있다.
화산리 언덕을 내려오니 천 개의 방을 가진 절이 있었다는 천방산(千房山, 324m)이
머얼리 처가(妻家)가 보이는 지현리 "왜재" 쪽을 품에 안고 위용을 자랑한다.
300여 미터의 야산도 평지에서 보니 제법 그 자태가 대단하다.
그렇게
그렇게
달려보고 싶었던 유년의 고향,
시골길을 원 없이 구석구석 달려 보았다.
얼굴에 허옇게 소금 끼가 묻어있는 얼굴로 돌아 온 나를 보고
형수님 왈 "시상이나. 날씨도 추운디. 뭐하러 그렇게 달리남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