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많이 편찮아지신 (본인은 절대 몸이 편찮아지심을 절대 인정안하시는ㅠㅠ
그래서 요즘 몸과 마음이 지치는)어머니와
최근까지 이야기를 할때마다. .
(최근에 어머니께서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해방될때까지 일본 기타규슈에
사셔서 일본에서 전쟁 겪은 이야기와
해방되고 한국에 9살에 나오셨죠.
그리고 6.25 전쟁 이후 부산시절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 다만 제가 부산을 좋아하는거와
달리 어머니는 부산을 되게 안좋아하십니다.
말은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지만요)
그래서 6.25 한국전쟁시기 이야기하다가
이 쓰레기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께서
"잔인한 이야기하지마라"며 회피를
하는 인물입니다.
(연세가 많이 드셔서 잔인한거나 무서운거
안보시거나 듣지 않으려는것도 있지만.
저도 지금은 무서운거 안무서워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무서워질수도
있겠죠. ㅠㅠ사람일은 모르니)
그런데 이놈이 단순히 잔인한 놈이라
회피하는것은
아닌듯 합니다.
물론 극악무도의 끝판왕이고
잔인한 놈이기도 합니다.
과거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 이 악마새끼
특집을 다루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죠.
(물론 지나가는 식으로 이름이 언급된 적은
있습니다. 거창양민학살사건때
국회의원들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국군을 공비로 위장해서 방해까지를
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이제이가 정치 이야기보다
다시 역사특집으로 갔음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제가 되게 싫어하는 !!
한국현대사에 두놈
(2 son of bitch)이
있는데 !!!
한놈이 이미 죽은지 오래인 이놈이고.
또 한놈이 아직 살아있죠.
(죽은 이놈에 비하면 아직 살아있는 백선엽은
차라리 양반이고 .이이제이에서 과거 방송한
김창룡도 권력에 미쳐 정적을 빨갱이로 몰았던
놈이지 이놈같은 사이코패스는 아니죠.
악평을 듣는 두 인물이 이 정도니 지금부터
이야기할 이 악마가 어느 정도인지 알수 있죠. )
개인적으로 이놈은 이미 죽은 놈이니
빨아줄것도 없고 실컷 욕이나 퍼부어도 되고.
앞으로 죽을 놈중에 여기 나인틴 회원이시라도
이 새끼가 죽었을때 혹여 명복을 빌 경우 저한테
지탄을 받으실지 모르는데.
그 살아있는 한 놈은 바로 "전두환"이죠.
사설이 너무 길었는데 . .
이제부터 이야기할 이미 죽은 놈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입니다.
이놈이 저희 어머니께서 잔인해서만
회피하는것이 아니라는 이유는
이놈이 저희 외가에 놀러오던 놈이죠.
즉 김종원의 처제가 당시 경남여고를
다녔는데 . 김종원 처제를 가르치던
교사가 저희 외숙부였죠.
그래서 한국 전쟁시기에 저희 외가에
왕래를 하였나 봅니다.
외숙부는 그후 민주당(김대중.김영삼
민주당 시절이 아닌 신익희,장면시절
민주당)에 투신해 이 악마와 딴길을
갔지만 한국전쟁시기까지는 처제의
스승이라 친했나 봅니다.
당시 어머니는 중.고등학교를 다닐때라. .
(한국전쟁 당시는 중.고가 통합되어 있었죠)
김종원이 그런 악마였는지 몰랐던 점도
있었겠죠.
김종원을 평가한 자료에는 여수.순천사건에
이런 자료가 있습니다.
[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사령관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후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시키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 앞바다로 밀어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169, 213, 331쪽)]
이놈이 얼마나 사이코패스냐면
사람 목들을 반란군이라고
잘라서 (대부분 양민들)참수한 머리들을
마치 수박처럼 넝마에 넣어서
여수.순천 14연대 반란 진압을
해상에서 지원하던
당시 해군 지휘관에게 보냈는데
그 해군 지휘관이 그걸보고 다시는
김종원을 인간으로 안봤다고 합니다.
김종원이 위에 자료와 달리
관동군 헌병이었던것은
아니지만(아마도 김창룡과 혼동이
온듯)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죠.
문제는 김종원이 2차세계대전당시
뉴기니 전선에 있었다는것이었죠. ㅠㅠ
다음은 김종원의 약력이죠.
☞김종원은 1922년 7월 8일 경북
경산군 중방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학교를 정확히 어디
다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40년 일본군에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한다.
당시 일본 육군 하사관은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김종원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전투에 임했다.
특히 김종원이 참전했던 파푸아뉴기니는
일본군과 연합군(미군+호주군)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던 곳으로
1942년 5월부터 1944년 8월까지
2년 넘게 전투가 이어졌다.
일제는 파푸아뉴기니에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군징집자 4410명이
동원했는데, 그 가운데
4076명(92.43%)이 사망했다.
열대우림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은
질긴 소모전을 이어나갔고,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을 끊는
방법을 자주 썼다.
원숭이를 잡아먹고 인육을 먹으면서
버텼지만, 일본군 내에서 굶어죽은 이가
속출했다.
김종원은 이런 곳에서 살아남았다.
김종원은 이후 인육을 먹었던 것을
자랑스레 얘기하고 다녔고,
참혹한 전쟁터에서 길들여진
잔악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일제 패망 이후 김종원은 조선으로 복귀한다.
1946년 서울 동대문경찰서
교통과장으로 근무하다 같은 해
남조선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가
창설되자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일본군 복무 당시 형성된
그의 잔악한 기질로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이미 경찰에 있을 때부터
부하경찰과 체포된 사람을
심하게 폭행하는 등 악행으로
원성이 높아 자주 보직에서
해임되곤 했으며,
1947년 9월 25일부터
1948년 6월 20일까지는
파면상태에 있기도 했다.
잔악한 기질로 미국
군사고문단에게도 미운털이
박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사람은 초대 국군 총사령관인
송호성이다.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 창군의 주역이었다.
(아이러니하게 송호성은 6.25때
납북되어 거꾸로 인민군에서
싸웁니다)
...
송호성은
국방경비대 육군 총사령관을
거쳐 1948년 11월 20일까지
국방경비대 최고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10월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일대를 장악한다.
당시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경남 마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14연대에게 장악당한
여수시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김종원은 무모하게
상륙하려다 많은 부하를 잃었다.
진압군은 이후 전열을 정비해
10월 27일 장갑차와
박격포 포격을 앞세우며
여수신항을 통해 여수시내로
진입했다.
그때 김종원은 박격포 공격을
했는데, 진압군이
미처 작전을 전개하기도 전에
박격포탄을 쏟아부어
국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이때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의 작전능력을
형편없다고 평가했다.
여수시내에 5연대가 진입했을 때
이미 14연대는 지리산 일대로
퇴각한 상태였다.
손쉽게 여수시내를 장악한
진압군은 ‘부역자 처벌’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김종원은 잔악한
기질을 마음껏 드러낸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
당시 여수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모아 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때 젊은 남성 가운데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고 있거나
머리가 짧은 사람은
부역자로 몰려 죽었다.
학교 운동장 한 켠 버드나무
밑에서 김종원은 시내에서
따로 끌고 온 사람들을
일본도로 목을 베고,
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사격시험을 하듯 죽였다.
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어느 골목에서 마주한 청년들을
모두 김종원이 현장에서
일본도로 베는 등
마치 분풀이를 하듯 사람들을 죽여댔다.
여수·순천 사건을 진압한
그는 이듬해(1949년) 소령으로
승진해 부연대장을 맡았고,
그해 8월에는 연대장에 오르게 된다.
그는 3사단 휘하 23연대 지휘를
맡았는데, 23연대는
영남지역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한 부대였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여수,
제주도, 지리산 일대, 거제,
양산, 포항, 영덕, 경주,
울산, 고령 등을 돌면서
빨치산을 토벌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이 가운데 영덕, 거제, 산청에서는
그가 저지른 학살이 기록돼 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일부의 증언이
남아 있다.
구체적인 피해자 숫자와
기록이 남아있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950년 3월 그는 23연대를 이끌고
영덕에 주둔 중이었다.
영덕~영해 등 경북 동부지역에서는
김달삼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으나
1949년 대부분 토벌당한 상태였다.
1950년 3월 14일 영덕 중곡동에서
김종원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된 3명을 처형했다.
당시 현장에서는 영덕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33명이
처형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는데 겁을 주기
위해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처형당하던 한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이에 분노한 김종원은 보고
있던 33명 가운데 31명을
학살했다.
군인이 뒤에서 총을 쏘면
파놓은 구덩이에 한 명 씩
떨어지도록 했는데,
그는 이것이 답답했는지
별안간 직접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신의 내장이 튀면서 현장은
난장판이 됐고, 그걸 지켜본 사람은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1950년 5월 30일 김종원 부대는
빨치산을 토벌하고 퇴각하다
거제시 마전동 공동묘지에서
43명을 집단 학살했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15일에는
김종원 부대에 의해 보도연맹원
160여 명이 영덕읍 화개리
뫼골에서 학살당했다.
한때 ‘김종원이 영덕에서
수천 명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영덕에서는 민간인 피해가 컸다.
김종원은 1950년 7~9월 일어난
마산·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에도
개입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만약 북한군이
부산까지 쳐들어오면
형무소 재소자 3500명을
죽여야 한다고 미국
군사고문단에게
주장했으며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를 만류하면서
‘적이 부산 외곽까지 쳐들어오면
기관총으로 사살해도 된다’고
허락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부산형무소에서
1500명, 마산형무소에서
최소 717명, 진주형무소에서
최소 1200명 등
3400명의 재소자와
구금 중인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김종원은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지구위수사령관,
부산지구 헌병대장,
경남지구계엄사령관을 역임했다.
...
1950년 8월 24일 양산 동면
,원동면,물금면,
웅상면,북면,양산면,
하북면 등 7개 면 20~50대
주민 약 700여 명이 김종원
부대·23연대·경찰에 의해
학살됐다고 한다.
1951년 3월 김종원은
11사단 예하에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김종원 부대는 피난민
약 500여 명을 버스
11대에 태우고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점동
사이에 있는 소정골짜기에
내리게 한 뒤 모두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 이를 ‘산청 외공리 학살’이라고 한다.
당시 오랜 빨치산 활동과
토벌의 반복으로 피난민
가운데 성인남성은 거의 없었고
아녀자와 어린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김종원은 빨치산 토벌을 하면서
자신을 ‘백두산 호랑이’로 자칭하고,
자신의 부대를 맹호부대라고 칭했다.
이에 미국 군사고문단도
그를 ‘타이거 김’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김종원 부대가 머문
지역 시골 어르신들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을
기억할 정도로 그의 악명은
높았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그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김종원의 총부리는 단순히
민간인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하들도 서슴없이 죽였다.
그는 즉결처분을 즐겨 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영덕에서 23연대장을
하고 있을 때
영덕 남방의 고지를 빼앗기자
고지 탈환 명령을 내렸다.
소대장이 고지탈환에 실패하자
소대장과 사병 1명을 즉결처분했다.
또한 육사 8기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23연대에 일본군식
‘반자이 돌격(전멸을 각오한
단순한 정면 돌격)’을 지시하자
작전장교였던 중위가
이를 반대하고 우회돌격을
제안했다.
그러자 김종원은 옆에 있던
헌병에게 바로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작전장교는 바로
권총을 뽑아들고 헌병과
권총을 겨누고 대치하기도 했다.
부하들끼리 총을 겨누게
한 지휘관이었다.
심지어 미국 군사고문단이
보는 앞에서 부하를 죽이기도 했다.
“김종원이 자신의 부하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있다.
어젯밤에는 미군전초기지에서
총질을 했다.
총 개머리판으로 부하를
구타하고 영덕에서
후퇴하는 사이 실종됐던
장교를 사살했다.
부하들이 김종원을 먼저
제거하지 않는 한 또
다시 총질할 것으로 보인다.”
-1950년 7월 26일 미군
군사고문단 에머릭 대령 보고서
1950년 7월, 영덕을 빼앗기고
전투에 무능하고 부하들을 죽이는
행동을 더는 덮어둘 수 없었다.
김종원은 23연대장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다음달인
1950년 8월 김종원을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헌병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고작 28살이었다.
김종원은 언론사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자신의
부대 기사를 반드시 챙겨보고
자신을 ‘타이거 김,
백두산 호랑이’로 쓰도록 했다.
1950년 부산에서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계엄지구 민사부장으로
있을 당시 부산 언론은
김종원과 관련된 기사를
항상 1면에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언론들은 김종원의 기사를
전진 배치시키지 않았을 뿐더러,
김종원이 병사 단속을
잘 못한다는 비판 기사를
쓰기도 했다.
격분한 김종원은
당시 연합신문 부국장과
기자를 불러 중태에
이르도록 폭행했다.
결국 기자들의
항의로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기자들의 김종원에 대한
반감은 높았다.
하지만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는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김종원이
부산에 있을 때 그에게 직접
보고를 받는 일도 많았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아꼈고,
1952년에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한 김종원을
특별사면하고
경찰 간부로 채용한다.
"당장 인플레 잡아와!"
김종원이 특별사면으로
석방될 때 군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특히 당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김종원 석방을 놓고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고
초안을 마련했다.
초안에는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 하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후 김종원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전북경찰국장,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을
거친 후 1956년에는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격인
치안국장을 지냈다.
경찰에 있을 때도 그는 말썽을
일으켰다.
순시 도중 파출소장의
계급장을 떼어 내 안면이 있는
순경에게 달아주고,
부하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찰서장을
폭행하기도 했다.
경남경찰국장
(경남지방경찰청장 격)
시절 참모회의장에서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힘들다’는 말을 듣자,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56년 9월 28일 오후,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면 부통령은 총탄에
왼손을 다쳤다.
민주당원을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이 수습되는 듯 했다.
그러던 중 구속된 이덕신이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다’고
폭로했다.
김종원은 이를 극구 부인했으며
당시 이승만 정권이 공고하던
시절이어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됐다.
승승장구하던 김종원에게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은
1960년 4·19혁명이었다.
그를 아끼던 이승만이 망명하고
그를 지켜줄 보호막이
사라지자 다시
장면 부통령(당시 국무총리)
피습사건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다.
김종원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왔고 결국 김종원도
피습사건을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종원은 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출감했고,
1963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1살이었다.☜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그 유명한 4달라 짤이 돌아다니며
우스개같이 회자되지만 ..
실제는 엄청 잔인한 놈이고
우스개 대상이 될 놈은 아닙니다.
동영상협상에 성공한 김종원 (4달라 리버스)평행세계에서 자신의 협상 기술에 오히려 당해버리는 김두한 이야기.www.youtube.com
■SBS 방영한 야인시대에 나온 4달라 김종원
짤방 영상.
실제는 이런 점잖은 모습이 아닌 악마였죠.
김종원(1922~1963)
참고로 역대 경찰청장 사진에
이놈이 올라가
있습니다.
왜냐면 경찰청장 전신인
치안국장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도중
이 악마같은 놈을 두고 작은 언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런 놈인줄 몰랐던거겠지만 말이지요.
첫댓글 이정도면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아닌가요?
그리고 이런 사람의 인격은 과연 선천적인지 아니면 위에 나와 있는대로 일본군 시절의 충격으로 그렇게 된 건지 궁금하네요
진짜 유영철이 권력을 잡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니 유영철보다 더 하죠.
직접 죽인 학살만 해도 셀 수가 없으니까요. 당시에는 사이코패스
정의도 부적할때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영철을 훨씬 능가했을겁니다.
그리고 제 추측인데 김종원은 선천적이라기보다는 일본군 시절
충격으로 그렇게 된걸로 보입니다.
2차세계대전당시 뉴기니 전선은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기면서
(미 해군이 일본 해상 보급을 끊었죠)
지금도 뉴기니는 접근이 쉬운것이
아닌데 연합군이나 일본군이나
다 간과했죠.
일본군들이 식인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곳이 뉴기니 전선인데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면 김종원이
뻥이 아니라 식인을 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죠.
당시 기록에는 일본군이 아군보다
현지주민들이나 연합군 시신이나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급장교야 보급을
받았겠지만 병들과 하사관들은
식량보급에 허덕였을겁니다.
뉴기니 전선에서 일본군의 식인이야기는 조만간 카페에
올려보겠습니다.
그런데서 살아돌아온 군인은
둘중에 하나가 되죠.
악마가 되서 돌아오거나.
아니면 전쟁에 반대하며
반전주의와 평화를 부르짖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풍문으로 들었어 전쟁은 정말 사람의 끝을 보이게 만드는 거 같아요....
저 역시 전두환은 많은 고통을 느끼면서 죽으면 좋겠네요
@R. 코젠 전두환은 진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죠.
광주학살.삼청교육대.고문말고도
이놈은 진짜 죽어서도 곱게 묻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MBC스트레이트 몇주전에 하신거
보셨나요?
전두환 정권 당시 그를 보호하려다
억울하게 죽은 군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풍문으로 들었어 저는 티비를 전혀 안봐서요^^
전두환은 심청교육대 이야기만 대충 찾아봐도 “이놈은 곱게 제명대로 죽으면 안되는구나”라고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