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봄바람-죽이는 가을물, 추사 대련의 비밀(이빈섬)
봄바람의
큰 품은
만물을 품을 수 있고
가을물의
물살은
티끌에 물들지 않네
春風大雅能容物
춘풍대아능용물
秋水文章不染塵
추수문장불염진
1. 춘풍 정명도, 추수 정이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추사의 글씨 '춘풍추수(春風秋水)'는 고졸한 서예의 진수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가 왜 이 대련을 썼을까 하는 작가론적 관점에서도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은 이 댓구의 출전이 어딘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유학의 해석 지평을 확대하고 깊이를 더한 정명도-정이천 형제의 인품과 학덕을 가리키는 구절로 알려져 있다. 북송시대 두 사람의 정자(程子)라 불리는 정씨 형제는 이후 주희와 함께 정주학의 흐름을 만들어낸 탁월한 지식인들이다.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은 명도를 가리켰고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은 이천을 가리켰다. 하지만 시가 굳이 그런 당시의 맥락들로 읽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후세 사람들은, 그 시가 담고 있는 의미의 심오함에 공명한다.
2. 섞임의 봄바람, 맑힘의 가을물
춘풍대아능용물을 자구 그대로 풀이하면, '봄바람의 큰 부드러움은 세상의 만물을 담아낼 수 있다'란 뜻이다. 추수문장불염진은 '가을 개울물의 접힘과 펴짐은 티끌에 물들지 않았다'란 의미다.
과연 그렇다. 봄은 생명을 낳는 계절인데, 그 시절 부는 바람은 생명의 분발과 탄생을 돋운다. 조물주처럼 만물을 부드럽게 품어 생명으로 만들어내는 그릇이니 춘풍은 얼마나 놀라운 역사(役事)인가.
가을은 생명의 무성함을 덜어내 혼탁함을 정화하는 계절이다. 가을날의 개울물은 물살이 접힐 때도 펴질 때도 티끌 하나 없이 맑다. 스스로 그렇게 맑은 까닭은, 다른 호화로운 빛들과 탁한 존재들을 맑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티끌도 맑은 물 속에 들어오면 스스로 깨끗해질 수 밖에 없다.
3. 시경(詩經)의 너른 품, 사기(史記)의 가차없음
여기까지만 해도 놀랍지만 이 댓구의 의미결은 훨씬 더 나아간다. 대아(大雅)는 '큰 부드러움'이란 뜻을 지니지만, 공자가 생각함에 잡됨이 없다(思無邪)고 했던 시경의 한 챕터인 '대아'편을 가리킨다.
문장(文章)은 물의 무늬(접힘과 펴짐)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기(史記)의 엄정하고 가차없으면서도 형평을 지닌 서술방식을 뜻한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문장'이다. 문장은, 엄정한 산문의 전형을 의미한다.
이런 두 가지의 역사적 뉘앙스를 담으면, 뜻이 상당히 깊어진다. 춘풍대아능용물은 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봄바람 같은 시(詩)는 세상의 만물을 담아 생명으로 창조해낸다. 추수문장불염진은 가을 물빛같은 역사기록은 하나의 티끌도 스며들지 못한다. 시의 정신과 산문의 정신을 이토록 아름답고 정확하게 표현해낸 글을 보았던가.
4. 봄날의 인(仁)과 가을날의 의(義)
여기까지 읽고 나면, 정명도와 정이천이 어떠했는가가 선명하게 들어온다. 명도는 시적 인간이었고, 부드럽고 포용력이 있으면서 남을 키워줄 줄 아는 도량을 지닌 인격이었다. 이천은 가차없는 비평글처럼 맹렬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해 타협하지 않았고 정밀하게 문제의 경중과 본질을 따질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게 뭔가. 바로 공자가 입이 닳도록 얘기한 인(仁)과 의(義)의 핵심이 아닌가. 봄바람같은 어진 성격과 가을물결같은 엄격한 가치관. 두 유학자의 캐릭터 속에 이미 그 본질적 미덕이 있었다는 의미다.
5. 추사의 춘풍추수와 등석여의 춘풍추수
추사고택의 주련에 있는 '춘풍추수'는 간송미술관에 있는 글씨를 옮겨담은 것이다. 그가 이 글귀를 쓴 것은 청나라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 전각예술가인 등석여의 글씨를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1809년 10월 스물 네살 추사 김정희는 생부인 동지부사 김노경을 따라서 연경에 갔다. 그때 등석여는 타계한지 4년이 지난 때였다.
추사는 운필의 마지막에 붓의 방향을 바꿔 거둬들이는 전서의 정석을 등석여의 글에서 배웠다. 추사보다 43년이 앞선, 말하자면 '부모세대'의 우상이었던 그에게서 글씨가 가야할 길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추사가 등석여의 글귀를 따라갔다 하더라도, 결코 등석여처럼 쓴 것은 아니다. 다만 생동하는 실험 정신만을 빌어와 47년 뒤 말년 봉은사에서 이 댓구를 쓴다.
왜 하필 이 대련이었을까. 무엇이 그의 마음 속에 그토록 깊이 남아, 47년의 숙성을 거친 뒤에 그 붓을 움직이게 했을까. 이게, 추사의 이 글씨를 읽는 독법(讀法)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춘풍대아는 자연의 이치와 시와 산문의 통찰과 유학의 양대 인격의 표상을 넘어서서, 추사와 완백(完白) 등석여가 평생을 두고 밀어붙인 문자예술론의 비급(祕笈)을 전하고 있다.
6. 추수는 법고(法古), 춘풍은 창신(創新)
추수문장불염진은, 법고(法古)의 핵심이다. 모든 공부는 법식을 배우는 일부터 시작한다. 규칙을 완전히 터득하고 통달하는 일의 중요성은 서예에서도 마찬가지다.
추사가 고대의 솥뚜껑과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찾아 천지를 헤맸던 까닭은, 법식을 완전하게 익히기 위해서였다. 어떤 것도 함부로 하지 않고 모든 것에 근거와 전거를 찾아내서 그것에 바탕하여 글씨를 썼다.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금석학은 가장 원형적인 글씨와 근본적인 글씨의 뜻을 찾아 인류의 태고(太古)를 탐색했던 학문이었다. 왜? 거기에 신과 인간이 만나던 원형적인 생동감과 법식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추사가 글씨를 통해 그토록 청동기시대까지 올라가고자 했던 까닭은, 신서(神書)의 비밀을 붙잡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금석학은 그 자체가 '연구'의 영역이며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추사나 완백에게는 자기를 갖추는 기틀의 완벽함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추구한 것이었다. 이 부분이 느슨하면, 그 위에 세운 것들이 어수룩해지고 허술해질 수 밖에 없다. 가을물의 무늬가 티끌이 물들지 않듯, 인간 본연의 근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예미학을 고고학적으로 찾아내고 다시 완전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무서운 완벽주의자들이었다.
춘풍대아능용물은, 창신(創新)의 엔진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이르는 그 혹한을 겪지 않으면, 봄이 봄일 수 없다. 저 엄혹한 계절을 지나는 것은 가차없는 '법고'의 시간을 지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법고를 지나야 창신을 할 수 있다.
창신은 법고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법고의 정신이 엄격이었다면, 창신의 정신은 포용이며 유연함이다. 봄이 그렇다. 어리버리한 놈이라고 넌 살지말라고 내치지 않고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해서 봄볕을 안 쬐어주지도 않는다. 모두를 다 품어서, 거대한 생명의 협주곡을 이뤄낸다. 지난 겨울에 없었던 '라이브쇼'를 펼친다. 창신은 법고에 바탕하지만, 법고보다 더 위대하다. 우리가 요즘 그토록 외치는 크리에이팅과 창의는, 춘풍대아능용물의 아류에 다름 아니다.
7. 가을엔 엄격함을 추구하고, 봄날엔 새로움을 추구하라
추사는 죽은 등석여가 남긴 그 놀라운, 고증의 정신과 독창의 비밀을, 저 글귀에서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엔 추상같은 법고를 배우고 봄날엔 아름다운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창신을 배워라.
200년전 두 지식인 사이에 생사를 넘나들며 오간 이 비장의 '문예정신'을 우리가 이토록 쉽게 일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 거기에 우리를 '필'받게 하는 봄과 가을이 해마다 온다는 것. 추사가 우리에게 남긴 사무치는 속삭임을 어찌할 것인가.
마침 가을물(추수, 秋水)의 시절이다. 서구 종교에는 '신의 심판'이 익숙한 개념이다. 동양에선 계절에서 '신의 심판'을 발견했다. 구양수가 쓴 '가을바람에 관하여(추성부(秋聲賦)'가 바로 그것을 읊은 글이다.
신이 낫을 들고 생명을 베는 일. 그것이 가을이다. 그 물이 맑은 것은 거기에 어떤 사심(私心)이나 사심(邪心)이 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비롯한 생명을 베는 까닭은 미움이나 분노같은 인간감정이 작동해서가 아니라 생태계 유지라는 큰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지난 봄과 여름의 햇살로 번성시킨 생명을 쇠하게 하고 죽여야만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봄날의 창조가 한없이 자비로운 것이었다면 가을날의 심판은 그야말로 가차없는 것이다. 봄바람은 태양에 달궈진 따뜻한 공기를 실어나른다. 흙 속에 죽은 듯 들어있는 씨앗의 생명을 깨우기 위해서이다. 가을물은 차가운 기운을 흘린다. 정리되지 않은 생명들을 시들게 하고, 마침내 얼려서 난만하게 돋아오른 지상의 생물들을 사멸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살리는 것이 무한한 은총이 아니듯, 죽이는 것 또한 무한한 심판이 아니다. 죽이는 것에는 생명의 계획이 숨어있고, 살리는 것에는 소멸의 부전지가 붙어있다.
봄을 지내고 가을을 보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봄과 가을의 사이, 혹은 탄생과 죽음의 사이에 낀 자신을 살펴 웃자란 욕심들을 거둬들이고 과도한 절망과 슬픔을 눅이는 일일 것이다.
추사의 저 글씨를 보면서, 가슴이 뛰기도 하고 심호흡을 하기도 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저 천재는, 자기의 삶에서 얻어낸 각성을 내게 저 문자언(文字言)으로 쩌렁쩌렁하게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가을 아침에.
더뷰스 리뷰어 이빈섬 ('추사에 미치다' 저자) isomi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