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가장 절실한, 존엄성(정원식)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존엄한 삶’은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인 것이다. 독일 연방헌법은 더 구체적이다. 독일 연방헌법 1조는 이렇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기구의 의무다.” 존엄한 삶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담은 헌법이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삶이 존엄한 삶일까.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이다. <삶의 격>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여러 경험에 이해 가능한 빛을 비추려는 시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라며 존엄한 삶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명료한 언어로 고찰하고 있다. 저자 페터 비에리는 한국에서는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본업은 철학이다. 마그데부르크 대학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각기 철학사와 언어철학을 가르쳤다.
존엄성 있는 삶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능력 키워야
존엄한 삶의 첫째 조건은 독립성이다. 누구나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독립성이 타인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는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이익을 위해 도구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는 난쟁이 던지기 대회를 존엄성 침해의 사례로 든다. 저자가 우연히 장터에서 목격한 이 대회의 규칙은 간단하다. 난쟁이를 손으로 들어올려 투창을 던지듯 가장 멀리 던지는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사람을 던질 때 그 사람에게서 존엄성이 박탈되는 이유는 그도 하나의 주체라는 점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물체, 물건으로 격하되고 이러한 인격의 물화에 바로 존엄성의 상실이 있는 것이다.” 도축장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같은 이유에서 나온다. 도축장에 끌려온 동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식생활이라는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사육됐기 때문이다. 주체성이 훼손될 때 인간은 굴욕을 느낀다. 굴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할 때” 발생한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 병사들이 수감자들을 학대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나는 그 쇼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겁니다. 던져지겠다고 결정한 사람이 바로 나란 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 존엄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까. 저자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은 존엄성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난쟁이 던지기 대회가 위법이라는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 존엄은 한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판단에서다. “인간은 물질화·수단화되면서 굴욕을 당한다. 그래서 존엄성은 법적 장치를 통해 보호된다.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내던져서는 안 된다.” 이는 성매매가 성매매 여성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성매매 자체의 인권침해적 속성이 가려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엄성은 언제나 쉽게 풀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종교적 이유로 생명이 위태로운 자녀에 대한 수혈을 거부하는 부모 앞에서 의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부모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 자신의 양심을 꺾어야 할까. 부모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수혈을 해야 할까. 어떤 선택이 옳은지 정답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주체적 인간은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다. “주체적 인간은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행위와 경험을 존중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 자문할 줄 알아야 한다. 주체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에 끌려가는 것처럼 그저 앞만 보고 터덜터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존엄성의 문제에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사적인 은밀함이다. 인간에게는 남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폭로는 이 구분선을 무너뜨려 당사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저자는 “만일 본인 의사에 반해 이 봉인이 뜯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혼자 산책을 즐기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그 순간부터는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해 타인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누군가 나의 일기장이나 휴대폰 대화 내용을 훔쳐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타인이 나의 내밀한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자기 삶에 특별한 결함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 삶에 대한 내적인 권위를 상실한다. “나는 외부의 파괴적 판단을 그대로 덮어쓴 그 순간 이후로는 내적 권위를 상실한, 판단력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으로 살아간다.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내면의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하는 사람은 바로 타인을 대신해서 싸우는 나 자신이며 한번 시작된 전투는 멈추지 않는다. 퇴로는 차단되고 무력감은 완벽해진다.”
존엄성 있는 삶이 아무런 일도 없이 평탄하기만 한 삶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존엄성 있는 생활방식은 매끈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며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불완전함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한마디로 간추릴 수 없는 성질의 논리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