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김광우)
월주越州 여요餘姚(저장성 사오싱紹興) 사람으로 당나라 초기의 관리이자 문학가, 서법가 우세남虞世南(558-638, 자는 백시伯施)은 수隋나라에서 내사시랑內史侍郎을 지냈던 우세기의 동생으로, 능연각 24공신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조부는 우검虞儉이고 부친은 우려인데 두 사람 다 명성이 높았습니다. 우세남의 숙부 우기虞寄는 진陳나라 때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임명되었는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세남이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우세남은 천성이 고요하고 욕심이 적었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지가 강하여 어릴 때부터 형 우세기와 함께 고야왕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10여 년간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는데, 어떤 때는 열흘 이상을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빗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나라 문제 천가天嘉 연간(560~566)에 부친 우려가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우세남은 어린 나이에 애통함이 너무 지나쳐 상복을 입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우려의 두 아들이 박학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그들을 부조하고 보호하게 했습니다. 우세남은 상복을 입는 시기가 지났음에도, 상중喪中과 마찬가지로 계속 검소한 생활을 했는데, 진나라 선제 태건太建 말년(582)에 숙부 우기가 보응현寶應縣의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살아 돌아왔는데, 그때서야 우세남이 채식을 멈추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진나라 멸망 후 우세남과 우세기는 수나라의 장안長安(시안西安)으로 갔고, 그곳에서 형제가 동시에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서진西晋의 육기陸機, 그 형 육운陸雲과 비교하곤 했는데, 당시 수나라 양제가 그들의 명성을 듣고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세남은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계속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에 황제가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당시에 형 우세기는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고, 형수는 왕족의 옷과 비슷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세남은 그들과 함께 살지 않았고, 평소 가난하고 검소한 그의 성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618년에 강도江都(장쑤성 장두현)에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신하로 있던 우문화급宇文化及(?-619, 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이 모반을 일으켜 양제를 살해한 것입니다. 성격이 간교하여 법도를 따르지 않은 우문화급은 양제煬帝가 태자였을 때 천우승千牛丞에 올랐고, 거듭 승진하여 태자복太子僕이 되었습니다. 양제가 즉위한 뒤 옛날 은혜를 믿고 탐욕이 특히 심했습니다. 618년 황제가 강도에 갔을 때 북방이 소란하자 금위군장사禁衛軍將司 마덕감馬德勘 등이 그를 들어 반란의 수괴라고 하자 병변兵變을 일으켜 양제를 살해했습니다. 우문화급은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세워 황제로 삼은 뒤 대승상大丞相이 되고,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향했습니다. 이밀李密과 싸워 불리해지자 나중에 양호를 죽이고 자립하여 허許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는 북쪽으로 요성聊城으로 달아났다가 두건덕竇建德에게 잡혀 살해되었습니다.
우문화급이 양제를 살해하고 당시 내사시랑을 맡고 있었던 우세기도 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우세남이 형 우세기를 끌어안고 매우 슬퍼하며 대신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으나 우문화급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형이 죽자 우세남은 깊은 슬픔으로 인하여 몸이 상해 피골이 상접할 정도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 형제의 우애를 칭찬했습니다. 우문화급이 요성聊城(산둥성 랴오청시)에 이르렀을 때, 우세남은 반란군의 수장 두건덕에게 붙잡혔는데, 두건덕은 그를 죽이지 않고 황문시랑黄門侍郎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이 두건덕을 멸망시킨 후 우세남은 참군하게 되었습니다. 곧 홍문관학사로 임명되었고, 방현령과 함께 문한文翰(공문 서찰)을 관장했습니다. 태종은 우세남에게 <열녀전列女傳>을 이용해 병풍을 꾸미기를 원했고, 당시에 원본도 없는 상태에서 우세남은 직접 조각하며 글을 썼는데,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세민은 태자를 봉한 후에 우세남을 태자의 중사인中舍人으로 세웠습니다.
태종 시기에 우세남은 저작랑著作郎의 자리에 올랐고, 진왕부秦王府 18학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8학사는 태종이 문치文治 체제 확립을 위해 문학관을 세우고 학사 18명을 불러 모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퇴직하기를 원했으나,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우세남은 계속해서 퇴직을 청하고 직책을 거절했지만, 결국 비서소감秘書少監을 맡게 되었습니다. 태종 이세민은 그의 박식함을 신임하고 항상 군사와 정치에 관한 대사를 처리할 때 그와 의논하곤 했습니다. 우세남은 용모는 보잘것없고 몸도 매우 허약했지만, 성정이 강하여 정치에 잘못이 있으면 직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세민은 대신들에게 우세남을 칭찬했습니다.
“짐이 한가한 시간에 우세남과 고금古今의 정사政事를 논할 때면 그가 한 글자의 실수도 한 적이 없어서 한 번도 원망스러운 때가 없었다. 그는 그 정도로 진실하고 성실하다. 내가 그를 임용한 것이 아주 만족스럽다. 군신君臣이 모두 그와 같다면, 이 세상에 다스리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
우세남은 여러 번 태종에게 정사에 부지런히 임하도록 은근히 충고를 건네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왕이 정치에서 잘못을 할 때는 시시비비를 가렸습니다. 634년에 룽산隴山에서 산사태가 났는데, 이세민이 천변天變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세남은 진晋나라 왕조 이래로 발생했던 산사태의 예를 들며 아뢰었습니다.
“왕께서 들으시기를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덕과 의리가 없다면 기린과 봉황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정사에 허물이 없다면 액운이 어찌 손실을 입힐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공功에 의해 사람을 높여서도 안 되고, 옛 성현을 돌아보아 자신을 반성하며 태평함이 자만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일은 마지막에도 처음과 같이 신중하여야 합니다.”
이세민은 이를 듣고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여기서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습니다.
우세남은 이세민에게 왕릉을 짓고 장례를 거대하게 치르는 것을 그만두도록 권했으며, 또한 사냥을 그만두고 정사에 좀 더 임하도록 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시의 정관의 치貞觀之治에 적극적인 작용을 했습니다. 이세민은 일찍이 우세남에게는 오절五絕이 있다며 “첫째가 덕행, 둘째가 충직, 셋째는 박학, 넷째는 문사文詞, 다섯째는 서한書翰이다”라고 칭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