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읍 소재지에서 호골산 능선인 유록재를 넘으면 긴 골짜기가 나오는데, 흥해배씨들의 집성촌인 유록呦鹿마을이다. 마을중심부를 찾아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 산 밑에 정자인 듯한 비각이 보이는데 임진왜란 시 순국한 배인길 장군 내외를 기리는 쌍절려雙絶閭이다. 배인길裵寅吉(1570- 1592)은 본관이 흥해興海이며, 자는 경보敬甫이고, 참봉을 지낸 유산儒山 배삼근裵三根의 아들이다. 체격이 당당하고 뜻과 기백이 씩씩하여 활을 쏘면 과녁을 뚫고, 힘이 소牛 7마리를 나란히 세워놓고 뛰어 넘을 수 있었으니 사람들이 장수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1592년 6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단군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 중에 가장 처참한 일대 사건으로,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웃 나라를 침범한 왜군은 새로운 무기와 훈련된 군사들을 앞세워 영남지방을 시작으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살상하고 전 국토를 약탈하였다. 왜군이 소총과 신무기를 통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곳마다 조선의 백성들과 관군들이 항거 하였지만, 여기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와 같은 위급한 때에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나라를 구하고자 22세의 배인길은 왜적에 당당하게 대적하여 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월성이씨月城李氏와 혼인한 지 채 몇 달이 되지도 않았는데,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전장 터로 나갔다. 공이 분연히 부친께 아뢰기를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가 난리로 이리도 위급하니 지금이 그때이옵니다. 이 몸이 한낱 선비에 불과하나 적군이 쳐들어옴을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리오?”라며 부인에게는 “사나이가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으러 나가니, 신혼이라 이별함을 그대는 너무 슬퍼하지 마오.”라 하며 종형인 내한內翰 배용길裵龍吉(1556~1609, 사마시 문과급제)과 함께 당시 예안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1562~1624)의 군진으로 들어가 경상도 예천 용궁전투에 참여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의기가 넘쳤던 공은 도망가는 쇠잔한 아군들을 보고 “내 오늘 죽기를 결심했다, 죽을 바엔 떳떳이 죽으리라. 날짐승처럼 흩어지면 장부가 아니다!”라며 말을 몰아 적진으로 홀로 달려가니, 우군은 모두 공의 용맹한 행동에 두려움을 떨쳐내고 함께 전쟁에 참여 하였다.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분연히 칼을 뽑아 왜군 수십 명을 베며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적군 속에서 창과 화살이 다하고 마침내 최후의 순간까지 대항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겨우 22세에 불과했으니 참으로 고금에 드문 장부丈夫라 칭송 할만하다. 부친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픔을 억누르며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할 줄 짐작한 바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이 아이의 뜻이다. 내 어찌 흐느끼겠느냐?”라며 아들의 죽음에 초연하였고, 부인 월성이씨는 “군신의 의가 중하니 부부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라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절개를 지켜 손가락을 깨물어 명주 수건에 혈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남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아내는 천고의 절개를 지킨 것이니, 만고에 길이 남을 쌍절雙節이요 절개라 일컬을 만하다. 적이 물러가자 전장에서 찢기고 잘려진 시체는 산과 강을 덮었는데, 종형 배용길이 공의 시신을 찾으려 백방으로 살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봉화 호골산虎崖山 서쪽 자락에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은 ‘의사총義士冢’이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공은 조정에서 봉록을 받은 관리도 아니고 징발을 명령받은 군인도 아닌 한낱 작은 마을의 선비일 뿐이었지만 국운의 위태로움을 보고 일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적진으로 나아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으나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는 알려지지 못한 채 한낱 지역의 슬픈 이야기로 전해 오다가 1817년(순조 10)에 영남사림의 상소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포상과 은전으로 정려旌閭를 내렸다. 사람들은 이곳을 오가며 부부의 충절과 절개를 추앙하고 있으며 60년마다 찾아오는 임진년 6월에 자손들과 인근 문중과 유림들이 모여 「임란순절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그의 직계 후손인 흥해 배씨 유산공파에서도 공이 살던 마을 산자락에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추원사追遠祠를 건립하고 그의 무덤을 관리하며 매년 구월 하정일마다 예를 갖추어 향례를 올리고 있다. 려각閭閣 안의 정려기는 호곡 류범휴壺谷 柳範休가 쓰고, 상량문은 갈천 김희주葛川 金熙周가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