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민왕(恭愍王, 1351~1374)의 자주성 회복운동
가. 시기
14세기 중엽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적극적인 반원활동이 가능했다.
나. 반원정책
⑴ 몽골식의 폐지
몽골식 변발(辮髮)을 풀고 호복(胡服)을 벗었다.
⑵ 부원세력의 숙청
기철, 기륜, 기삼만, 기주 등 부원세력을 처형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다.
⑶ 관제복구
원 간섭으로 격하된 관제를 복구했다.
⑷ 영토회복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며 요동지방을 세 차례 공격하였다.
⑸ 친명정책 추진
종래의 친원정책을 버리고 친명정책을 추진하였다.
다. 내정개혁
⑴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약화와 재정수입 기반 확보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⑵ 신돈 등용과 개혁
승려인 신돈(辛旽, 遍照, ~1371)을 국사로 삼고 진평후, 판서문관사(음양관)에 봉하고 삼중대광령도첨의(三重大匡領都僉議)란 직을 제수하여 국가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공민왕 15년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었다.
⑶ 권문세족의 숙청과 한미한 자의 등용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 (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密直)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등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한미(寒微)한 자를 등용하였다.
⑷ 정방(政房) 폐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했다.
⑸ 성균관 재정비와 사대부 육성
왕 16년 1367년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신진사대부를 육성하였다.
라. 개혁의 실패
권문세력의 반발로 신돈이 1371년 제거되고 공민왕이 최만생등에게 살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3.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가 권문세족(權門勢族)
⑴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가문
원의 환관으로 파견되어 고려에 돌아와 권력을 잡은 이숙, 방신우, 원에 세자를 수행한 측근들이다.
⑵ 권문세족의 범위
기존의 문벌귀족, 원왕실과 결혼한 가문(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頙)), 역인(조인규(趙仁規), 류청신(柳淸臣)), 응방(鷹坊) 출신(윤수(尹秀), 원경(元卿), 이정(李貞), 박의(朴義)) 원나라에 입조하는 국왕을 수행하는 공신, 원공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겁령구(怯令口, 인후(仁侯). 장순룡(張舜龍)), 원으로부터 군사직 만호(萬戶)를 얻어 출세한 경우 등이 포함되었었다.
⑶ 토지 침탈을 토한 농장경영과 부 축적
녹봉보다는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통해 농장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⑴ 신진사대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학자적 관료로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지방의 향리 출신과 중앙의 이직자(吏職者)가 많았다.
⑵ 지방의 중소지주로서 성장했다.
⑶ 학문적 소양을 쌓아 과거(科擧)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했다.
⑷ 고려 후기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4. 고려의 멸망
가. 국제정세의 변화
⑴ 왜구와 홍건적의 창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대립 상황속에서 왜구와 홍건적이 창궐했다. 이것은 원명교체기에 따른 영향이다.
홍건적의 격퇴
1359년 제1차 홍건적 격퇴 서경(이방경, 이승훈)
1361년 제2차 홍건적 격퇴 화주(정세운, 이성계)
왜구의 격퇴
우왕 2년 1376년 崔瑩 홍산대첩
우왕 6년 1380년 8월 崔茂宣 진포대첩
우왕 6년 1380년 9월 李成桂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우왕 9년 1383년 鄭地 관음포대첩
창왕 1년 1389년 朴葳 쓰시마(對馬島)정벌
세종 1년 1419년 李從茂 쓰시마(對馬島)정벌
⑵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
명나라가 요동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 등은 분개하여 요동지방을 수복하려 했다.
⑶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우왕 14년 1388년 최영을 8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좌군도통사로 하여 출병했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4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첫째, 이소역대 (以少逆大)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소역대(以小逆大)
둘째, 하월발병(夏月發兵)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夏月發兵)
셋째, 거국원정 왜승기허(擧國遠征 倭乘其虛)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時方暑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나. 이성계의 집권
⑴ 실권 장악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⑵ 과전법 시행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공양왕 3년 139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어 권문세력은 타격을 받고 신진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⑶ 신진사대부의 분화
산진사대부는 온건파(정몽주, 길재 등)와 역성혁명파(이성계, 정도전 등)로 분화하였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