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한 지 1년이 다가온다. 사무실에서 집까지 차로 20분 거리다.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걸릴까?
토요일 오후, 따뜻한 봄날이다. 밀린 일을 마치고 걸어서 퇴근해 보기로 하자. 건물을 나서기 전에 출발시간을 기록한다. 오후 1시 46분.
사무실이 있는 구월동에서 집까지는 12Km정도의 거리다. 낮 기온은 영상 20도에 가깝게 올랐다. 봄기운을 만끽하기 좋은 날이다. 옅은 안개가 강한 햇빛을 차단하고 있어 걷기가 수월하다.
롯데 백화점에서 신세계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길은 로데오 거리다. 밤이면 인천의 모든 젊은이들이 모여 젊음을 발산하는 장소다. 밤을 기다리는 거리는 적막하다.
로데오(Rodeo)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들이 길들여지지 않는 말이나 소를 타고 계속 버티거나 굴복시키는 게임을 말한다. 로데오 거리의 유래는 미국 비버리 힐즈의 세계적 패션거리인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오늘 밤이면 어김없이 시류에 때묻지 않은 젊음이 유감없이 발산되리라.
로데오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 걷는다. 주유소가 있던 자리에 가전제품 매장이 들어섰다. 새로 문을 연 전자제품 매장은 개업기념으로 세일을 한다. 세일이 불경기로 지갑이 가벼워진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가전제품 매장을 지나 남동대로를 만난다. 남동구가 '인천의 중심이고 수도권 제일의 행복도시'란다. 주민이 행복 체감도와 같을까 궁금해진다.
남동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구월 보금자리주택지구'로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 도시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여 농사를 짓던 지역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배추와 토마토, 벼농사, 하우스 재배까지 다양한 농산물이 생산되었다. 농사짓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 떠났을까. 보상은 제대로 받았을까. 투기로 목돈 만진 이들도 있겠지.
만수동으로 넘어가는 샛길 역할을 톡톡하게 했던 길이다. 지금은 공사차량만 먼지를 날리며 오간다. 점심 때 산책하기 좋은 길이었는데 사라진다고 하니 아쉽다. 옛 길은 사라지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반듯한 길이 생겨나겠지.
봄은 왔지만 주인이 떠난 농토는 썰렁한 채로 흙이 파헤쳐지는 날만 기다린다. 생명의 새싹은 돋아나지 못하지만 서민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위안으로 쓸쓸함을 잊는다.
소를 키우던 우사는 사라지고 고추를 키워낸 밭에는 폐비닐만 서럽게 펄럭인다.
언제나처럼 인증 샷 한 장 남기고 다시 걷는다.
언제 뜯겨 나갈지 모르는 비닐하우스, 앙상한 철골만 남긴 비닐하우스가 을씨년스럽다.
행여, 올해만이라도 더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하는 농부의 심정이었을까. 몇 개의 고랑을 만들어 두었다.
도심 속 농촌은 사라지고 아파트 숲이 들어설 날이 멀지 않았다.
수령이 5백년 된 회화나무다. 산림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나무다. 보금자리 주택지구 내라고 하더라도 사라질 염려는 없겠다.
오백년의 역사를 지켜왔듯이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서는 천지개벽을 지켜 볼 터이다.
주변의 주택은 모두 사라졌는데 당당하게 지키고 서 있으니 주인이 없거나 아직 보상을 받지 못해 그런 것일까.
재개발 지역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볕에 작은 꽃이 피어났다. 꽃샘추위도 두렵지 않다.
습지도 사라지겠지. 숲 속에 숨었던 오리 한 쌍이 날아올라 걷는 이를 놀라게 한다. 습지가 사라지면 오리는 어디에서 보금자리 찾을까.
구월정. 국궁을 쏘는 활터다. 주변의 주택이 사라졌는데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서도 사라질 기세가 아닌 듯하다.
보금자리 주택지구가 끝났다. 호구포길을 만난다. 호구포길은 벚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어, 벚꽃 피는 4월이면 장관을 이룬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보인다.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는 시민의식도 문제지만 'CCTV 작동 중'이라는 거짓말로 시민을 속이는 구청도 나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몰래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가을 한창 토마토를 판매할 때 불 밝혔을 전기 콘센트가 눈비 맞아 퇴색한 채 봄을 맞는다. 다시 토마토를 판매할 그 날을 기다린다. 화원 앞에는 봄이 완연하게 찾아 왔다. 올망졸망 달린 보라색 꽃들이 아름답다. 울긋불긋 곱게 피어난 봄 꽃의 향연을 즐긴다. 걷는 이의 마음에도 꽃물이 곱게 든다. 다양한 다육이가 전시된 화원으로 발길이 옮겨진다. 화원 가득 다육이가 전시되고 있다. 화사한 꽃과 달리 듬직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거실 창가에 옮겨 놓으면 집안 가득 봄의 정취가 퍼질 것만 같다. 두 가지 선인장을 접 붙여 하나로 만들었다. 초록 몸매에 알록달록한 머리가 잘 어울린다. 다육이를 고르는 여심에도 봄은 벌써 찾아 왔다. 3월이 가기 전, 거실 창가에 다육이 화분 여러 개로 봄을 마중하리라. 화원에서 봄을 마음껏 느끼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텅 빈 의자에 아픈 다리를 쉬어 가고 싶다. 한 시간을 넘게 걸었으니 쉬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쉬지 말고 걷자. 고양이를 만났다. 살며시 그 자리에 앉아 고양이와 시선을 마주친다. 긴장을 늦추지 않는 고양이에게 가깝게 다가서려니 등을 돌린다. 야생하는 고양이라 사람을 경계하는 원초적 본능이다. 경계의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고양이를 이해한다. 고양이의 길과 사람의 길. 각 자의 길을 따라 다기 걷는다. '안녕. 잘 가라. 고양이야' 학익동에서 소래로 이어지는 옛길이다. 지금은 화물차의 주차장으로 변했고, 출근길에 샛길로 이용되는 길이다. 한 때는 소래포구로 이어지는 길이라 노선버스가 다녔다. 구불구불한 길로 달려가는 소래포구는 멀기만 했다. 추위가 물러난 밭에는 새싹 돋은 마늘이 봄을 알린다. 파릇파릇한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잎의 수를 늘린다. 비닐하우스 가득 상추가 자란다. 벌써 몇 번을 뜯어 출하했는지 밑동의 이파리가 뜯겨 나갔다. 밤새 가로등 불빛은 까치집을 지켜 주겠지. 언덕을 오르면 도림고등학교 앞 사거리다. 도림고등학교에서 서창동으로 이어지는 비류대로는 개나리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길이다. 호구포로에서 벚꽃을 즐기고 비류대로를 걷는다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연인과 함께 사월의 꽃길을 걸어보라. 비류대로를 건너 소래포구로 이어지는 옛길을 따라 계속 집으로 향한다. 모종을 심는 부부의 뒷 모습이 아름답다. 알찬 수확을 기대하고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을 다해 심는다. 깊 옆 아주까리 열매는 새들의 먹이도 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새싹을 틔워보지도 못했다. 그저 말라버린 가지 끝에 매달려 기약 없는 허송세월을 보낸다. 옛길의 정취에 흠뻑 젖어 걷는다. 저 길 끝에는 집으로 가는 길, 논고개길을 만난다. 논고개 길이 보인다. 소낭데이 고개를 넘으면 논현동 신도시다. 점점 집이 가까이 다가온다. 2시간을 걸어서 인가, 어느 식당의 메뉴가 눈에 확 들어온다. 오봉산을 이어주는 생태통로 길에는 꽃게와 물고기가 산다. 소래포구가 근처에 있다는 의미다. 생태통로 길은 소낭데이 고개 마루에 있다. 거북이의 대화를 듣는다. '어서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을까. 소낭데이고개를 넘었다. 논현동 신도시의 입구에 들어선 빌라 촌을 지난다. 야구장에는 클럽대항 야구시합이 열린다. 저 선수 홈런을 날렸을까. 1루에서 아웃되고 말았다. 논고개로와 은봉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육교가 있다. 장애인을 위한 깊은 배려가 있는 잘 만들어진 육교다. '담배연기 없는 건강한 남동구'를 만들겠다는 슬로건이 기쁘다. 벌써 담배 끊은 지 13년째인가. 논현동 신도시. 음식점이 즐비해 저녁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홈 플러스를 지나면 종착점인 집이 보인다. 드디어 멀리 집이 보인다. 반갑다. 차를 탔으면 2시간 전에 도착했을 텐데. 걷는다는 것은 느림이니까. 신도시답게 고층아파트 촌이다. 반갑다. 우리집. 내가 살고 있는 502동. 엘리베이터를 타고 1분이 지나면 집에 도착한다. 발이 아파온다. 낮잠을 즐기는 아들 녀석을 깨웠다. "빨랑 핸드폰 켜! 몇 시냐? 시간을 찍어야 해" 4시 17분이다. 2시간 21분 걸렸다. 차로 20분이면 넉넉하게 도착할 거리다. 걸으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만큼 시간을 잃어버린 것일까? 절대 아니다. 시간을 벌었다. 건강을 얻었고, 행복한 기쁨을 맛봤다. 훗날 또 걸어야지. 흐뭇하다. ※ 사진은 갤럭시 S2 핸드폰으로 촬영하였습니다. |
출처: 행복찾아 떠난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고향청솔
첫댓글 대단, 훌륭하십니다. 님을 위해 준비한 코너가 있습니다.
4/21(토) 한국 100Km 걷기대회 - 같이 가시지요...
(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벌써 접수했답니다.)
http://www.100km.org/
살아있다는 증표..밤새워 24시간 연속해서 걷기...멋진 도전에 함께 하시지요...
잘 지내시지요. 제주도로 내려 가셨나요? 와 100Km라...몸을 만들어야 하겠군요.
걷기보다 좋은 운동은 없습니다. 서울서 사무실 다닐때 왕복 8km 매일 걸어 다녀는데..
산장에서는 매일 산책로를 1시간 30분정도 걷고 있습니다
드디어 산장 생활을 시작하셨군요. 멋진 인생 살아가는 형님이 부럽습니다. 강령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