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근(韓聖根·1833~1905)
한성근(韓聖根)은 1833년 8월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서 태어나 1905년 12월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함대의 로즈제독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문수산성과 마주하고 있는 강화도 갑곶진을 공격, 강화성을 점령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대원군의 명을 받아 문수산성을 지키고 있던 한성근(韓聖根)이 이끄는 별파군 50명은 산성의 남문(南門)으로 쳐들어오는 120명의 프랑스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27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결국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다.
한성근은 순무영(巡撫營)의 초관(哨官)으로서 집사(執事) 지홍관(池弘寬)과 함께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지키고 있었고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성근은 이후 봉상시 봉사, 병조좌랑, 은산현감,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자 정령관(正領官)으로서 좌부령관(左副領官) 윤웅렬(尹雄烈)과 같이 신식군사훈련에 힘썼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1893년 한성판윤 2월(하루), 1896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1899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냈다.

국가사적 139호 문수산성(김포)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쌍곡 야산에는 병인양요 문수산성전투의 주역인 한성근의 묘비가 있다 (사진=괴산향토사연구회 제공) 正憲大夫 正二品 兵曹判書 耆老所堂上 淸州韓公 聖根之墓(정헌대부 정이품 병조판서 기로소당상 청주한공 성근지묘)
양헌수(梁憲洙)(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부사정 종임(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양헌수(梁憲洙)는 1866년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해오자 한성 방어를 위해 주교도청(舟橋都廳)·훈련도감 좌별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순무영천총(巡撫營千摠)으로 선봉이 되어 10월 1일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입성하여 진을 쳤다. 10월 3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분견대 160명이 정족산성을 공격해오자 매복작전으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혀 적을 격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으며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약탈, 방화한 뒤 철수했다. 이 공으로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며 1873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1874년에는 좌포도대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형조판서·금위대장 등을 지냈다.
어재연(魚在淵·1823~1871)) 및 어재순(魚在淳·1826~1871)
어재연은 고종 3년 1866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와 회령부사를 지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로즈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오자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강화도 광성진(廣城鎭에서 적을
물리쳤다.
1871년 1871년 도총관을 제수받아 6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 4월 15일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었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함포사격과 야포사격을 퍼붓고 광성보로 돌입하자 어재연은 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동생 어재순(魚在淳과 함게 전사했다. 어재순은 따로 관직은 없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어재순(魚在淳), 대솔군관(帶率軍官) 이현학(李玄鶴), 어영초관(御營哨官) 유풍로(柳豊魯), 진무영천총(鎭撫營千摠) 김현경(金鉉暻), 광성별장(廣城別將) 박치성(朴致誠) 등 5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미군측도 매키 중위 이하 3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10명이었습니다.

충북도는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있는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의 묘를 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 사진은 어재연(왼쪽)·재순 형제의 묘.
(사진=음성군정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