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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학의 ‘서언’을 쓰기 위하여
문 신
문학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물음은 오랫동안 문학공동체 내부를 공명해왔다. 하지만 제대로 답을 얻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문학이 무엇인지에 관해 쉽게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혹은 ‘존재’라는 기표의 의미와 상징은 지금까지 실체를 온전하게 드러낸 적 없었다. 문학공동체의 구성원 누구도 그것이 낱낱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문학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학을 둘러싼 구성체(예를 들면 작가, 책, 독자, 출판사, 관련된 정부 기관 등) 는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중요한 것은 문학구성체의 유기성이다. 생명있는 것들이 그러하듯, 문학구성체도 나타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변화의 한 지점을 점 유한다. 작가의 탄생과 죽음, 책의 출판과 폐기, 독자의 유입과 이탈 같은 경험 진리가 그것을 설명한다. 우리의 경험 진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첫째 덕목으로 삼는다. 이것은 한 번도 위반된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기대되는 진리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 하게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존재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삶에의 충동으로 가득하다는 것과 충동 앞에 죽음이 운명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충동적 운명에서 예외적인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삶을 향한 충동이 결국에는 죽음에 닿는다는 모순에서 역사발전의 한 양상을 짚어내기도 했다. 충동은 삶을 밀어가고 운명은 삶의 끝에 죽음의 그물을 드리우고 있다. 이 진리의 궤도에 올라선 순간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발전과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발전 이데올로기가 우리 삶을 안락하게 이끌어온 건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 삶이 더 나은 방향성을 지녔는지는 여러 면에서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먹고 입고 누리는 생리적 욕구라는 측면은 과거에 비해 풍요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을 생산해내는 도구들—자동차, 컴퓨터 등의 생활 수단들—도 인간 노동을 능가하는 효율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가? 문명의 도구들 말고 그 도구를 만들어 이용하는 우리는 얼마나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도구를 마주하는 우리 영혼의 현재를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런 물음에 게오르크 루카치는 다음처럼 말한 적 있다. “영혼의 현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감이다.”1) 그에 따르면 ‘삶’은 이미지를 창출하는 원칙이고 ‘살아감’ 은 의미를 설정하는 원칙이다. 루카치가 말한 영혼의 형식을 말하기에 앞서, 나는 인간이 이렇게 탁월한 사유의 주체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 조금 경건해진다. 그렇지, 우리가 그런 존재였지. 그런데 최근 들어 삶-이미지, 살아감-의미의 형식으로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살아감-의미’ 의 형식보다는 ‘삶-이미지’가 주는 안온함을 만끽한다는 느낌이다. 굳이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라서 그럴 것이다. 이미지가 재생하는 것을 생각 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 삶은 더없이 충족되는 시대다.
시뮬라크르 담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이미지에 집착하는 우리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로 스마트 기기를 통해 구현 되는 이미지의 세계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구현된 이미지’를 ‘구현될 이미지’가 대체해버린다. 이미지는 사유 대상이 아니 라 감각적으로 소비되는 환영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삶은 사유 되지 않고 소비될 뿐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를 역사의 공동 묘지에 안장한 후 우리는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즉 소비하는 인간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세상은 소비될 뿐 사유 되지 않는다 는 피켓이 거리 곳곳에 견고하게 서 있다. 문제는 소비 행위에는 충족이 없다는 것. 모든 소비는 공허를 만들고, 공허의 자리에 새로운 소비가 욕망 된다.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의 메커니즘이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내심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공과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중이고, 계속해서 우리 삶이 발전해갈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을 지나가고 있다. 한편에서는 한계치에 도달해 있는 무한경쟁과 부의 쏠림, 특히 생태 환경의 무분 별한 파괴 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그러한 논의마저도 자본 증식의 한 방법으로 삼켜버린다. 자본주의 체제를 슬기롭게 극복하려는 시도마저도 새로운 자본을 창출하는 시스템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가 경계없이 증식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객체적 사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불편한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의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할 우리가 자기 목에 방울을 달고 이 체제의 성실하고 근면한 스마일맨이 되었다는 점이다. 체제에 대한 고민보다는 체제와 더불어 살아가는데 골몰하고, 때로는 체제를 이용하고자 하는 영악함도 은근히 드러낸다. 이것을 생명 충동으로 가득한 삶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 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찬란한 순간을 경이롭게 목격하는 중이다. 그 이미지에 현혹된 사이에 우리를 둘러싼 생태 환경은, 어둠이 내려앉듯 우리 내면을 점령하였다. 첨단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 자본과 부의 시대, 행복의 시대…… 같은 빛이 강렬하게 우리를 매혹할수록, 그 뒤에서 한때 우리가 자랑스럽게 가슴에 품었던 인간의 조건들은 어둠의 폐허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잔해 어딘가에 문학도 깔려 있을 것이다.
문학 생태의 위기 담론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역사적 격변기마다 가장 먼저 존재론적 수치를 견뎌야 했던 것이 문학이다. 일제강 점기에, 군부독재의 시절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후기자본 주의의 용광로에서 문학은 동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다. 그것은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시대를 전망하고 시대를 진단하며 시대를 추수하는, 이를테면 문학은 인간 삶의 미래-현재-과거를 모두 떠안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문학은 존재론적 변화를 끌어냈고, 문학적 정체성의 갱신을 이루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간에 문학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기억한다. 자본주의식으로 말 하자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할 때 문학은 가장 생산적인 방법으로 존재의 소명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문학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성체의 본질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응했다. 현대문학사가 아름답게 기억하는 1980년대 문학이 그러했다.
기억하는가! 그 시절, 우리는 역사발전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구성체에 관한 다양한 논쟁을 시도한 적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진입하고 있는 사회적 생태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충돌하였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기본 축으로 삼아 우리의 삶이 놓여 있는 생태적 장field을 파악하 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삶이 그를 둘러싼 유물론적·이데 올로기적 조건들로부터 강하게 제약받는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었 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역사적 변곡점이었고, 문학은 격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데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역할을 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사회를 구성해가는 이데올로기 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아 든 문학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견고한 것들에 저항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강조한 것처럼, 약속은 “자기 지배와 그에 따른 타인 지배에 의존하는 지배형식의 유 일한 대안”2)으로서의 능력이 있다. 군부독재 또는 자본주의 같은 ‘지배형식’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 행위가 바로 약속인 것이다. 1980년대 문학이 빛날 수 있었던 것도 ‘지배형식의 유일한 대안’으로서 저항에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약속을 실현하는 일은 변화였다. 9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이 얼마나 숨 가쁘게 변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문학은 변화에 그치지 않고, 변화 자체에도 끊임없이 저항했다. 다양한 문학적 논쟁이 바로 변화 자체 에 저항하고자 하는 또 다른 문학적 약속이었다. 변화의 자연발생적 이행에 저항하는 방식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 논쟁으 로 드러났다. 이천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던 문학 권력 논쟁이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논쟁은 시대와 함께 문학을 변화시켜온 중요한 기제였다. 멀게는 1920년대 내용-형식 논쟁이 있었고, 1960년대의 참여-순수 논쟁과 이후의 민족문학 논쟁 등 ‘논쟁’은 당대 사회를 구성하는 ‘지배형식’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이천년대 문학 권력 논쟁도 새롭게 제기되는 삶과 사회의 요구에 대한 약속의 형식이었다. 90년대 들어 구심적으로 작동하던 이데올로기가 해소되고, 주변부 를 향해 가는 원심적 사회구성체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편중된 문학 권력을 해체하고 분산하여 재구성하고자 하는 약속은 필연적이었 다. 돌이켜보면 논쟁 당시에는 논쟁 효과가 나타날 것 같지 않았지 만, 논쟁의 여파는 새로운 방식으로 문학을 둘러싼 담론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논쟁 효과는 다양성이 아닐까 한다. 신춘 문예나 문예지를 통한 등단 제도에 저항하는 작가들의 영향력이 높아진 것은 물론 지역 문단의 활성화 및 새로운 문예지의 창간 등은 외견상 우리 문단 생태의 건강지표가 되고 있다. 줄기차게 반복되는 문학의 위기 담론 속에서도 문학 매체는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고, 작가 및 작품집의 양적 성장 속도는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이러한 추세와 맞물려 문학에 투입되는 각종 공적 자금의 규모는 어떤가? 양적 측면에서 본다면, 문학 창작의 주체(작가)와 매체(문예지, 출판사 등) 그리고 자본(각종 지원금) 등 문학 생산력은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문학의 생산(창작)이 재생산(감상)으로 원활하게 연계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학 재생산의 주체가 독자라는 사실은 문학구성체 논의의 핵심 이다. 문학이 존재하는 곳은 작가도 책도 출판사도 아니다. 오래 전에 이미 문학은 독자를 통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장르임이 판명되 었다. 문학의 위기 담론도 문학 생태의 변화 담론도 모두 독자라는 변수에서 발생했다. 독자의 위기 앞에 작가도 출판사도 뾰족한 대안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문학이 ‘쓰기’와 ‘읽기’의 마주보기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학이 아직도 ‘쓰기-읽히기’ 관 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문학 담론의 헤게모니를 생산자(작가)가 거머쥐어야 한다는 오랜 관습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자기 작품을 독자에게 읽혀야 한다는 가부장적 소통방식 앞에 재생 산자(독자)는 분연히 저항함으로써 문학 담론의 생태에 균열을 일으켰다. 또 하나, 문학 생산 방식에 나타난 변화에도 주목하고 싶다. 오 랫동안 문학 생산 수단이었던 ‘책’의 영향력이 주춤해지는 사이 ‘온라인 플랫폼’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문학의 재생산 방식이 독서를 떠나 온라인 ‘접속’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최근 문학 생태의 위기 담론은 이러한 문학 생산 방식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생산 방식의 변화를 일찍이 받아들였던 장르는 대중음악이 었다. 음반 혹은 CD라는 음악 생산 수단이 음원 파일로 변환된 후, 음악을 재생산(소비)하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은 음악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 음원 시대가 되면서 음악은 감상 (향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소비되어 폐기되는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이런 재생산 패턴은 음악의 생산과 재생산 주기를 짧게 만들었다. 지금 대중음악만큼 발빠르게 새로운 생산물이 나타나는 예술 장르는 없다. 문학도 대중음악이 걸었던 길에 접어든 형국이다. 웹소설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문학이 재생산(소비)된 지 꽤 지났다. 읽고 보관하던 책에서 읽고 삭제하거나 접속을 차단하는 방식의 문학 재생산 시스 템이 가동하면서 문학의 존재 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문학을 둘러싼 생태 환경이 변하는 동안, 그 생태계에서 살아가야 할 문학구성체의 대응은 미미했다. 책의 시대가 저무는 동안 붉게 물든 노을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내 캄캄한 어둠이 내리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묻는다. 그러나 사실 문학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하고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문학의 존재 장소에 따라 그 존재 이유가 드러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소설이나 동화 같은 이야기 장르에서는 생산 단계에서부터 독자의 보이지 않는 개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의 존재처가 독자라는 사실에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시나 시조 같은 서정 장르는 여전히 문학 생산 주체에 기대고 있다. 물론 서정 장르는 사적이고 내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재생산(읽기) 과정 없이 시조의 생산이 활발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재생산 주체(독자)의 생산 주체(작가)에 대한 저항은 강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참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지는 않다. “우리는 ‘다른 목소리(the other voice)’를 통한 전언 방식과 소재의 다변화를 꾀하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결핍 요소들을 채워가는 이른바 ‘역진逆進’의 방식”3)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다른 목소리’의 근원을 탐색하고 그 가능성을 살피는 일은 문학구성체 모두가 참여해야 할 논쟁거리다. 작가의 목소리와 독자의 목소리 그리고 매체의 목소리를 따져 묻고, 시조 장르 의 격格과 형形과 식式이 요청하는 목소리를 캐물어야 한다. 어쩌면 시조의 격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형에서 독자의 목소리를, 식에서 매체의 목소리를 새겨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조가 요구하는 생산자(작가)의 인격·성격·품격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논쟁이 이루어질 때, 시조의 재생산(독자의 읽기) 시스템이 가동될 것이다. 이러한 생산재생산의 구조 속에서 온라인 플랫폼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생산 방식이 결정된다면, 문학 생태 담론에 ‘다른 목소리’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심사평 가운데 ‘다른 목소리’의 징후가 있어서 소개한다. “말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고 말에 대한 각성이 필요한 이 시대, (중략)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적 외침”이 필요하다는 심사평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생산자와 재생산자 그리고 생산 수단 같은 문학구성체의 구조적 단위를 이야기했지만, 이들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계해주는 건 문학의 존재 형태인 ‘말’, 즉 언어이다. 그러니까 ‘다른 목소리’는 사실 ‘다른 말’이고, ‘다른 말’에는 ‘다른 철학’을 담아내야 한다. 변화란 이런 다름을 요청 하는 내적 힘의 움직임이다. 문학을 둘러싼 생태 환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요청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요청에 ‘다른 말’ 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목소리에 저항할 때 정체된 문학 담론의 ‘안티테제’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문학의 생산재생산의 주체와 생산 수단으로서의 매체, 존재 형태로서의 언어를 아우르는 문학구성체에 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우리 문학이 ‘재현’해왔던 ‘삶’ 말고 잠재적인 ‘살아감’을 ‘표현’ 할 수 있는 문학 생산 방식에 대해 논쟁했으면 좋겠다.
문학과 사회의 역사발전 단계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새로운 문학의 ‘서언’을 요구해야 할 단계이다. 이 단 계에서 새로운 문학의 ‘서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영혼을 동경하는 사람일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동경은 모든 형식을 파괴하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종언 시대 문학의 지배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학의 ‘서언’을 쓰게 될 동경하는 자를 기다려보 기로 한다.
1) 게오르크 루카치, 홍성광 옮김, 『영혼과 형식』, 연암서가, 2021, 48쪽.
2) 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제2보급판), 2019, 351쪽
3) 유성호, 「책머리에」. 『정격과 역진의 정형미학』, 작가, 2014, 7쪽.
문 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곁을 주는 일』 등을 냈으며,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