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실제로 옛날 유명인이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만들어준 선물(?)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다시 보게 되니 조금은 익숙합니다. 그런데 실제 이런 일이 주변에서 일상화된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 궁금하기도 하고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나신다면 뭐라고 해야 하지요? 반갑습니다. 거기서 잘 계시나요? 어떻게 지내세요? 괜찮으세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실제 그곳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은 자가 있는 곳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이곳 산 자들이 상상해서 만드는 것이지요. 종교를 떠나서 그곳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도 그곳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지 않습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가서 고고학 연구를 위하여 유물 탐사를 한다고요? 자동차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냥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실제 우리는 죽은 후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어떤 모습으로 변하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합니다.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냥 살아 있는 자들의 희망사항입니다. 잘 아는 대로 죽은 자들은 대부분 의상이 산 자들과는 다릅니다. 잘 아는 대로 ‘수의’를 입고 떠납니다. 혹 특별한 경우에는 그냥 평상복 입은 대로 장례를 치를 것입니다. 군인으로 전사하였다면 그냥 군복을 입었겠지요.
만약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의 살아있는 모습과 함께 살고 싶을까요?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당에 그게 실감날까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혹 귀신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섬뜩한 이야기 아닐까요? 처음 얼마간은 혹시 상실의 아픔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깨닫게 되면 그만큼 오히려 충격이 더 커지지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떠난 자는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도리이고 남은 자는 상실의 상태에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자신의 남은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린 딸이 상처를 입을까 죽은 엄마에 대해 죽었다고는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업체와 계약하고 소위 인공지능으로 계속 살아서 활동하게 합니다. 물론 그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손녀에게 엄마는 일 때문에 멀리 해외 출장 중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영상통화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귀국합니다. 그리고 공항에서 만나게 됩니다. 만날 수 있습니까? 엄마는 사실 영상 속 가공의 인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할머니도 당황합니다. 업체는 그 엄마를 통해서 어떻게 해결할까요? 이 아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배려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남자 ‘태주’가 사고로 인하여 인사불성이 의식을 잃고 입원 중입니다. ‘정인’이는 남친을 잃고 싶지도 않고 떨어져 있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업체에 의뢰합니다. 태주가 지구 밖 우주에서 일하고 있는 설정을 합니다. 아침 시간이 되면 휴대폰 알람으로 정인을 깨워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주선에서 일하는 애인은 멋진 설정입니다. 실물은 병원 입원실에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 현실을 잊으며 날마다 좋은 아침을 맞는 것입니다. 태주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지구를 내려다보며 한 날을 시작한다니 멋집니다. 하기는 현실로 돌아오면 그만큼 아플 것입니다. 어쩌면 공상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니 말입니다.
물론 아침만 통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싶을 때 하시라도 가능합니다. 정인이가 통화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태주가 걸기도 합니다. 그런데 태주가 하는 것은 업체의 프로그램으로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어느 날 태주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렇게 둘이 만났는데 문제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섞인 것입니다. 정인이 태주와 데이트하는데 전화 벨이 울립니다. 언뜻 정인이가 전화를 끊고 피하는 것이 이상하여 왜 자꾸 피하냐고 핀잔을 주면서 의심합니다. 그래서 정인이가 핸드폰을 태주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켠 태주가 그 속에서 자신을 보며 놀랍니다. 무슨 생각이 들까요? 왜 내가 여기에?
과연 이런 세상이 올까요? 이게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세상일까요? 아직 당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가능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가상의 인간도 똑같이 나이를 먹을까요? 물론 업체에서 그에 맞도록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다 가상의 인간이 될 수는 없겠지요. 사실 한 사람은 실제 살아서 사용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까요. 그런 실제적인 문제를 떠나 죽은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냥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긴 시간을 지내기에 오히려 유익하다 싶습니다. 영화 ‘원더랜드’(WONDERLAND)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