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중에 범정 선생님이 그림을 하나 그립니다.
먼저 작대기 하나, 그 위에 동그라미 하나. "내가 지금 이게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그 옆에 훨씬 큰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립니다. "이거는 하나의 지구라고 생각하면 돼."
이제 그 큰 동그라미, 지구 둘레를 빙 돌아가며 작대기 사람을 몇 명 더 세웁니다. 맨 위에 하나, 옆구리에 하나, 맨 아래 뒤집어서 하나. 다리는 전부 동그라미 표면에 딱 붙어 있고, 머리는 저마다 다른 방향—위로, 옆으로, 심지어 거꾸로—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도 이렇게 서 있겠죠. 여기 있는 사람이 이렇게 서 있겠지."
종이 위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그림입니다. 한 사람은 똑바로, 한 사람은 옆으로 누워, 한 사람은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범정 선생님은 그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묻습니다.
"지구의 동쪽에 서 있는 사람은 지금 이렇게 드러누워 있겠네. 그러면서 내가 서 있다고,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남쪽에 있는 사람은 거꾸로 서 있는 감을 느껴야 되잖아요. 근데 우리가 이런 감을 못 느껴요."
종이 위에서는 누워 있고 거꾸로 서 있는데, 정작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왜 못 느낄까요.
범정 선생님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답을 짚습니다. 이번엔 지구 동그라미가 아니라, 종이의 빈 공간 —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바깥쪽을 손으로 크게 휘젓습니다.
"이 무한 공천 쪽을 향하는 건 남극에 있든 동쪽에 있든 북극에 있든, 무한공천이, 이 머리가 있는 쪽이 상이야 상. 그래서 여기를 태두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남쪽이든 동쪽이든 남극이든, 어디에 서 있든 상관없습니다. 발을 딛고 선 그 자리에서 몸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무한한 하늘 — 그 방향이 곧 "위"입니다.
범정 선생님이 이번엔 그림 속 작대기 사람의 발끝을 손가락으로 짚습니다. 그 발이 향한 반대쪽을 뭐라고 부르겠냐고 묻다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답을 냅니다.
참석자: "아래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위는 방향이 아니라 대상이었습니다. 지구 중심을 가리키는 발끝이 아래, 그 반대쪽 끝없는 하늘을 향한 머리끝이 위입니다. 그림 속 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 같은 것 — 지구 중심과 무한한 하늘 — 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을 뿐입니다.
거꾸로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들 하늘을 향해 서 있었을 뿐입니다. 종이 위에서 누워 보이고 거꾸로 보였던 건 그림을 평면으로 본 착시였을 뿐, 정작 못 느낀 게 아니라 애초에 어긋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요.
"다리는 뭐야, 만년지축. 만 년 동안 다 지축으로서 이렇게 서 있어야 되는 거고. 이거는 공찰, 만년공찰. 공간을 만진다 그거야. 두 팔은 공간을 만지게끔 돼 있어요. 조화를 그리게 돼 있어요."
그림 속 작대기 사람, 그 다리 두 개는 지구 표면에 박혀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축, 만년지축입니다.
양옆으로 뻗은 작대기 두 팔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습니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공간을 만지고 조화를 그리는, 만년공찰입니다.
그리고 맨 위 동그라미 — 몸 전체를 대표해도 좋을 그 머리는 하늘의 이치와 맞닿는 자리, 태두입니다.
머리는 왜 하필 둥글게 그려졌을까요.
"구형이라는 건, 이 공간이 암만 무한 대천이라 하더라도 나와 그대로 함께 전체가 붙어 있다는 거야. 내가 적으니까 조금 붙어 있고, 그게 아니라는 말이야."
네모나 세모라면 어느 한 면, 한 모서리만 공간에 닿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그라미는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둘레 전체가 빈틈없이 바깥과 맞닿아 있습니다. 작다고 무한한 것의 한 귀퉁이만 겨우 닿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둥글기 때문에, 공간이 아무리 무한해도 나와 전체가 붙어 있습니다.
96호에서 반신반인을 이야기하며 십시일각이 10%라고 했습니다. 열 중 하나만 남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10%는 '조금만 닿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크기는 작아도, 닿은 면은 전부입니다.
발은 땅의 중심을 딛고, 팔은 공간을 만지고, 머리는 무한과 한 점도 틀림없이 접해 있습니다. 내 몸의 생김새가 이미 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김새는 그림 밖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지난 호에서 한약을 끓여 어림 기기를 취한다고 했습니다. 그 기가 몸에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 답은 방금 확인한 이 몸의 설계 그대로입니다.
동양의학에는 기의 움직임을 정리한 네 글자가 있습니다. 승(升)·강(降)·출(出)·입(入).
승강은 위아래, 출입은 수평입니다. 다리가 만년지축으로 땅을 딛고 머리가 태두로 하늘과 맞닿아 있듯, 숨(기식)이 그 위아래 축을 따라 승강을 맡습니다. 팔이 만년공찰로 양옆 공간을 만지듯, 먹는 것(물식)이 그 수평을 따라 출입을 맡습니다. 시리즈 H에서 다룬 그 둘이, 사실은 이 몸의 생김새를 따라 서로 다른 방향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가 하는 일은 결국 하나입니다. 중용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연은 여기서 둘의 무게를 세게 갈라놓습니다.
"모든 인간의 살아가는 생명이라든지, 모든 것에 관계되는 그것의 99% 이상을 갖다가 가지고 있는 거는 기식 운동이 관장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우선하고 격이 되고 주축이 되는 건 — 건강이든 병이든 뭐든 — 기식권에서 이루어지지 기질권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숨이 99% 이상, 먹는 것은 나머지입니다. 숫자를 이렇게까지 벌려 놓고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 한 편이 남았습니다.
강연도 마지막 당부로 끝납니다. 그 당부는 4호에서 처음 꺼냈던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호흡, 그 호흡이 정말 나를 살리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