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교통정리를 합니다. 사람들은 순순히 그의 신호를 따라 운전합니다.
무용복을 입은 여인이 교통정리를 합니다. 사람들은 신호를 따르지만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교통정리라는 일을 한다고 경찰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반드시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진 못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말은 어렵습니다.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질문에 우선 이름을 대답해 봅니다. 성별, 나이, 출신 등의 신상정보를 대답하고 나니, 나를 말해줄 것이 바로 떠 오르지 않습니다.
초인종이 울립니다. “뭐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세요?”라고 말합니다. 정체를 알아야 초인종을 울린 일이 이해됩니다. 그래야 문이 열립니다.
잘하는 일, 인정받는 일, 가치 있는 일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뜻 밖의 일을 만납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절망하여 무너져 버립니다. 혹은 올바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잘 달려서 말이 아니라, 말이어서 잘 달립니다. 헤엄을 잘 쳐서 물개가 아니라 물개라서 헤엄을 잘 칩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 우리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일합니다. 사람 같은 일을 해서 사람이 아니죠..
“장래 꿈은 뭐에요? 뭐 하고 싶으세요?” 저마다 장래에 갖고 싶은 직업을 말합니다. 직업이 나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도구이기 때문에, 직업 속에서 자기를 찾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어느날 정말 하기 싫은 것으로 바뀐다면? 그런데도 그렇게 살아왔기에, 죽지 못해 계속해야 한다면?”
“How do you do?는 인사입니다. “Who are you?”는 인사가 될 수 없습니다. 당혹스런 질문이 될수는 있겠지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일의 성공과 실패에 인생이 묶여 버리지 않으려면, 나의 본질을 보고자 해야 합니다.
오늘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 왕국의 왕자입니다. 그가 왕자로 태어났기에 그는 왕가의 후계 수업을 받고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선교나 사역을 하기 위해 거듭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쉽게 선교라는 일과 세상을 위한 일, 사람을 위한 사역으로 생명을 증명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지요.
생명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증명하지도 않습니다. 살아갈 뿐입니다.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신의 섭리가 이루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