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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의 언저리에서
-신일철 선생님과 프랑스 구조주의 강의
홍 은영
인연의 흔적들
선생님 평전 출간을 앞두고 작은 글을 쓰기 위해 거실을 서성일 무렵, 저녁 햇살이 반쯤 창턱에 걸쳐 오후의 끝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해가 뜨고 지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반복을 되풀이한다. 아침을, 오후를, 저녁을 맞이하다가 그 끄트머리에선 이내 밤이 찾아온다. 그래서 시간은 차갑고 냉정하다 못해 무심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마음속에 남아 깊은 추억으로 자리한다는 것...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걸까?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특히 그리움으로 남아 불현듯 가슴 언저리를 맴돌 때는 그 기억은 아련한 슬픔이 되어 먼 길을 되돌아온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려고 첫발을 내디딘, 이제는 30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나의 젊은 시절에 시작된 신일철 선생님과의 인연은 무수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많은 기억들이 어제 저녁의 일상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학부시절, 서양 철학사, 지식의 문제, 사회철학, 역사철학, 현대 철학사상 등 선생님의 강의로 수강신청을 마무리했던 그 무렵...선생님은 늘 커다란 가죽가방을 한손에 가볍게 드시고 또 다른 손에는 갓 뿜어낸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와 늘 함께 하셨다. 커다란 가죽가방은 멀찌감치 에서 보아도 내겐 꽤 무거워 보였지만 선생님의 듬직하고 커다란 손안에서는 왠지 가볍게 보였다. 아마도 선생님의 건장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풍채가 그렇게 보이게 했던 것 같다. 중앙도서관 앞길을 지나 대학원 건물 앞을 지나실 무렵에 종종 뵙곤 했는데 한손에 든 담배를 입에 무시며 잠시 길을 멈춰 인사를 받으시곤 미소를 띠시고 무심한 듯 보이는 발걸음을 시계탑 건물을 향해 옮기셨다. “자네 요즘은 무슨 책을 보나? 공부는 잘 되는가?”라는 말로 나에 대한 안부를 대신하시고는. 선생님은 아마도 큰 의미 없이 하신 질문이었을 텐데 당시 선생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이 싹틀 무렵이어서인지 내겐 진지하게 다가왔다. ‘그래 내가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요즘 무얼 하고 있는 게지?’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사로 재직하던 시절, 공부를 하기위해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그것도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2002년 당시 선생님은 다른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서유럽을 다니러 오셨다가 파리에도 들르셨다. 반가운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어오신 선생님은 묵고 계신 호텔부근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늘 그러하듯이 따뜻하고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아주시던 선생님은 식사를 하시며 내내 변화하는 한국정세와 북한에 관한 이야기 등 한국 통신원보다도 더 자세하게 논평까지 덧붙여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프랑스가 아닌 서울 중심에 앉아 저녁을 보내고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식사가 끝난 뒤 저녁식사를 계산하려고 내가 계산서를 가져가자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며 당신의 지갑을 내게 내보이셨다. 이렇게 돈이 충분하니 걱정 말라시며 부지런히 계산대로 가셔서 지불하고 나오셨다. 다른 선생님들과의 스케줄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오신 선생님께 조금이나마 감사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대접해드리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만류에 내 소박한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웃으시며 지갑을 꺼내 보이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그러나 이젠 그 모습을 뵈올 길이 없으니...마음 한편이 서늘하게 아려온다...
당시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하신 선생님은 아마도 여행지에서 ‘오줌 누는 어린아이’ 동상을 인상 깊게 보시고 그 미니어처를 사고 싶으셨는데 못사셨는지 그 아쉬움을 내가 보낸 안부메일에 답장으로 남기셨다...
보낸사람: 신일철 <shin@ybmsisa.co.kr> 02.02.26 12:42 주소추가 수신차단
받는사람 : "hong eunyoung" <dlsdlf@hanmail.net> 주소추가
보낸날짜 : 2002년 2월 26일 화요일, 12시 42분 17초 +0900
메일 내용 : 월요일 아침에 나와 열어보니 반가운 편지가 와 있었음니다. 한번만 만난 것이 못내 아쉬워집니다. 부랏셀 여행도 인상적이었고 특히 도시의 옛 거리에 어린애 오줌누는 석상이 인상적이 었음니다. 그 미니상을 파는데 하나 사오는 것을 노쳐 언제 다시 부락셀 갈 기약도 없고, 구할 길 있으면 하나 보내주기 바랍니다.
서울 오면 곡 연락 해 주기를. 일행이 조선족 이야기를 흥미 있어 했는데 몇 명 정도라고 했는지 다시 알려주기 바랍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신일철
며칠 뒤 편안히 귀국하셨는지를 묻는 나의 메일에 선생님은, 최근에 쓰신 <‘정치적 인간’의 복권과 공공권>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심심풀이로 읽으라며 내게 보내오셨다. ‘심심풀이’라는 선생님의 표현이 재미있어 혼자 웃으며 글을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 한 켠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Re: 홍 은영 입니다
보낸 사람: 신일철 <shin@ybmsisa.co.kr> 02.03.09 15:52 주소추가 수신차단 받는 사람: "hong eunyoung" <dlsdlf@hanmail.net> 주소추가
보낸 날짜 : 2002년 3월 09일 토요일, 15시 52분 52초 +0900
첨부파일 1개가 있습니다. 바로가기
일반 첨부파일 1개(50KB) 정치적 인간.hwp “정치적 인간”의 복권과 공공권
메일 내용: 홍 은영 씨에게, 심심풀이로 보내드립니다.
----- Original Message -----
From: "hong eunyoung" <dlsdlf@hanmail.net>
To: <shin@ybmsisa.co.kr>
Sent: Sunday, February 24, 2002 5:24 AM
Subject: 홍 은영 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가셔서 그 흔적을 뵈올 길은 없지만, 아직도 내 마음과 기억 속에 깊게 자리 잡아 추억으로 간직되어 가끔씩은 꺼내 볼 수 있어 행복하다. 지금도 휴대폰 전화목록에 남겨져 있는 선생님의 폰 번호 ‘011-264-1447’은 마지막까지 내가 지울 수 없는 선생님의 흔적이기에 오늘도 오롯이 남아 내 폰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물론 가끔씩 내가 사는 공간에 전화벨이 울리기를 애잔하게 기대하지만...
선생님은 시간이 나시거나 새로운 책을 출간하게 되실 때 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셨을 때면,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던 이유선 박사와 나를 부르셔서 이야기를 하시는 걸 즐겨하셨다. 종로 2가 뒷골목의 꼬리곰탕집이며 갈비탕 집...그리고 그토록 즐겨 가시던 커피 집....이젠 그 하나하나의 흔적들이 추억이 되어 내 마음속에 새로운 둥지를 튼 듯하다.
선생님과 프랑스 구조주의 강의
오늘은 30여 년 전 문과대 시계탑 건물에서 ‘현대 철학사상 입문’ 강좌 시간에 프랑스 구조주의를 강의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 때의 모습을 가져 오려고 한다. ‘현대 철학사상 입문’ 수업이 무르익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등의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강의가 끝나고, 중간고사 이후 즈음에 프랑스 구조주의 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나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쏟아 내시는 선생님의 강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앞자리에 앉았다. 늘 그러하듯이 많은 지식 내용을 전달하시느라 애쓰셨던 선생님의 강의 속도를 따라 필기를 하려면 사실 엄청난 내공이 필요했다. 빠른 속도로 숙지해야함은 물론 필기 정리 능력도 어지간해서는 내용을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강의를 시작하시기 전, 선생님은 늘 내 자리로 다가와 필기내용을 보시며 다음 진행할 부분을 확인하시곤 하셨다. “내가 그렇게 많은 양을 강의했나?”
당시 새로이 개설된 ‘현대철학사상 입문’이라는 강좌는 교양과목이긴 했지만 난이도가 꽤 높은 강좌여서 철학과 고학년이나 다른 과 학생 가운데서도 철학 매니아들이 듣곤 했던 수업이었다. 이 강좌에서 특히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시켰던 부분은 프랑스 구조주의에 관한 내용이었다.
작년 2학기엔가 철학과에서 개설하는 ‘특정학파의 철학연구’라는 과목을 우연치 않게 맡아 강의하게 되었는데, 학생들이 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 두 주 정도를 할애해 구조주의의 배경과 흐름 및 영향에 대한 강의를 했다. 당시 내게 놀라왔던 것은 나는 이미 30여 년 전에 선생님의 교양강좌를 통해 현대 철학사조로서 구조주의에 대한 대략적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철학과 전공수업에서 졸업을 앞둔 철학과 학생들이 구조주의에 대해 처음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현대 철학사조로서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그렇게 일찍 절감하시고 철학수업에 도입하신 선생님의 열정과 예지력은 지금 상황을 비추어 보니 엄청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차 대전 직후 ‘주체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에 대항해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층에 있는 구조가 우리의 사유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소쉬르를 비롯해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등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시며 이후 푸코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서는 어떻게 새롭게 구현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접근하셨다. 훗날 나의 박사 논문 주제가 되기도 했던 푸코의 사상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는 이때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싹을 틔운 셈이다.
당시 선생님은, 구조주의자들이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다루는데 있어서 실존주의나 맑스주의 등이 ‘인간중심주의’의 큰 오류를 범해왔다고 비판한 부분에 주목하셨다. 그들은 모두 제도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라는 이성적 주체가 중심이었다는 인간중심주의를 견지했고, 무엇이든지 인간이 사회와 문화를 인위적으로 개혁도 혁명도 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구조주의자들이 반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구조를 사물들 간에 내재하는 자연적 관계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그 개개의 것들이 어떤 구조를 이루는 ‘차이의 체계’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간중심적 사조와 크게 궤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칸트, 헤겔 등 독일 관념론에 대한 강의가 주류를 이루었던 그 무렵, 프랑스 구조주의에 대한 선생님의 소개는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프랑스 철학을 조금씩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했던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조차 1989년이 지나서야 출판된 것으로 보면 선생님의 소개는 가히 선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다루었던 두 번째 시간에는 애국가의 첫 소절을 예로 들어 스위스의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소쉬르의 언어에 있어서의 구조와 관계에 대한 개념을 재미있게 설명하셨다. 철수가 애국가의 한 소절을 한 옥타브 낮게 부르고 영희가 한 옥타브 높게 불렀다고 할 경우, 그것을 악보로 옮겨보면 철수가 부른 노래의 음역 대와 영희가 부른 노래의 음역 대는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즉 요소 적으로는 두 사람의 노래가 다르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 요소들의 관계인 멜로디는 고음 저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같은 멜로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서 그 구조는 같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 부분을 쉽게 설명하시기 위해 강의실 앞쪽에 앉아있던 두 학생을 일으켜 세우시고는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다. 겸연쩍어 하던 두 남녀학생이 상기된 얼굴로 한 소절을 부르던 모습이 오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언어도 하나의 구조로서 관습의 체계에 속하는 기호 체계임을 강의하시는 도중에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선생님은 칠판에 강아지를 그려 보이시면서 이 모양을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사용하는 ‘강아지’라는 말이나 영어의 ‘dog’라는 말과 닮아 있지 않다고 하시고는 기표와 기의간의 그런 필연적 연관성은 일찌감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소쉬르의 입장을 대변하셨다. 또 쉬운 예로 공산국가에서는 붉은 깃발이 좋아 빨간색이 'go'의 의미를, 청색이 ‘stop'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셨다. 즉, 기호는 그것이 속한 체계 속에서 위치하는 차이의 관계성에서 그 의미가 규정된다고 쉽게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 당시 그런 선생님의 설명 방식에 학생들이 웃음을 보이거나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강의를 15년 이상하며 강단에 서온 나 자신도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때면 유추할 수 있는 쉬운 예가 쉽게 떠오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나 자신이 대학 강의를 하면서 이런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이때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을 주로 다루는 철학의 영역에서는 더욱 더 쉬운 일상의 예를 가져와 설명해야할 때가 많다. 그래야만 학생들은 의아하게 뜬 동그란 눈망울을 알겠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미소로 화답을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어 제 3교시 강의에서는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의 연구로 구조주의의 기초가 확립되었다고 강조하셨다. 그러시면서 우스갯소리로 패션계의 새로운 유행에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조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많다고 하셨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에서 시작된 구조주의적 사고도 프랑스산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학생들로 하여금 일상적으로 기억하기 쉽게 하시느라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 같다.
선생님은 강의에서 구조주의의 구조 개념은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연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하셨는데 1991년도에 프랑스에서 출판된,『구조주의의 역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구조주의라는 학술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프라하학파라고 본다면 당시 선생님의 강조는 우리시대의 현대적 논의를 이미 앞서 선취하셨다고 할 수 있겠다.
선생님은 3교시 강의를 통해 세계 대전 후 극대화된 실존철학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의식과 주체성의 문제가 구조주의에서 증발되거나 소멸되고 있음을 강조하셨다. 따라서 모든 독립적인 개체와 자유 자체로서 여겨지는 의식은 나와 타인이나 타자들 간에 얽혀진 그물구조 속으로 용해된다는 것.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결혼이나 친족의 체계와 구조가 인간이나 사회를 이해하는 기호체계(le code)나 규칙(la regle)으로 등장하지만, 그런 기호 체계나 규칙은 현상학이나 실존철학이 강조하듯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기획에 의하여 의미부여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님에 주목하셨다. 주체가 의미부여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의식에 의하여 의미를 대상에서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는 관계나 구조 속에서 효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관계와 구조 속에서 효과로 드러나는 주체의 위치나 진리의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의 씨앗을 선생님은 이미 당시에 강의를 통해 우리에게 예고해주셨던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로서의 푸코의 위치를 구조주의의 등장을 통해 해명하신 셈이다.
내게 말없이 돌아온 선생님의 책
30년도 넘은 선생님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담긴 낡은 노트를 꺼내드니 교단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시며 열심히 강의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매시간 워낙 많은 양의 내용을 쏟아 부시는 분이시라 팔목이 아플 정도로 필기를 하고 집중을 하지 않으면 그 많은 내용을 소화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선생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언제 한번 휴강하지 않나 학생들끼리 야심차게 기대했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50분 수업을 넘기시기가 일쑤이신 탓에 학생들은 늘 ‘교수님, 시간 지났습니다’를 때때로 외쳐야 했다. 이제 내 나이가 그 때의 선생님의 나이와 비슷한 지점에 서 있는데....과연 내겐 그런 열정과 노력이 있는지 선생님의 그림자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다.
좀 전에 창턱에 내려앉은 저녁 햇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짙은 어둠이 어느새 창밖 거리를 휘덮고 있다. 젊음은 마냥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인줄로만 알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내 얼굴에 편안하게 자리한 성성한 흰머리와 주름은 그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여지없이 예고한다. 30년이 넘어가는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가슴 속에 진한 울림으로 남아 나의 삶 곳곳에서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뵈올 수 있다면 늘 그곳에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련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떨어지는 저녁 해보다 더 클 뿐이다.
어디선가 커피향내가 스며든 듯하여 커피 물을 올렸다. 인스턴트 커피를 꺼내드니 교내에 설치된 자판기 커피를 즐겨 드시던 선생님의 두툼한 손이 눈앞을 그림자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가끔 대학원 건물 일 층을 통과할 때,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기다리다 선생님을 뵈면, 따뜻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권해드리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은 주머니를 뒤적이시면서 여러 알의 동전을 내 손바닥에 건네주시고는 홀연히 가셨다.
이젠 대부분의 학생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교내 구석구석에 자리했던 커피 자판기...지금은 200원으로 인상되었지만 100원을 고수하며 넉넉지 못한 학생들의 후식을 든든히 지켜주었던 커피 자판기는 선생님에게도 편리하게 커피를 제공하는 든든한 녀석이었다. 값비싼 드립커피나 원두커피가 아닌 그저 평범한 커피 향을 내는 값싼 커피였지만 커피를 좋아하시던 선생님께는 또 하나의 편리한 친구였으리라. 그래서인지 자판기 커피는 요란스럽지도 품격을 애써 내세우지도 않으시는 선생님의 소박한 향기를 그대로 닮은 듯하다!
누군가에게 내가 쓴 책을 선물하고 나서, 후일 내가 그 책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건 어떤 경우일까? 그 책에는 내가 남긴 헌사의 흔적이 있기에 내 것임을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오래전에 내가 출간한 책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보게 된 후배가 신일철 선생님을 향한 나의 헌사가 책에 담겨있다며 내게 가져왔다. 의아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15년 전 출간한 책에 헌사를 담아 선생님께 드렸던 책이 고려대학교의 장서가 되어 내가 마주하게 된 것이 아닌가. 책을 받아들고 첫 페이지를 넘기니 내가 써 넣은 글자들이 낯설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부재를 무심하게 내게 알리는 그 책의 존재가 내겐 너무 허망하게 다가왔다.
낯선 친숙함이 존재의 부재 사이에 드러난 빈 틈새를 여지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슬픔, 허전함, 안타까움, 그리고 그리움이 내가 남긴 글들 사이에서 흩어져 내린다...친숙한 글자가 하나의 그림 퍼즐이 되어 10년 전 아니 20년 전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맞추어 나가고 있었다. 아픔에 대한 기억은 생각보다 빨리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마도 아픔을 지워버리고 벗어나려는 생물학적 유전자 코드의 몸부림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안간힘의 흔적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때면 어김없이 몸속 저 밑바닥을 아프게 저며 온다.
내가 선생님께 드린 책 속지에 남긴 몇 개의 글자, 그 친숙한 서체가 점점 낯설게 다가온 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부재를 알리는, 과거에서 달려온 부고장처럼 나를 두드렸기 때문이리라. 선생님의 존재 속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책 속에 내가 남긴 몇 개의 글자가 이제 내 앞에서 나를 무심히 올려다보고 있다. 이젠 저 어두운 도서관 서가의 한 켠에 고려대학교 장서가 되어 돌아온 선생님께 속했던 나의 책....선생님에 대한 애잔한 기억이 온몸을 아프게 감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