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이라는 부제는 이 책이 조선시대 그림을 통해서, 당대의 문화와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는 기획 의도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전혀 이질적인 성격을 지닌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를 통해 당대 민중들과 궁중 생활의 면모를 밝힌다는 점에서 우선 흥미롭게 다가왔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풍속화에는 그 시대를 살아갔던 민중들의 삶의 면모가 어느 정도 드러나 있고, 그림에 나타난 형상들을 해석함으로써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비록 일부 행사에 그치고 있지만, 궁중기록화 역시 그 행사의 과정과 의미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바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전혀 이질적인 성격을 지닌 풍속화와 궁중기록화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크게 두 항목으로 구성되는데, 풍속화에 대한 해석을 다룬 1관과 궁중기록화를 다룬 2관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도슨트의 입장에서 그림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상세하게 따져 독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궁궐 밖의 사사로운 날들’이라는 제목의 1관에서는 조선시대의 신분제에 따라 양반들과 여인들 그리고 서민들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별도의 ‘전시실’로 꾸며 소개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 큐레이터 혹은 도슨트가 되어 독자들에게 대상이 되는 그림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제1전시실’에서는 ‘풍류로 통하던 조선 양반들’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10편의 풍속화에 나타난 양반들의 풍류적인 삶의 면모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김홍도를 비롯한 조영석과 정선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물론 당대 풍속화에 나타난 양상들이 양반 생활의 전모를 드러냈다고 해석할 수는 없지만, 당대의 화가들에게 포착된 풍류의 일면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가부장제 아래의 조선 여인들’이라는 제목의 ‘제2전시실‘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4편의 작품이 소개되고 잇는데,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대외적인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사정을 반영한 결과라고 이해된다. 그리하여 화가 가족들의 일상의 단면을 포착한 신한평의 <자모육아>가 다소 특이한 내용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3편의 그림은 당시 여성들의 삶을 풍속화로 담아냈던 신윤복의 작품이다. ’제3전시실‘에서는 ’하루하루에 충실한 서민들‘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6편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으며, 이 역시 화가들의 시선에 포착된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의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에서 열린 성대한 잔치’라는 제목의 2관에서는 왕이 주관하였던 두 차례의 ‘기로연’에 관한 기록화와 민간에서 열린 두 차례의 기로연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소개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궁중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은 도화서의 화가들을 통해 그림으로 남기도록 했으며, 특히 중요한 행사의 경우에는 중요한 과정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이러한 기록화를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의궤(儀軌)’이며, 이것을 토대로 언제라도 당시와 같은 행사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참석한 사람들의 수와 그들이 입었던 옷과 동원되었던 물건들과 용도, 심지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까지도 비교적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나이든 신하들을 배려하는 전통은 왕이 그들에게 베풀었던 기로연(耆老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로 70세를 넘고 정2품 이상의 고위 관료를 역임했던 관료들은 ‘기로소(耆老所)’에 들 어갈 수 있었다. 왕의 경우 60세 이상이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숙종이 59세 되던 해에 1년을 앞당겨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여 연회를 베풀고 행사가 열린 단계마다 모두 5개의 그림으로 그려 남긴 것이 바로 ‘기해기사첩’이다. 이와 함께 영조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그 과정을 기록화로 남긴 것이 ‘기사경회첩’이다. 저자는 이 두 기록화를 소개하면서, 그림에 형상화된 당시의 궁중 문화의 일단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잇다. 이와 함께 정선이 그린 ‘북원기로회도’와 김홍도가 그린 ‘기로세련계도’ 등을 ‘궁궐 밖에도 잔치는 있었다’라는 제목을 통해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풍속화가 사생활이라면 기록화는 공공생활’이라고 할 수 있기에, 이러한 그림들을 통해서 조선 후기 사람들의 공적인 삶의 모습과 사적인 생활 양태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고 하겠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