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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비가 내리는 4월의 목요일이다. 어제 소주 몇 잔과 정종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 아침에 몸이 무거운 것은 친구에게 충고한다고 무거운 말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콩나물국으로 식사를 마치고 시간을 보내는 중에 일찍 산에 갔던 아내가 넘어졌다며 목과 허리를 움츠리고 들어왔다. 걱정이 되었지만 괜찮은지 이대부고 학부모 모임이 있다는 홍대 입구로 나서고 나도 바로 일어나 체육관으로 향했다. 의욕이 사라진 다운된 기분이었지만 기구운동을 가볍게 하고 나니 다행히 평상시의 마음이 생겨났다. 오후에 어제 충고한 친구에게 통화를 하고 이어 아내한테도 전화를 하니 병원에 갔다가 별 문제가 없다고 하여 지금은 모임을 마치고 집에 오는 중이라 한다. 집을 출발하여 대학로를 거쳐 학원에 나갔다가 저녁에 수업을 하고 시간을 보니 벌써 4월의 첫날 하루가 저물었다. 집에서 삼겹살로 식사를 하는 중에 학원을 마친 딸은 엄마의 심부름이라며 마트에서 딸기와 간식 등을 구입하여 들고 왔다. 평소에 수줍음이 많아 말도 없는 딸인데 며칠 전에는 밥도 해 놓았고 오늘은 장까지 보았으니 대견하고 고맙기도 하다.
2일 새벽에 거실로 나와 잠자는 아내 옆에 누웠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 이것저것 시끄러워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일찍 들어와 충분히 수면을 했을 아들은 아침에 소리도 없이 학교에 갔고 식사를 마친 딸도 8시가 지나 등교를 한다. 오전에 마인드맵 강의를 처음 들으러 간다는 아내를 인창중학교 건너편 경기빌딩에 태우고 갔는데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자주 왔던 곳이다. 독서와 관련이 있는 학습법으로 매주 금요일 2시간씩 배운다는데 아마 연상을 통한 암기법 정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교육을 오래 담당한 나로서 듣지도 못한 희한한 명칭이라 의구심이 일었지만 납입한 수강료가 15만원이라 잘 배우라고 격려만 했다. 곧장 홍제천으로 이동하여 모래네 주변까지 40분 7킬로를 달리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더 하고 나왔다. 12시에 경기빌딩으로 다시 가서 강의를 마친 아내를 태웠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 오늘 배우고 그렸다는 마인드맵을 펼치며 설명하기에 바쁘다. 글자 그대로 마음에 지도를 그리며 암기하는 과정같은데 중학생 수준의 교육법이라 신기하거나 대수롭지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학원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더니 어제와 다른 4월의 기온으로 사람들의 모습부터 활기차고 생기가 돌았다. 저녁에 부산에서 랍스터나 킹그랩을 운반하는 선장 신영재를 만나야 하는데 개인의 사정으로 다음으로 미루었다. 신영재는 외대를 졸업하고 KDI에 근무하다가 현재 베링해를 오가는 운반선의 책임자로 투자를 하는 우리와 나이가 같은 강원도 친구다. 문제는 운반을 하는 도중에 선박의 고장이나 영해 침범으로 장기간 러시아에 억류되는 일이 반복되어 이익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현재까지는 대주주인 영식이가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처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상가상 필리핀 영어교육 사업까지 어려움에 처한 영식이로서는 두 사업에 대한 고민이 많아 엊그제도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모든 일과 사업이 초반에는 만만하여 수익을 올릴 것 같지만 예기치 않은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결코 쉬운 일이 없다.
3일 일찍 일어나 거실에 나서니 5일 만에 보는 아들이 식사를 한다. 토요일이라 평소보다 늦게 등교를 하지만 식사 때나 학교에 가면서도 인사는커녕 현관문만 꽝 닫고 나가 내 마음이 처절하기만 했다. 오전에 신사임당 멤버인 민희네 병문안을 간다고 아내가 외출을 하고 심란한 나도 북한산에 오르려고 집을 나서 구기동으로 향했다. 대남문 방향으로 10시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화창한 날씨와는 다르게 계곡의 바람은 아직도 매섭고 차가웠다. 어쩌다 마주친 산 입구에 핀 개나리와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아내리는 물소리가 저만치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정도였다. 1시간을 걸어 대남문에 도착하여 숨을 고르고 가파른 문수봉 정상으로 올랐더니 건너편 보현봉 중턱에서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근처에 있는 문수사에 들러 먼저 떠난 가까운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고 하산하여 집으로 갔더니 아들과 딸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있다. 불만의 표정으로 말도 안하는 아들이 방으로 들어간 오후에 대일학원 동료였던 장성남선생 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강대 근처로 나섰다. 지난 날 함께 강의한 동료들이 많이 모여 반가웠지만 도중에 2시부터 수업이라던 아내가 3시경이나 학원에 도착한다고 전화가 와서 바로 논술교실로 돌아왔다. 학생들을 감독하는 사이에 아내가 왔고 저녁에는 외출을 하여 영식이와 식사를 하면서 무슨 일이든 쉽게 되는 것은 없으니 힘을 내라고 엊그제와 다르게 격려를 했다. 밤에 우유를 사 오라는 딸의 문자가 와서 커피우유와 딸기우유를 동시에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4일 오늘 수업이 많아 마음부터 부담이 생기는 일요일이다. 9시부터 중간고사 특강이 있어 교회를 일찍 다녀오려고 나섰다가 합정동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사 먹었다. 7시30분 도착하니 교회에서는 오늘이 부활절이라고 성대하게 행사를 준비하여 방금 식사를 한 나에게 몇 개의 계란을 안긴다. 목사님의 설교 내용도 부활절에 관한 말씀이어서 전능하신 예수를 생각했고 계란 값까지 평소보다 많은 금액을 봉헌했다. 2부 예배를 준비하는 친구를 보려고 성가대 연습실에 갔다가 멀리서 손만 흔들고 곧바로 돌아와 1시30분까지 중간고사 준비 수업을 했다. 집으로 내려와 점심을 하는 중에 영어를 배우고 돌아온 아들이 오늘은 국어수업을 꼭 하겠다고 의욕을 보이더니 이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안방에서 쉬다가 4시경 교실에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국어는 나중에 별도로 듣겠다며 수학학원으로 간다는 전화가 아들한테 왔다. 막을 수도 없었지만 중요한 중간고사 범위라서 안타까웠고 마치 아들 주려고 영양밥을 했다가 다른 사람들 퍼 주는 심정이었다. 수업을 마친 저녁에 아들 PDP를 구입한다고 아내와 나섰고 10시에 정독도서관에 들러 공부한 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에 생선탕으로 식사를 하고 오늘 부활절의 의미를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새로운 정신의 부활이 아들에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5일 새벽 3시경 깼다가 다시 잠이 들어 6시에 일어났다. 아침에는 식탁에 오른 김치가 맛이 없어 먹던 밥을 팽개치고 바로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며 보냈다. 11시가 거의 되어 운영위원회 모임으로 독립문을 경유하여 이대부고에 들어서니 교감선생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 출범식을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처음 업무를 시작하는 날이라 교장 교감선생을 비롯하여 선생님들과 운영위원들까지 들어서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교장을 포함하여 선생님 5명과 운영위원 9명 전체 14명이 둘러 앉아 학교의 상황을 보고 받고 교복이나 급식 등으로 12시까지 토의를 했다. 회의는 예상대로 교장선생의 주장에 선생들이나 2,3학년 운영위원들이 찬성하여 새로운 우리들 1학년 위원들은 듣기에 급급했다. 중요한 수입이나 지출 내역 등은 서류를 보는 정도에서 그쳤는데 다음부터는 학교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운영위원으로서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교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모임이 있다는 아내가 불광동으로 외출을 하고 나도 학원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기온이 15도까지 올라 포근한 4월이지만 꽃샘추위가 늦게까지 있어서 아파트의 목련과 매화는 작년보다 일주일이나 늦게 오고 있다.
6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거실에 나와서 바라본 밖의 날씨는 잔뜩 흐리고 비가 오려는지 몸까지 피곤하고 좋지가 않다. 9시에 미역국으로 식사를 마치고 쉬는 중에 갓김치를 몇 번 가져온 동네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오늘도 손님으로 왔다. 아침부터 불편함이 생겨 체육관에 간다는 이유로 집을 나섰다가 바로 학원으로 가서 공부를 하며 오전을 보냈다. 점심을 하려고 동생 정환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수업이 일찍 있다고 하여 학원 건너편 가게에 가서 도시락을 구입하여 혼자 먹었다. 우중충한 날씨가 점심이 되면서 화창하게 변하여 해가 쨍쨍한데 차가운 바람은 아직도 옷깃을 붙들게 할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계절의 변화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고 종달새 지저귀는 따뜻한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오후에는 주말 수업을 위해 교재도 연구하고 문제도 만들면서 보냈는데 아침에 체육관을 가지 않아서 그런지 긴 하루였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오니 오늘은 쭈꾸미 매운탕이 준비되어 있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아들까지 모처럼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밤에는 아내가 낮에 구입한 PDP(32만원)를 열심히 공부하라며 아들에게 전달하는데 감사나 고마움의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7일 안방에서 자고 밖으로 나왔더니 정리된 아침과는 대조적으로 아내와 딸이 차가운 거실에서 제 멋대로 자고 있다. 목청에 문제가 있다면 수술이라도 받고 안방에서 편하게 자는 것이 좋을 텐데 당사자인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콩나물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사무소 영어를 마치면 안산에 오른다는 아내가 나간 뒤에 나도 체육관에 가서 땀을 흘리며 보냈다. 점심을 먹는 중에 산을 다녀온 아내가 아무런 말이나 눈길도 없이 그대로 교실에 올라가 투명한 인간이 된 나로서 유쾌하지가 않았다. 오후에 고향에서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연택이와 논농사 문제로 통화를 하여 내일 12시경 김제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이전까지 소작한 상희 형이 작년에 난처했던 상황을 격어서인지 그만 하겠다고 하여 새로운 소작인을 물색하는 과정이다. 오늘 기온은 엊그제에 비하여 다소 낮은 15도에 머물렀는데 그런대로 포근한 봄날이 되어 활동하기에 좋았고 학원에서도 열심히 수업을 하고 마쳤다. 저녁에 서대문 로터리에서 영식이와 최형규를 만나 인터넷에서 유명한 쭈꾸미 집으로 동행했는데 맛에 비해 불친절하고 서비스가 엉망이었다. 어느 상황이나 장단점이 있다고 여기며 식사를 마치고 11시경 집으로 왔더니 아내가 빤히 바라보고 누워만 있어 불친절함은 여기도 식당과 다르지 않았다. 환대는 못할망정 사람이 오면 일어나라고 했더니 무슨 생각인지 한참 후에 달랑 과일즙 하나를 들고 왔다.
8일 김제에 논농사 소작인 문제로 내려가는 날이다. 식사를 마치고 9시에 출발하는 새마을호를 타려고 용산에 갔는데 시간을 착각하여 열차는 8시55분에 이미 출발해 버렸다. 다음 열차 9시5분 KTX를 타고 서대전에 가면 이미 출발한 새마을로 충분히 환승할 수가 있다는 계산으로 서대전까지 바로 예매를 했다. 실제 10시가 지나서 KTX 열차가 먼저 서대전역에 도착했고 20여분 후 들어올 새마을호 열차를 타려고 여유를 부리며 플랫폼에 미리 내려가 서 있었다. 평일이라고 해도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러웠는데 얼마쯤 지나 돌아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어 꿈인가 착각을 했다. 나중에 확인하니 내가 있는 앞으로 기차가 왔고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또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 정신과 감각을 잃고 서 있기만 했던 것이다. 살면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경우도 다 있는가 싶었는데 결론은 플랫폼에 서 있던 10여분 동안 기차가 왔는지 떠나는지 전혀 인식을 못한 상태였다. 다음에 오는 열차를 타고 12시40분 김제에 도착했지만 황당함을 넘어 이해도 안 되고 설명할 수 없는 오늘이다. 역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린 연택이 후배와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마을회관 경로당에 들어가 어르신들을 뵈었다. 모두가 연로하시어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웠고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우리 집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적적함이 더 했다. 지난 달 친구 모친상으로 고향에 오기는 했어도 마을과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 돌아가신 이후 거의 1년 만에 처음이다. 소작은 후배가 한다는 것을 상희 형이 더 한다고 하여 격려하는 차원에서 소작료를 기존 쌀 5가마에서 4가마(쌀 20킬로 16개)로 하향해 주었다. 어머니 산소에 갔다가 다시 나오면서는 형준이 어머니 묘소까지 둘러보고 왔는데 모두가 따뜻한 날씨에 고향의 흙과 함께 잠들고 계시었다. 저녁쯤에 시내에 나와 식사를 하고 9시50분 KTX로 용산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서니 12시가 되었다.
9일 어제 고향에 다녀와서 늦게까지 잠을 자다가 9시경 일어나 식사를 하는데 피곤하여 밥맛이 없을 정도다. 한참 후 아파트 주변에 있는 배드민턴 마당을 1시간 걸었다는 아내가 들어왔고 오늘도 2회차 마인드맵 수업을 간다고 하여 경기빌딩에 태워다 주고 홍제천으로 이동했다. 성산동까지 8킬로를 달리고 기구운동을 하려고 체육관으로 돌아오는데 개나리와 진달래가 활짝 피어 주택이나 아파트까지 온통 꽃의 세상이다. 운동을 마치고 아내를 태우기 위해 경기빌딩에 다시 갔는데 2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전화마저 불통이라서 그대로 학원으로 출발했다. 정환이 동생과 2시에 점심을 약속하여 종로를 경유하여 도착했더니 음료수를 들고 왔고 밖으로 나와 점심까지 사 주어 맛있는 오후를 보냈다. 정환이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20대 중반 백화점에서 물건을 나르다가 내 부름을 받고 학원에 와서 처음 관리를 맡았다. 어느 날 앞날을 생각하여 영어를 공부하라고 지시했더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고사를 했고 며칠 후 다시 요청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하게 물건을 드는 것은 돈만 버는 것이지 미래를 위해서는 가치가 없고 젊은 날 실력을 쌓아 두어야 살면서 좋은 기회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험도 실력도 없다고 계속 못한다는 것을 강제로 중학교 1학년 강의를 맡겼더니 영어사전을 샀고 교재연구를 해 왔다. 형의 지시라 거역도 못하고 공부한다고 낑낑대던 모습이 선한데 현재는 고등부를 지도하고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당시에 도전하여 힘든 시간들을 견디는 노력이 있었기에 시대에 적응하는 지금의 영어실력이 생긴 것이고 살아가는 수단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당시에 긴 안목으로 동생의 앞날을 생각한 내 판단이 그르지 않았고 언제라도 떳떳한 형으로 존재할 수 있어 다행스럽고 지금도 뿌듯한 마음이다. 6시부터 수업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딸과 식사를 하면서 TV를 시청하는 중에 오늘은 봄의 향기가 거실까지 밀려와 있다.
10일 주말이지만 특별한 일이 없어 북한산에 가려는 계획을 세우며 아침을 맞이했다. 식사 후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아들과 딸이 학원과 도서관에 간다고 준비하는데 공부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0시경 오늘 향우회에서 청계산 등산이라고 꼭 참석해 달라는 동창 전화가 와서 북한산 대신 과천 대공원으로 지하철로 나갔더니 고향 선후배 20여 명이 반갑게 나를 환대한다. 11시에 어린이 대공원 앞을 통과하여 점심쯤 정상에 도달했는데 영식이랑 서초구 방향에서 올라온 청계산 정상 매봉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행을 따라 반대방향 동쪽에 위치한 청계사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으러 산모퉁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늘 참석한 향우들은 대부분 60대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50대는 나를 포함하여 서너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향의 선후배들이라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었고 식사 후에 마을버스로 인덕원까지 나와 4호선을 타고 서울역을 거쳐 집에 돌아와 곧바로 잠이 들었다.
11일 중간고사 준비로 강의가 많아 교회에 나가는 것도 망설이고 있는데 고향에서 새벽기도를 마쳤다는 친구가 주님의 은총을 기원하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것도 하나님의 지시이가 싶어 바로 일어나 집을 나서 교회로 향했고 7시30분에 도착하여 맨 먼저 시작하는 1부 예배에 참석했다. 조용한 아침 기도와 찬송으로 1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서는 합정동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사 먹고 논술교실에 9시에 들어왔다. 연속으로 보충과 정규수업을 하고 집으로 내려오는 시간에는 봄의 날씨가 화창하여 공기조차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점심을 먹고 4시에 다시 교실로 올라가 이대부고 중간고사 수업을 시작하려니 또 아들만 보이지 않아 답답한 시간이 되었다. 중이 제 머리 깍지 못 한다더니 아들을 지도하기가 이렇게 힘들어 수업을 대충 마치고 정신도 없이 집으로 내려왔다. 절망의 심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아내가 들어왔고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담배를 피운다고 나섰다가 딸을 태우러 정독도서관으로 향했다.
12일 어제 아들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아 우울한 마당에 오늘 아침은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둡다. 식사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누워만 있는데 산행을 한다는 아내는 내 기분과 무관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나선다. 시간이 지나 거실에 나와 안산을 바라보니 그 사이 날이 밝아졌고 울긋불긋 화려한 꽃들은 한 폭의 비단처럼 눈이 부시다. 10시에 체육관으로 가서 평소보다 더 열심히 운동을 하며 땀을 흘렸더니 우울하고 답답할 때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학원으로 가는 중에 과거에 함께 강의를 한 청산학원 선생들 모임을 만들자는 김용 선배 전화가 왔다. 빠른 시일 내에 만나서 일정을 잡기로 했고 학원에 도착해서는 건너편 한솔도시락 가게에서 불고기백반을 구입하여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에는 엊그제 고향에서 만난 연택이와 향우회 산악회에서 함께 등반했던 선배 등 여러 지인들과 통화를 하며 보냈다. 평상시 학원에서의 수업은 국영수만 하는데 대부분 국어가 1교시 수업이라 오늘도 일찍 마치고 이대부고 근처로 이동했다. 학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가장 많은 운영위원이 나를 부른 것인데 알고보니 이대부고 출신이라 이해가 되었고 그의 팔은 이미 안으로 굽어져 있었다.
13일 바람이 불고 기온은 5도까지 내려가 쌀쌀한데 내일은 1도까지 하강이라니 춘래불사춘 봄은 왔어도 봄이 아닌 요즘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말에 강의할 교재를 정리하다가 10시가 되어 부지런히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하고 바로 학원으로 이동했다. 어제와 다른 점은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하여 왔다는 것인데 상황을 모르는 아내는 김치찌개를 만들었다고 전화를 해 왔다. 학원에 도착하여 가져온 점심을 먹으며 오후 수업을 준비했고 소작을 한다는 상희 형과 통화하여 소작료로 받을 쌀을(20킬로 16개) 택배로 부탁했다. 그 중 일부는 청주 처가와 여동생에게 보냈고 영식이는 쌀이 도착되는 대로 내가 직접 가지고 방배동으로 갈 것이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내려가 더욱 쌀쌀해졌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저녁을 하자는 운영위원들 요청에 오늘은 불참이라고 통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낮에 끓인 김치찌개를 저녁식사로 먹는데 김치에 비하여 고기의 양이 너무 적어 김치탕이 되었고 함께 먹던 딸도 인상을 찌푸린다. 늦은 밤에 국어를 가르친다고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아내 앞에 긴장한 딸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이런 모녀지간의 모습도 살면서 흔한 일은 아니다.
14일 새벽 6시에 눈을 뜨니 안방에 나 혼자 있고 어제 딸을 지도한 아내는 거실에서 날이 밝은 줄도 모르고 자고 있다. 아침 햇살이 봄의 화신처럼 눈부시고 찬란하지만 영상 1도의 기온은 4월의 중순으로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보도를 한다. 20도를 넘었던 작년과 또 15도까지 올랐던 며칠 전과 비교하면 큰 격차의 기온인데 계절이 바뀌는 요즘 각별히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할 때이다. 아들과 딸이 식사를 마치고 학교에 간 뒤에 산행을 하려고 정릉으로 가서 북한산을 올랐고 1시간 이상을 걸어 보국문에 다다랐다. 아래와 다르게 꽃 한 송이 없는 능선을 따라 대성문이 있는 남서쪽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4월의 중순을 보냈고 대남문에 이르러 하산을 시작했다. 3시에 차가 있는 출발 장소로 내려와 정릉에서 성북동을 넘어 학원에 도착하여 누룽지로 늦은 식사를 하고 6시부터 수업을 먼저 시작했다. 밤에 논술교실에서 내일 시험보는 학생들 수업이 있어 서둘러 집으로 왔더니 수학학원에 간다는 아들은 시간이 되어도 누워만 있다. 갑갑한 마음으로 논술교실에 8시에 올라가 학생들과 직전 보충수업을 하고 새벽 1시에 집으로 왔다.
15일 어제 늦게 왔고 거기에 새벽 4시까지 뒤척이다가 잤으니 아침에 피곤하고 밥 먹을 생각도 없다. 뒹굴거리며 오전을 보내는 중에 TV에서는 20여일 전 침몰한 천안함을 인양한다고 중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두 동강 난 선체 뒷부분 함미 안에 젊은 장병들 40여명이 숨진 채 아직도 남아 있다니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침보다 기온이 오른 11시경 체육관에 도착하여 운동을 하고 학원으로 출발하여 집에서 가져온 밥과 멸치 김치와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학교와 운영위원과의 관계 그리고 학교의 실체를 밝힌 글이 주간지에 실렸다기에 서점으로 가서 주간조선 한 권을 사 왔다. 오늘도 운영위원들 모임이 있는데 복사를 하여 배부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토의를 해 볼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가 택시를 이용하여 이대부고 근처로 나갔더니 운영위원 절반 이상이 먼저 자리를 하고 있다. 오늘은 위원장이 된 학부모가 자리를 마련한 것이지만 나이가 제일 많은 내가 사회자의 역할을 하며 잡지 내용에 대하여 토의도 하고 건배도 하면서 저녁을 보냈다. 밤에 집으로 오려고 밖에 나서니 4월 중순임에도 겨울처럼 춥고 바람이 불어 봄은 언제 오려는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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