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out의 의미는 정신분석에서 보통은 말로 표현하여 치료를 하는데 환자나 내담자가 자신의 기억이나 태도나 갈등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하는 것으로 이러한 행동화는 정신분석의 장면이나 혹은 정신분석 장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환자나 내담자는 왜 그런 반응이 일어나고 행동화하는지 또한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채 반항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전이행동화라고 부른다.
보통은 전이 자체를 행동화라고 하는데 실상 환자나 내담자가 격한 반응, 인격장애적 분노나 나쁜행동으로 나타날때 액팅아웃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나는 원래의 전이 행동화나 전이에 대한 의미보다는 실제적으로 많이 쓰이는 인격장애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부분을 다루려고 한다.
인간이 하는 신앙이라는 관점은 영적관계와 인간관계로 다가서게 된다.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의 신앙을 표방하고 있으며 이런 형태는 영적관계를 모방한 교회 커뮤니티, 곧 공동체적 발상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 안에서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진다.
보통은 이들간의 커뮤니티에서의 만남은 개인적 퍼스널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문제나 사건, 혹은 자신의 내면적 이해관계가 결부되어지면 엄청난 인격장애적 성향이 표출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은 예수를 믿고 있는게 아냐라고 한다면 여러가지 반응들이 나타날 수 있다.
제일 먼저 그런 말을 무시하는 형태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즉 이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잘 반응하지 않는 부류이다. 나는 이 부류에 속한다.
혹여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심중에 어떤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인간은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 존재하는 만큼 파악한 것이 바로 이기적 마음에 의한 판단이 생내적인 감정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매우 잘 예수를 믿고 계시는 분들에게도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
두번째는 이것에 매우 분노하는 분들이다.
실제적 반응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속으로 분노가 밀려올라와 참을 수 없는 격한 감정을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이분들을 액팅아웃, 성도의 행동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는 두번째의 분노를 다른 이성적인 형태로 파악하여 보복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이용해서 험담을 하거나 교란하거나 하는 이성적 액팅아웃을 하는 분들이 있다.
이 세번째 유형은 아주 차분하면서도 감정의 손실부분을 이성으로 끌고와서 실질적 분노를 시도하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의 성향은
시간이 갈수록 반사회적 인격장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사실 내 임의대로 이렇게 분류는 하였지만 세 반응 모두 자신의 이기심의 다양한 발현현상이다.
즉 뭔가 만족스럽지 않거나 거절당하거나 거부당하게 되면 거의 모든 인간들은 이 세가지 반응양상으로 액팅아웃한다.
나는 인간관계에서는 거절과 거부를 하고 영적관계에서는 구타를 하는 방식으로 복음과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만약 내가 어떤 기독교적 공동체에 몸을 담는다면 위의 세부류의 액팅아웃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영적관계로 뚫려있는 분들은 위 세가지 액팅아웃 유형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위에 제시한 예수를 믿는게 아니라는 거절의 의미는 실제적 거절이 아니다.
즉, 나는 거절의 주체가 아니며 또한 내가 예수를 믿느니 마느니 평가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에 반응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나'를 무시해?라는 관점이다.
이들의 반응은 영적관계에서의 거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가 자신을 건들던 반드시 액팅아웃한다.
보통의 치료방법은 그건 너를 무시하는게 아니라고 타이르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액팅아웃하는 성도들을 향해 영적관계에서의 거절로 다시한번 구타를 한다.
그들이 이성적으로 아무리 자신이 맞다고 말해도 액팅아웃을 하건 지랄을 하건 무슨짓을 해도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거부와 거절이 주는 분노에 그들이 그 분노에 자기가 죽을지경에 놓일때까지 기름을 부어준다.
그러나 결과는 위 세부류를 왔다갔다 할뿐 영적관계에 대하여 관심하는 분들은 드물다.
나는 영적 관계에서의 은혜로의 부정을 말하게 된 계기가 바로 나의 액팅아웃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부터라는 점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나는 일단 거부와 거절을 함으로 사람들의 액팅아웃 양상을 지켜본다.
그가 뭘 알고 어떤 신학관으로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머리에 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머리에 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또한 세련된 행동과 메너있는 행동과 인간적 예의들은 언제나 습득할 수 있고 사기꾼들이 가장 잘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팅아웃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거의 즉각적으로 흘러나온다.
이 액팅아웃의 양상이 발견되면 곧 영적관계가 없다는 의미이다.
은혜로 부정당해보지 않은 분들은 아주 단단하게 '나'라는 존재적 측면이 계속 남아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어떤 복음의 메세지를 전한다고 한들 그들은 영적관계를 설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성경을 많이 보고 정통하며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의 인용만 할뿐이지 '나'가 옳은 길에 서있다라는 자각에 기인한 성경해석을 말할 뿐이다. 즉, 주작이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대단한 당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것에 대한 언제나 표출될 분노가 있지 않으신가.
나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예수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냥 거절할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아무리 어필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어떤 성경지식을 나에게 말한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할 것이다.
몇몇분이 은혜로의 부정을 경험해 가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들은 액팅아웃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은혜를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