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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광주(光州)와 목포 유달산(鍮達山)은 영원하리
2016년 9월 24일(토) 16시 50분에 출발하는 KTX 목포행 열차를 타기 위하여 동북고교 동기생 열한명이 용산역 대합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바로 아래 첫번째 사진 앞줄 왼쪽부터 흐시기 서류바 위짜추 히티조 까토나 뒷줄 왼쪽부터 씨모우 또파파 치빠흐 조단스 마두나 무벼대 입니다.
이처럼 많은 인원이 1박 2일 예정으로 아내 곁을 벗어나서 여행하는 것은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구나 나이들도 젊다고 하면은 서러운 칠십대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노객들입니다. 하지만 벗들의 얼굴에는 벌써 기대반 호기심 반으로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몇몇 노객들은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밤잠도 설치었다고 합니다. 대합실에서의 시끄러움이 열차를 오른 후에도 꺼질 줄을 모릅니다. 어르신들 주위분들을 위해서 언성을 조금만 낮추어 달라는 부탁을 승무원으로 부터 듣습니다.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리고는 다시 신나게 떠들면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고등학교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그 시절 그 모습이 재현이 되는가 봅니다. 만나면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집에서는 손주들이 매달리는 할아버지라는 인자하고 근엄한 직함을 잊은채 말입니다. 열차가 광명역 오송 공주 익산을 지나면서 창밖 오른쪽으로는 김제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김제평야는 전라북도 김제시를 중심으로 부안군 완주군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명 김만경평야(金萬頃平野)라고도 불리우며 동진강과 만경강 유역의 충적평야와 침식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의 최대 곡창지대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의 표적지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이며 바람결에 이리 저리 흐느끼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수탈 당하여 끌려간 동료 벼이삭에 대한 한(恨)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탐스로이 꽉 찬 벼이삭들이 황금 들판에 끝없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때 마침 지평선 너머로 빠져들고 있는 황홀한 저녁 노을빛이 이 노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지는 해의 마지막 햇살이 저렇게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나이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송정을 거쳐서 목포역에는 19시 40여분에 도착합니다. 목포역사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몇컷 찍고는 회식 장소로 향합니다. 미리 알아 놓은 민어횟집으로 몇번을 묻고 물어서 찾아갑니다. 목포의 야경은 처음 찾아온 노객들에겐 생각보다 환하게 네온과 조명이 무척 밝게 느껴집니다. 사전에 전화를 하고 들어가니 벌써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기대보다는 비좁고 일반 횟집 모습이지만 서울 횟집처럼 전면에 활어 수족관은 보이지 않습니다. 민어회는 미리 준비한 모양으로 금새 다섯 접시가 나옵니다. 밑에는 양배추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민어회를 얹은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던 민어의 부레는 보이지 않고 배바지와 껍데기만 추가로 올라옵니다. 싫은 소리를 몇마디 뱉어내므로 하여 몇조각 시늉만 냅니다. 횟감 자체는 맛이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괜찮은 느낌입니다. 또파파 사모께서 보내준 백두산 들쭉술과 쐬주 맥주의 잔이 권주가에 부딫치면서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마사지합니다. 말초혈관까지 스며든 알콜의 향기는 몸과 마음을 한껏 기분좋은 경지로 끌어 올립니다. 이제 시각이 21시 30여분에 지나고 발걸음은 유달산 야간 산행으로 향합니다. 유달산 입구에 해발 60m에 있는 노적봉이 노적을 벗어 던지기라도 하면서 온몸으로 반기고 있는 느낌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눈을 속이려고 이순신장군이 이 봉우리에 이엉을 씌워 놓았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군량미가 충분하고 군졸도 엄청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인작전이기도 합니다. 몇명의 지기들을 뒤로 하고 컴컴한 유달산 등산로로 올라섭니다. 목포시의 대명사이기도 한 유달산은 해발 228m의 나즈막한 산입니다. 하지만 층층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개골산(皆骨山)으로도 불리는 산세는 생각보다 험하게 느껴집니다.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고도 하며,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마치 놋쇠가 녹아 내리는 색갈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구 한말 이후에는 유달산(儒達山)으로 표기 되기도 합니다. 산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등산로는 대부분 돌계단 뿐입니다. 밤 열한시가 가까운 시각에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목포 시가지는 한마디로 한폭의 그림입니다. 다도해를 배경으로 둘러 쌓인 모습이 휘황스런 색색의 불빛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달산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 선비를 세명의 처녀가 짝사랑하며 숫처녀들은 애간장을 끓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세 처녀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개의 섬이 되어 환생을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삼학도이며 저 멀리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는 불빛은 한 맺힌 처녀들의 눈물인가 합니다. 이 밤도 삼학도 처녀 원혼(怨魂)들은 잠 못 들어 유달산 주위를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산 중턱에는 목포의 애국가라고도 할수 있는 이난영(李蘭影)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비추이는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이라는 가사가 노객들의 목청을 흔들고있습니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이며 1916년도에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초가집에서 태여납니다. 아버지는 허구헌날 술로 세월을 보내는 술주정꾼으로 가정은 찢어질대로 가난의 연속입니다. 참다 못 한 어머니가 제주의 가정부로 일하러 떠납니다. 10세의 어린 소녀 난영이는 다니던 보통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어머니에게로 찾아갑니다. 그 곳에서 주인의 소개로 레코드사의 사장의 눈에 띄여 가수로서의 발탁이 됩니다. 일제의 탄압과 핍박은 최고조에 달하고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와 민족혼은 파괴될대로 파괴되고 찢어지고 고갈되어 갑니다. 향토색이 있으며 민족 정서 고취에 부합하는 가요 가사 공모를 모모(某某) 신문사에서 합니다. 입선된 가사 작품에 손목인에 의해 곡을 붙여서 목포의 눈물이 탄생됩니다. 이 곡을 십대 후반의 나이에 이난영 특유의 비음(鼻音)으로 경쾌하면서도 가슴에 저며드는 애잔한 슬픔의 노래가 가왕(歌王)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오빠인 이봉룡도 당대의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습니다.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와 남인수가 불러서 지금까지도 불후의 가요인 "낙화유수"도 오빠 이봉룡의 작품입니다. 작곡가 김해송과 스무살에 결혼하여 태여난 딸과 아들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60년대에 활약한 최초의 걸그룹인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가 바로 이난영 김해송 부부의 자녀들입니다. 남편도 작곡가이며 무대의 귀재로도 불리웁니다. 6.25 동란에 남편을 잃고 외로움에 지친 홀로된 몸인 이난영에게 동료이자 두살 연하인 남인수가 다가와서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줍니다. 남인수는 경상도 진주 태생으로 본명은 최창수이며 어린 시절을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보냅니다. 이난영과 남인수는 지금처럼 물과 기름으로 껄끄러운 지방색이 없는 영호남의 남과 녀가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더불어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며 일제의 핍박과 굶주림에 떨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구세주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시요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 " 애수의 소야곡은 당대의 가요 황제로 등극한 남인수의 대표곡이자 조국을 빼앗긴 국민들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하여 읊은 노래이기도 합니다. 미남(美男)에다가 100백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는 정도의 미성(美聲)의 소유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애절하개 퍼져나오는 가사는 실의에 빠져있는 한민족의 심금을 울려 놓습니다. 그 누가 천재는 단명(短命)한다고 했던가, 40대 중반 나이에 이난영의 제2의 연인이자 사실혼 관계인 남편 남인수 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두번씩이나 사랑하는 남편과 연인을 잃은 마음의 고통은 나약한 여인네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절망 그 자체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난영이라는 여인에게는 불멸(不滅)의 가왕(歌王)이라는 타이틀도 명예도 사랑을 잃어 버린 세상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했나 봅니다. 오십이라는 불꽃 같은 나이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늘 나라로 훌쩍 떠났으니 말입니다. 김해송의 아내이며 김씨스터즈의 엄마이며 마지막 연인인 남인수의 부인이기도 한 이난영이라는 여인은 갔습니다. 목포 앞바다의 거칠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깨여지고 흩어져도 부서짐이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넘어가는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그녀의 생음악 그 목소리는 들을 수 없으며 가녀린 그녀의 모습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오천만 국민의 가슴 속에는 살아 있으며 애창곡으로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밤 낮이 바뀌고 목포 앞바다에 해일(海溢)과 태풍이 몰아치며 춘하추동 사계절은 바뀌어도 목포 유달산에는 그녀의 혼(魂)이 영원히 서려 있으리라 믿습니다. " 목 ~포에 ~ 에 ~서~어~얼으~음 "을 흥얼 거리며 컴컴한 산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목포시가지로 향합니다. 앞서 숙소에 도착한 백년지기들과 동화를 하며 택시에 몸을 싣습니다. 숙소인 호텔 이름을 기사에게 알려 주어도 확실한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바닷가 평화공원 앞에 자리한 T 호텔은 신축건물이라 아직 생소한 모양입니다. VIP ROOM 두개에 알아서 각자 배낭을 풀어 놓고 아쉬운 알콜 농도를 CAN 맥주로 보충합니다. 자정을 넘긴지 오래이며 새벽 두시가 다가 옵니다. 내일을 위하여 자기만의 잠자리를 챙기고 코를 골아대는 친구도 있습니다. 아침 여섯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나서 설치며 샤워로 세수로 양치질로 부산을 떱니다. 노인네들이라 역시 잠도 없으려니와 아침에 일렁이는 파도소리가 그리웁기도 했나봅니다. 평화공원 앞에 펼쳐지는 파아란 망망대해 앞에 심호흡을 하니 온 세상이 내 가슴에 빨려들어 오는 상쾌함입니다. 어제 마신 알콜의 해독을 위하여 문어라면을 찾아 헤매보았으나 헛걸음 뿐입니다. 곰탕집으로 열한명이 몰려 들어가니 주방장 혼자서 손놀림이 바빠집니다. 담백한 곰탕에 덧 붙인 한잔의 막걸리가 삭막한 위장의 속을 다소곳이 달래주는 기분입니다. 냉육수 국물도 몇잔 들이키곤 콜택시에 네명 네명 세명이 나뉘어 오릅니다. 목포하면 빠질수 없는 삼학도를 밟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앞에서 하차를 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삼학도라는 섬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바다 건너편에 목포항 국제여객 터미널이 보이며 바로 앞에는 삼학도 세관 초소와 어린이 체험관이 있습니다. 오른쪽에 삼학도라는 플랑카드를 봅니다. 길손에게 물으니 이곳이 삼학도이며 이제는 섬이 아닌 육지와 연결이 된것이라 합니다. 한껏 부플었던 삼학도에 대한 기대가 순간적으로 실망감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세개의 섬이었던 삼학도 외곽 둘레길을 도로로 육지와 연결해 놓은 것입니다. 이난영 공원과 삼학도 공원으로 재정비해 놓은 모습입니다. 끝내 사랑의 미완성으로 삼학도가 되어버린 세명의 아가씨들의 한숨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들의 원혼(怨魂)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려고 육지와 연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짝사랑의 그림자가 있는 유달산도 오르내릴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눈 앞에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시퍼런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랑의 기쁨은 한 순간이며 못 다한 사랑의 슬픔은 영원한 것인가 봅니다. 스며드는 바닷바람의 향기를 뒤로 하고 10시 15분에 출발하는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기 위하여 택시로 서둘러 이동합니다. 빛고을 광주(光州)하면 예전에는 무등산이 연상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5.18이라는 숫자가 가슴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망월동의 국립 5.18 민주 묘역은 짧은 스케쥴로 다음 기회로 미루고 5.18 기념공원으로 달려갑니다. 생각보다 자그마하고 조촐한 모습에 다소 실망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조각상 앞에서 묵념과 헌화 대신 마음으로 전하고 동료들과 기념샷을 담습니다. 내려 쪼이는 따가운 햇살에 터져 나오는 5.18 절규(絶叫)의 몸부림이 회오리가 되어 무뎌진 노객의 가슴을 뜨겁게 휘감고 있습니다. 금남로 카톨릭회관 앞에서 하차를 합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지금으로 부터 사십여년 전에 U라는 외자 제약회사에 근무했습니다. 그 때 나의 아들 딸의 나이가 네살 두살이었으며 지금은 모두 사십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회사 사무실이 금남로 카톨릭회관 옆에 있었으며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제는 5.18 민주화 운동의 핏빛의 거리이며 민주투사들의 거리이고 민주화의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금남로입니다. 그 끝에 있던 옛 도청 모습도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그 당시의 사무실을 연상하며 올려다 보는 노객의 마음은 착잡함과 아쉬움으로 가슴을 흔들어 놓습니다. 금남로 도로변의 건물들의 옛 모습은 거의 바뀌어 버렸으나 도로 그 자체에서 풍기는 정경은 그대로 입니다. 분수가 치솟고 있는 도청 앞에는 사물패들의 공연이 시선을 잡습니다. 며칠 후에 있을 충장로 축제를 위한 연습 공연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옛 도청 건물은 거의 변함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12.12 사태 신군부 진압군에 포위되어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버린 왼딴 섬의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걸쳐서 민주화 항쟁은 계속됩니다. 신군부 퇴진과 민정이양을 하라는 광주와 전남도민들의 부르짖음이 아직도 귓청을 때리고 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위기를 느낀 신군부 세력들은 군부대를 앞세워 무자비한 총칼로 진압하여 수백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희생됩니다. 아직도 많은 투사들의 생사여부가 불투명한채 실종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정의감에 북받친 그들의 진정한 민주화의 염원은 12.12 신군부의 구둣발에 짓밟혀 미완성으로 끝났습니다. 헌법을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독재와 폭압으로 온 국민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 넣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한 인간은 불법과 부정으로 축재한 자금에추징금 수천억원을 내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하지만 몇십만 밖에 없다고 통장을 흔들어 대는 그 모습에서 불쌍한 마음과 측은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평생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총칼을 절도있게 때 맞추어 흔들어서 일국의 최고 지도자까지 거치신 분인데 말입니다. 지금 한창 존립 여부로 할머니들의 가슴을 뒤집어 놓고 있는 소녀상이 생각됩니다. 그런 소녀상처럼 그의 집 골목 입구에 총칼을 흔들고 있는 군인의 조각상을 세웠으면 하는데 국민의 여론은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아울러서 조각상에 커다란 호주머니를 부착했으면 합니다. 평생을 나라를 지키느라고 고생만 했는데도 추징금도 못 내고 이렇게 몇 십만원 뿐인 군인들을 돕는 모금함도 부착했으면 합니다. 총칼로 권력을 거머쥔 시조(始祖)는 이씨조선의 이성계이며 다음은 5.16 쿠데타와 12.12 신군부들의 총칼로 뒤를 이었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5.18 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인공도 없으며 아직까지 진정한 사과 한 마디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5.18 민주 항쟁을 기념하는 식장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이냐 제창이냐를 놓고 따지고 있는 볼썽사나운 장면도 터지곤 합니다. 몇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변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한강다리가 끊기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지하철에 불이 나고 배가 뒤집혀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해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으며 나몰라라 하는 무책임의 연속입니다.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재앙과 재난이 터지고 국민들의 생존의 위협이 생겨도 국민들 각자가 알아서 행동해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룬것도 같습니다. 도청을 빠져 나와 심장에서 곡소리를 내는 울분을 힘겹게 추스려야 합니다. 허기지는 백년지기 노객들의 오찬 장소로 찾아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찾아간 광주일고 앞에 있는 한정식집은 손님으로 한참을 밖에서 기다려 한답니다. 교정으로 들어서니 고등학생들의 야구 연습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쪽에는 광주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마음을 이끌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10월 30일 저녁 다섯시 30분경에 광주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합니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는 광주여자보통학교 여학생 세명의 댕기머리를 일본 남학생이 잡아 당기며 조롱과 모욕적인 말을 뱉습니다. 여학생의 사촌 동생 광주보통학교 남학생이 이들과 언쟁이 시작되 패싸움으로 번집니다. 이를 계기로 광주학생들이 11워 3일 총궐기에 나섭니다. 6.10 만세운동 이후에 식민노예 철폐, 조선어 사용 , 독립운동으로 학생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의 계기가 됩니다. 일본학생과 조선학생과의 빈번한 충돌로 일제의 탄압과 조선 말살정책은 극에 달합니다. 독립 후에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정하고 학생의 날로도 불리웁니다. 조선의 어린 학생들의 빼앗긴 조국에 대한 불타는 애국심과 독립을 향한 신념을 읽을 수 있는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경각심을 불어 넣는 경종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정을 나와서 한정식집으로 들어갑니다. 1인분에 2만원이라는 식사 메뉴는 상다리가 휘도록 갖은 반찬들이 서울 노객들의 눈을 휘둥글게 합니다. 활어회 멍게 소꼬리수육 가재미 전족 인삼뿌리 은행 밤 된장찌개 굴비구이 장어조림 명이나물 홍어삼합 미역줄기 버섯무침 등등 기억키도 어려울 만큼의 반찬들이 식탁이 좁아서 겹치게 쌓여 있습니다. 진수성찬이 바로 이런 상차림을 두고 하는가 봅니다. 서울에서의 오육만원 하는 호텔식 메뉴보다도 우리들 입맛에 딱 맞고 푸짐한 오찬을 쐬주 한잔을 곁들여서 권주가의 합창이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겉으로보기에는 허름한 한옥이며 다닥 다닥 붙은 방마다 식객들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집입니다. 지난 밤에 어설펐던 민어회에 대한 아쉬움을 일거에 날려 버립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금남로 5가에서 전철을 타고 광주송정역으로 이동합니다. 오후 네시 오십분발 서울 용산행 KTX를 타야합니다. 용산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여섯시 삼십여분으로 아쉬움의 이별주를 위하여 길 건너에 있는 중식당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쐬주와 맥주를 삼선 술국과 삼선짬뽕 삼선간짜장을 곁들여 권주가의 합창에 맞춰서 1박 2일간의 짧은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누구랄것 없이 홀가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나처럼 전철에 몸을 맡기고 각자의 원(源) 위치로 향합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어디를 다녀 보아도 곳곳이 모두가 암울한 역사의 흔적들이 널려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파싸움으로 인한 누명으로 억울한 삶을 마감한 충신들의 애닮픔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온 백성이 식민노예로 인간 이하의 폭압으로 한민족의 혼을 말살시키는 만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국토의 모든 곳이 수탈과 정기를 끊어 놓은 흔적들 뿐 아니라 매국노들의 광기어린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군사독재의 서슬퍼린 폭정이 또 다시 국민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인권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를 당합니다. 이런 과정을 온 몸으로 시달리고 짓밟혀도 한민족의 끗끗하고 끈질긴 운명으로 극복하면서 오늘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보다 더 혹독하고 거센 폭압과 총칼이 춤을 춘다해도, 한국민의 끈질긴 고유한 전통과 정서는 심장을 타고 자자손손 온 몸에 흐를 것입니다. 그 속에 빛고을 광주(光州)가 있으며 목포의 유달산(鍮達山)도 영원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어깨를 맞대고 함께 한 이부춘 임철남 한태종 주상수 윤석팔 문병수 김종운 최길호 김흥식 박현규 그리고 나 열한명 모두에게 감사 드리며 다음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16년 10월 1일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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