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밤새 덫에 뭉개져 있던 쥐를 끄집어낸다 손 끝에 밴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도 죽은 대낮에
커튼을 젖히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암세포만이 몸속에서 꾸준히 자라고 있다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린다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 않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평생 하청 업체에서 일했다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 늘 순탄치 못했다 용접 불꽃과 부딪치며 살아온 그들은 잘못 접합된 쇠처럼 어긋나 있었다
이제는 잘린 손가락이 약속을 쉽게 꺾어버릴 것 같다던 농담마저 우스워진다
팔에 새긴 이름을 긁적일 때마다 몸에서 고기타는 냄새가 난다 욕실에서 혼자 등을 밀다 문득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 나무들도 병을 앓아 꽃에서 고름을 흘릴 것이다
피 흐르는 손목을 쥔 채
덫처럼
아무리 끊으려 해도 질긴 게 있다 말하던 눈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까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며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댄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애프터글로우
신을 배운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보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다
세상 모든 곳이 다 오락이어서
캐릭터들이 죽는데 플레이어가 동전을 계속 넣었다
어느 주말 오후 흰 캔버스를 세우고 멍하니 그리워했다 있는 것들만 죽여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을 웃으며 안았다 손 끝으로 상대방의 생명선을 끝까지 따라가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같이한다는 비극을 믿었다 우리가 금방 죽을 거라 했다
어젯밤 꿈에 눈이 부어서 오늘도 젖은 하루를 살았다 창밖엔 숲 이외의 것들만 조용히 번져서
우리의 기후가 같을까 무서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무 일 없이 골목을 걸었다
와락 쏟아지다 터뜨려지는 파스텔이다
어두운 식탁에 앉아 찬 음식을 오래 씹어야만 하는 나이
무심히 낯선 여름이 굴러가고
두려웠다
지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늘 끝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쓰러질 수 있을까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장마철
정학과 실직을 동시에 치르고도 여름은 온다
터진 수도관에서 녹물이 흐르고 장롱 뒤 도배된 신문지로 곰팡이가 번지다 못해 썩어들어간다 기름때 찌든 환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습기가 자욱하다
깨진 유리병 옆에 버려둔 감자마저 싹을 흘리고 있다 벌겋게 익은 등 근육 위로 욕설을 할퀴고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다가
마주 보던 사람이 떠올라서
밀린 급여라도 받기 위해 진종일 공사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전신주에 기대앉아 신발 밑창으로 흙바닥의 침을 짓이기고 불씨 죽은 드럼통이나 해진 목장갑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구름이 낮다
신입생 시절 교정에 벽보 바르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폭우를 맞은 표정이었다 화난 얼굴로 외치는 시대와 사랑이 고깃집이나 당구장에 널려 있었고 나는 무단횡단할 때보다 용기가 없었다
후미진 신록 아래 들어가는 전축에서 이 지상에 없는 청년이 무심히 젊음을 노래하는데 장송곡을 닮은 우리에게
여름 바람이 불어와 여름을 실어가고 있었다
이제 홀로 뒷골목에 남아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왜 비가 그쳐도 우리의 장마철은 끝나지 않는가 중얼거리며
멍하니 올려다본다
빚을 남긴 동창의 부음을 들은 것처럼 낙향한 주검을 눕혀 두고 어색하게 염을 지키던 친구들처럼, 흰 봉투와 갈라터진 입술의 피와 편육 그리고 아스팔트 위 꺼뜨린 담뱃불처럼
연풍에도 쉬이 스러지는 밤 그늘이었다
너무 오래 비가 왔다
열대야
사랑이 사랑이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