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안개 낀 장충단공원
내가 꼽는 노래방 3대 꼴불견은 18번 하나 없어 차례가 돌아오면 동료에게 ‘나 뭐 부를까?’ 하고 묻는 사람과 모처럼 돌아온 차례에 한곡 하는데 예비마이크잡고 더 큰 목소리로 끼어드는 사람, 그리고 끝내 빼다가 한곡도 못하고 집에 갈 때 삐치는 사람이다.
물론 나에게는 18번이 있다. 차례가 돌아오면 옆 사람에게 뭐 부를까 하고 묻지 않아도 되고 화면을 보지 않고도 2절 가사까지 꿰고 있다. 괜히 빼다가 한 곡도 못하고 삐치는 성격도 아니다. 간주가락을 흥얼거릴 줄도 알고 자다가 일어나도 음정을 고를 수 있는 나의 18번은 배 호 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다.
그런데 나는 장충단공원을 아직 가보지 못했다. 서울근무를 할 때에 공원입구를 몇 차례 지나치기도 했지만 장충단공원은 내 상상속의 공원으로 남겨두고 싶어 가지 않았다. 아니 그 보다 안개 한줌 없고 낙엽 한 잎 없는 공원의 맨얼굴을 보게 될까 두려웠던 게 더 큰 이유일 것 같다. 그래서 내 18번속의 공원은 언제나 자욱한 안개에 묻혀있으며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리고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입은 초라한 사내가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흐느끼고 있다. 그렇게 감정을 잡아 한 곡조 뽑으면 제법 구성지게 넘어간다.
그때는 그랬다.
197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고 편안한 특급열차 ‘새마을’호를 타고 한강철교를 건널 무렵이면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가 객실 안에 울려 퍼졌었다. 사람들은 약간은 거만한 자세로 기지개를 켜고 선반위의 짐을 챙긴다. 그리고 읽다가만 ‘선데이 서울’을 말아 쥐고 내릴 채비를 서두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좇아 왔다가 절망을 안고 돌아섰던 서울역 광장에 내려서면 이마에 갑을(甲乙)이라는 커다란 이름표를 붙이고 우뚝 선 사옥(社屋)이 있었다. ‘갑을’은 섬유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대구에 본사를 두고 서울로 진출한 방직(紡織)회사였다. 말하자면 대구 ‘촌놈’이 서울역전을 접수한 것이다. 내 빌딩도 내 회사도 아닌데 서울역 광장에 내려설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을 쓱 내밀게 했던 갑을이다.
나는 ‘개그콘서트’를 즐겨본다. 때로는 웃음을 이끌어 내기위해 오버하는 엑션과 유치한 연출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의 재치와 유머는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 같기도 하다. 일요일 저녁이면 고등학교 1학년 막내아들과 함께 TV앞에서 낄낄대곤 한다. 아내는 ‘부전자전’이라며 ‘수준’좀 높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는데 ‘막장드라마’보다는 한 수준 위라고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바람에 곤경에 처해지기도 한다. ‘네가지’와 ‘두분토론’코너가 우리부자의 수준을 한심하게 만들더니 지금은 ‘민상토론’이 그 대를 잇고 있다. 상대방의 말실수나 꼬투리를 잡아 논리를 비약시키는 재치로 요즘정치판을 여과 없이 풍자하고 있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있다. 민상토론 의 사회자와 같이 생각은 럭비공처럼 튀어 갑을방직회사가 ‘갑질 을질’로 논리를 비약 시킨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공자(孔子)에게 예(禮)를 물었다. 공자가 답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군군신신부부자자)’고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사회생활은 공동체의 생활이다. 이웃은 이웃다워야 한다. 이웃이 이웃다울 때 층간소음으로 얼굴 붉힐 일이 없어진다. 이웃다운 이웃으로 사는 것도 어렵고 이웃다운 이웃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도 사장은 사장답고 부장은 부장답고 과장은 과장답고 사원은 사원다워야 한다. 한때 ‘회사를 내 집처럼! 사원을 가족처럼!’하는 슬로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과연 사원이 회사를 내 집같이 생각하고 사장이 사원을 가족같이 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회사의 상(像)일까? 엄연히 사장은 갑이고 사원은 을이다. 을 속에서도 부장은 갑이고 과장은 을이다. 사원 앞에서는 과장은 또 갑이 된다. 이렇게 수많은 갑과 을이 씨줄과 날줄같이 얽히어 천을 짜듯이 회사가 되고 사회가 되고 나라가 되는 것이다. 갑은 갑다워야 하고 을은 을다워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갑은 ‘갑 질’을 해야 하고 을은 ‘을 질’을 해야 한다. 어느 항공회사의 부사장 같은 갑 질이 아니고 갑다운 갑 질을 해야 한다.
‘새마을’호가 한강철교를 지나 서울로 입성(入城)할 때 객실 안에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지던 그 시대에 화장품(化粧品)산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노래하였다. 화장품산업의 전성기는 방문판매(訪門販賣)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회사는 지역을 분할하여 대리점(도매상)을 두었고 대리점에서는 처음에는 외무사원(外務社員)이라고 했던 판매사원을 고용하였다. 당연히 회사는 갑(甲)이었고 대리점은 을(乙)이었다. 약정서(約定書)에도 회사를 ‘이하 갑이라 칭 한다’로, 대리점을 ‘이하 을이라 칭 한다’라고 하였다. 갑에 관한 조항은 ‘한다’와 ‘할 수 있다’가 대부분이고 을에 관한 조항은 ‘해서는 안 된다’와 ‘할 수 없다’가 대부분 이었다. 자기지역이 아닌 곳에 판매를 하거나 정찰가격(正札價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약정해지(約定解止)의 가장 큰 사유가 되었다. 이는 판매사원에게도 꼭 같이 적용되었다. 이 경우에는 대리점이 갑이 되고 판매사원이 을이 된다. 아마도 방문판매만큼 적극적인 판매방식은 없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 살리기의 어젠다 인 ‘창조경제’의 원조이다. 소비자를 찾아가서 수요(需要)를 창조하는 ‘창조판매’인 것이다. 거기다가 소도 잡아먹는다는 외상판매이다. 이렇게 갑의 갑다운 갑 질이 조화를 이룬 방문판매로 화장품산업은 공정거래법이라는 슈퍼 갑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는 일본식의 비좁은 방에서 거칠고 드센 미국여자를 아내로 맞아 맛없는 영국요리를 먹고사는 남자라고 한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영국식의 넓은 집에서 나긋나긋한 일본여자와 살면서 맛있는 불란서요리를 먹고사는 남자라고 한다.
왕년에 화장품회사에서 갑 질 깨나한 이들이 이사육팔장으로 나가는 짝수 달에 모여 삼십년도 훨씬 넘게 갑 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일본식처럼 비좁지는 않지만 영국식처럼 드넓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집에서 미국여자처럼 거칠고 드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본여자처럼 나긋나긋 하지도 않은 평범한 한국여자와 살면서 들안 길 용지봉(龍池峯)의 명품요리를 즐기며 주선(酒仙)이라도 된 듯 호기로운 그들이 결코 불행한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갑들(손님들)을 상대로 을 질로 분주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김(金壽鎭)사장이 2차 노래방 쏜다고 갑 질이다. 거기에는 18번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어 나 뭐 부를까 하고 묻는 사람도 없고 예비마이크잡고 끼어들기 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빼다가 삐치는 사람은 더더구나 없다. 지금까지 집에 갈 때 삐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나는 또 눈을 지그시 감고 ‘장충단 공원(獎忠壇公園)’으로 갈 것이다. 떨어져 쌓인 낙엽위로 안개가 자욱이 내리고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입은 초라한 사내가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흐느끼고 있을 내 상상속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2015.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