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깔라(김 웅)님의 교우단상 : 짠돌이의 좌충우돌 네팔 여행기 7- ‘네팔’과 ‘내 팔자’ ◈
에메랄드빛의 빙하수가 흐르는 ‘모디콜라’ 강을 따라 히말라야를 내려가는 버스, 차장은 뻥 뚫린 문밖으로 손을 뻗어 호객을 하며 걷은 돈을 세고 있고, 콩나물시루처럼 가득한 승객은 오래전 우리나라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군상이 펼쳐져 있었다. 운전석 옆의 ‘ㄷ’자 배열로 된 좌석에 난 사람들과 함께 빙 둘러앉았다. 노면이 거친 내리막을 지나며 서로의 어깨와 무릎이 부딪치는 현상은 자연스러웠다. 네팔 청년 둘은 옆 좌석의 유럽 출신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고, 산에서 만나 내게 정류장의 위치를 알려주시던 할아버지는 버스의 급제동에 열심히 내 무릎을 잡으면서도 다른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고, 돌이 지난 아이를 엎고 있는 아주머니는 내 배낭을 기둥처럼 부여잡고 계셨다. 현지의 뽕짝 메들리와 곡예 운전에 취한 버스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여행자의 도시인 ‘포카라’ 속으로 들어갔다.
보통 롯지는 3천원, 시내 숙소는 6천원으로 저렴한 숙박이 가능한 네팔은, 겨울에도 시가지는 늦가을 날씨이지만, 롯지에서의 생활처럼 숙소에서도 겉옷을 껴입고 자야할 만큼 밤이 춥다. 덥수룩한 수염과 세 번 정도 머리를 감고서도 남아있는 비듬, 속옷 두 장과 양말 세 켤레로 행복하게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친 이 밤에 숙소의 주인 비쇼와 함께 마신 맥주 한 잔에 피로가 가셨다. 현지 맥주를 추천해주기 위해 나를 스쿠터에 태워 마트까지 데려다준 비쇼는 한국에서 몇 년을 일하면서 한국어와 요리를 배워와 지금은 숙소 운영을 하며 여행사 사업으로 확장을 할 계획에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숙소에서 먹은 한국 음식들은 수준급에 달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식사로 ‘디도’ 라고 불리는 네팔의 전통 음식을 먹어보겠다고 곡물 가루 반죽을 입으로 들이민 후 동원된 나의 모든 얼굴 근육에서 참담함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지역마다 정전 스케줄이 정해져 있어 내 방의 전등이 꺼지는 현상에 난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물집이 커다랗게 잡힌 발바닥을 붕대로 감고 포카라의 곳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려고 발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의 모든 부위가 당겨와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근육이 자랄 생각에 나는 이 짜릿한 고통을 즐겼다.(헬스장 다녀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ㅎ)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의 네팔리는 패딩과 청바지 차림이고, 중장년의 남성들은 전통모 ‘토피’를 쓰고 다녔다. 짙은 피부색에 코가 높고 눈이 큰 네팔인들은 중동 사람과 인도 사람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것 같았다.
현지인들만 사는 동네로 들어서니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이 푹 들어간 매서운 눈빛에도 난 곧잘 적응하며 쏘다녔다. 창문이 없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유난히 얼굴과 머리가 작은 남자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의 이마에 ‘티카’ 라고 하는 빨간 점이 보였는데, 이 붉은 가루를 묻히면 힌두 신의 축복이 함께 한다고 한다. 또한 길거리에는 청(天)-백(雲)-적(火)-녹(水)-황(地)의 경전이 적힌 오색 깃발 ‘타르초’가 바람에 나부끼는데 이는 인간의 소망이 하늘에 닿길 바라는 의미로 불교문화이기도 하다. 사실 네팔은 힌두교와 티벳 불교가 혼합되어있는 곳이었다. (석가모니가 네팔의 ‘룸비니’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함)
‘레이크사이드’ 라는 거리로 장소를 옮겼다. 전망 좋은 호숫가인 ‘페와호수’ 는 최대 번화가로 세계 3대에 속하는 패러글라이딩과 휴양을 즐길 수 있는 가게들이 즐비해 있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쉬고 있었다. (내 버킷리스트에 적힌 패러글라이딩인데...못 탐!ㅠ)
이곳에서의 점심과 저녁식사는 야크 치즈를 제치고 나의 네팔 최애 음식이 되었다. 내 손 길이만큼의 빵이 네 개가 나오고 치즈, 참치, 치킨, 계란의 내용물이 든 이 샌드위치 가격은 6,500원! 빵의 식감도 좋아서 미국의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저리가라 할만 했다. 저녁으로 먹은 남미 음식 ‘비건 토푸 엔칠라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두부와 각종 채소, 아보카도를 또띠아에 넣은 음식으로 내 손의 두 배가 넘는 크기의 음식이 4,300원으로 저렴했으니 가히 1순위로 칭할 만 했고, 입가심으로 사먹은 콜라는 국내보다 탄산이 훨씬 강해 포카라에서의 마지막 쾌감을 더했다.
아침 일찍 짐을 싸고 예약된 카트만두행 버스에 올랐다. 친절한 비쇼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스쿠터와 함께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과 매력적인 포카라도 점점 멀어져만 갔다. (사진 속 세계 유일 미등정 산 ‘마차푸차레’, 이중 봉우리로 옆 사면은 마치 물고기 꼬리를 닮음)
포카라-카트만두행 버스는 산허리를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약 200km의 거리를 달린다. 전주와 서울 간 거리와 같지만, 소요 시간이 장장 7시간 걸린다는 것을 통해 난 네팔의 모순적인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 일차선의 산간도로가 그야말로 험로이기 때문에 차량들은 서행하는 반면 추월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며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밥 먹듯이 하기도 했다. 점입가경, 추월을 당하는 차 사이로 오토바이 떼들도 동시에 지나가고 있으나, 기사님은 개의치 않을 뿐더러 현지인들의 동요는 보이질 않고 오히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들리에 취해 있었다. 이러한 무질서는 시내를 포함한 네팔 전역에서 일어나는데, 산의 환경과 인간의 욕심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이 상황이 마치 히말라야에서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네팔리들은 ‘비스따리-천천히’ 라는 말을 더욱 더 강조하는 듯 했다.
카트만두에서 머물렀던 숙소를 찾아가 놓고 갔던 점퍼와 충전기를 회수 하고, 이곳 게스트 하우스 방에서 친화력이 좋은 스무 살의 인도인 세 명을 만났지만, 난 그들과 대화를 하며 언어의 장벽을 다시금 느꼈다. 나의 단문의 질문과 대답은 내게 성취욕을 느끼겐 했어도 심화되는 내용의 표현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천천히 말해달라는 나의 부탁은 그 효과가 지속되지도 못했는데, 인도와 네팔 사람의 영어가 유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화가 계속될수록 자신감이 위축된 난 입을 닫고 일찍 눈을 붙이는 것으로 네팔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둘째 날에 들렸던 식당에 다시 가서 한국인에게 선물 받은 아이젠을 사장님에게 기증하고 남은 루피를 달러로 환전 받고는 공항으로 걸었다.
내 성공적인 여행의 남은 단계는 차질 없는 공항 절차뿐인데 마지막까지 사건은 이어졌다.
내가 탑승할 게이트가 바뀐 사실을 안 것은 여행 초짜를 떼는 경험이기도 했고, 여전히 단수 여권 문제로 고위 감독관의 승인 처리를 받은 것은 내게 담대함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기내에서 눈치 안보고 시종일관 방귀를 뿡뿡 껴댔는지도 모름 ㅋㅋㅋ)
귀국길에 두 번의 비행기를 환승하며 겪은 킬링 포인트는 비행기가 연착되어 탑승 수속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급속 환승 절차를 이용하여 신속히 탑승을 마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네팔인과 일본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불안을 덜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사히 귀국한 다음날인 2019년 12월 31일, 네팔에서 만난 부부에게 문자로 새해 인사를 드렸다. 자정을 지나 2020년 새해 첫날 새벽, 공중파 방송의 ‘영상앨범 산’ 이라는 프로그램을 가족들과 함께 봤는데 소름이 돋았다. 대둔산 등반을 하는 사람이 내가 며칠 전 히말라야에서 만났던 이기열 삼촌이 아니던가! 가족들에게 히말라야 썰을 풀며 난 자랑을 했다. 다음날에 안명득 삼촌과 에게도 새해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로 두 분의 답례를 듣기도 했다. (등반 장면 끝내주게 멋지십니다 ^^)
내가 타이핑 작업에 몸 담고 있는 토익 학원에 일거리가 생겨 들렸다. 점심시간에 원장님을 비롯한 직원들과 배달된 피자를 먹고 있는데, 원장님을 제외한 초면의 사람들 중 낯이 익은 사람이 있었다. 내 기억엔 중학교 때 같은 반인 여자애가 확실했다. 서윤이 키보다 좀 더 큰 그녀는 이곳에서 조교를 맡고 있으며,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고, 인천 국제공항 승무원의 취직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난 그녀에게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다. 연이어 내게 언제 취직할거냐는 원장님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못하자 “그래, 아버지가 연세가 있으시니 여행은 이제 그만 다니고 얼른 일해야지” 라는 말씀과, 여행 중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해 쩔쩔매던 내가 스쳐 지나갔다. 잠시 멍을 때란 후 나의 기억은 연쇄 반응이 일어나듯 산을 오르기 전 숙소에서 카톡으로 화상 전화를 한 친구가 생각났다.
“야, 웅아! 히말라야에 갔다는 뜬금없는 소식에 놀라기도 했는데, 회사 사람들에게 네 얘기를 했다. 어떻게 혼자 갈 생각을 했냐?.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알다시피 직장생활 하고, 같이 살고 있는 애인과 가정도 꾸려야 하는데..”
“대신 난 시간을 팔아서 이루잖니. 이제 군대도 가야하고, 취업도 해야 하고...”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감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결핍에 대한 보상을 하며 극복을 해나가지만 과도한 열등감은 독이 되기도 함을 난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주 느린 속도로 처리해 온 나의 잠재력 확인 과정을 내 친구는 좋게 봐주는 듯 했다. 작지만 강한 대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보인 것, 연극을 하며 이뤄질 수 없는 배우의 현실에 만족해 본 것, 영어를 파헤쳐 본 것, 글을 쓰며 또 다른 이상을 본 것, 노래에 대한 잠재력을 느낀 것, 해외여행을 즐기며 해외 간호사의 내 꿈을 키운 것 등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히말라야 여행 덕에 4,000m에 오른 ‘결과’ 보다는 우여곡절 끝에 완수해 나간 ‘과정’에 대한 뿌듯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난 혼자 해외 여행하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 대학 때 보내준 단체 미국 여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효사와 한별이의 해외여행 단상에 도움을 받기도 했고 공감이 가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효림이처럼 여행의 고수는 물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있겠지!
스무 장이 넘는 이야기에 다소 지루할 수 있겠지만 ‘짠돌이의 좌충우돌 난세 극복기’의 주제에 맞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도움을 받는 것에 초점을 두어 써보았다. 맨날 늦게 보내는 글에도 목사님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다음 나의 무대는 어디일까? 어디선가 장병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히말라야 눈사태로 한국인 4명이 실종된 보도 자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수색 작업이 이어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