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녹색 부직포가 깔린 당구대며 빨간색 N360이며 책상 위의 하얀 꽃이며,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며 경찰서 조서실에 놓여 있던 묵직한 문진이며 그런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내 안에 무언지 모를 부연 공기 같은 것이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공기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태를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런 말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써 존재하고 있다.
말로 옮겨놓고 보니 역겨우리만큼 펑범하다. 그야말로 일반론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을 말이 아니라 하나의 공기로 체감했다. 문진 속에도 당구대에 늘어선 네 개의 공 속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마치 미세한 먼지처럼 폐 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온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죽음이란 것은 타인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 확실히 우리를 붙잡는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붙잡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라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생각 같았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그러나 친구가 죽어버린 그날 밤을 경계로 나는 더는 죽음을 그렇게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열일곱 살이었던 5월의 밤에 내 친구를 붙잡은 죽음은, 그날 밤 나까지 붙잡았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중에서)
호텔 오쿠라 본관 로비는 널찍하고 천장이 높고 어슴푸레해서 거대하고도 기품 있는 동굴을 떠올리게 했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장이 뽑혀나간 생물의 한숨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두툼하고 부드러운 카펫은 북녘 끝 섬의 태곳적 이끼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사람들의 발소리를 축적된 시간 속으로 흡수해갔다. 로비를 오가는 남녀는 저주를 받아 오랜 옛날부터 그곳에 붙들린 채 주어진 역할을 한없이 반복하는 한 무리의 유령처럼 보였다. 갑옷을 걸치듯이 빈틈없는 비즈니스 정장으로 몸을 감싼 남자들, 어딘가의 홀에서 개최되는 세리머니를 위해 시크한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젊고 늘씬한 아가씨들, 그녀들의 몸에 달린 작지만 값비싼 액세서리는 피를 원하는 흡혈조처럼 자신들을 반짝이게 해줄 희미한 빛을 희구하고 있었다. 전성기를 지난 왕과 왕비처럼 한쪽 구석의 옥좌에서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 커다란 몸집의 외국인 노부부.
그런 전설과 암시가 가득한 장소에, 아오마메의 연한 파란색 면바지와 심플한 흰 블라우스와 하얀 스니커와 파란색 나이키 스포츠백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구부러진 나뭇가지가 달린 가로수는 회색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가드레일은 여기저기 우그러졌고, 녹슨 자전거 몇 대가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다. '음주운전은 인생의 파멸로 가는 일방통행' 이라는 경찰 표어가 담벼락에 나붙어 있었다. 심술궂게 생긴 노인이 머리가 나빠보이는 잡종견을 산책시키고 있었다. 머리가 나빠 보이는 여자가 못생긴 경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못난이 전봇대가 심술궂은 전선을 종중 여기저기로 뻗고 있었다. 세계가 '비참한 것' 과 '기쁨이 결여된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제각각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의 한없는 집적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창밖의 풍경은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계에는 후카에리의 귀와 목덜미처럼 어떤 이의도 내세울 여지가 없는 아름다운 풍경도 존재한다. 그 둘 중 어느 쪽의 존재를 믿어야 할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는 대목이다. 덴고는 혼란에 빠진 개처럼 목구멍에서 작게 신음을 내고, 커튼을 닫고 자신의 작은 세계로 돌아왔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