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육과 형벌의 차이
유다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변화된 것일까요? 변화의 이유는 바로 훈육과 형벌의 차이에 있습니다. 훈육과 형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훈육하시는 손은 두인데, 하나는 채찍의 손이고 다른 하나는 싸매시는 손입니다. 매만 있으면 형벌입니다. 그러나 때린 후 고치고 싸매면 훈육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때리기만 하면 아이는 집을 나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매 속에서 부모의 교훈과 싸매 줌이 경험될 때 아이들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를 때리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다를 싸매 주셨습니다.
1) 싸매시는 하느님의 손길
유다의 인생에서 싸매시는 손길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바로 며느리 타마르의 사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맏며느리입니다. 그녀는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유다의 큰아들이 악해서 죽자 타마르는 자녀 없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식 없이 죽은 이의 유업을 잇기 위해 혼자 된 형수에게 죽은 이의 동생이 아들을 낳도록 해주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둘째에게 아들을 낳아 주도록 며느리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형수가 낳은 아들이 형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받게 되는 것이 싫었던 둘째 아들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악하여 둘째 아들이 하느님께 죽임을 당합니다.(38,8-10)
이제 셋째가 남았는데, 셋째는 아직 어렸습니다. 또 혹시 셋째도 죽임을 당하면 어쩌나 싶어서 유다는 차일피일 미루게 됩니다. 그때 유다는 아내를 잃고 외로워하고 있었는데, 타마르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를 유혹해서 임신합니다. 임신 소식을 들은 유다는 크게 화를 냅니다. 그래서 타마르를 죽이려고 하는데, 타마르가 자신을 임신시킨 이의 증표를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본 유다는 그 창녀가 바로 자신의 며느리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타마르가 나보다 옳다고 말합니다.(38,11-26)
왜 성경은 타마르의 이 패륜적인 행동을 심판하기보다 두둔하는 것일까요? 이는 당시의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마르의 행동은 룻의 행동을 연상시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떠나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젊은 남자를 만나서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시어머니를 따라왔다고 해도 베들레헴에서 젊은 남자를 만나 새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보아즈라는 나이 많은 친족에게 나아갑니다. 보아즈는 그러한 룻의 행동을 헤세드, 즉 사랑을 베푸는 자세라고 칭찬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일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친족을 통해 가문이 끊긴 남편의 대를 이어 주려고 한 고귀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룻기 3,10)
타마르의 행동이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녀가 있는 곳은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녀는 원한다면 수절하지 않고 시아버지의 동의를 얻어서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대를 잇도록 시아버지가 셋째 아들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결국 늙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씨를 얻은 것입니다. 이 행동은 쾌락을 위한 음란한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을 자신의 남편, 즉 유다의 맏아들의 끊긴 대를 이어 주려고 한 고귀한 행동입니다. 목숨을 건, 희생적인 믿음의 행동인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유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타마르는 믿음 없는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믿음의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의 믿음이 엉망입니다. 아들들이 악해져 결국 자신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자신은 시동생에게 수치를 당하고, 이 집안에서 남자 죽이는 여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마르는 그 믿음의 집안에 딱 붙어서 믿음의 대를 잇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믿음의 약속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고, 가나안의 영적 주인이 될 예언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약속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는 며느리를 통해 불신앙의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며느리의 믿음 속에서 자신의 불신앙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며느리가 낳아 준 쌍둥이를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두 아들의 회복을 보지 않았을가 하는 사실입니다.(창세 28,27) 나오미가 룻을 통해 아이를 품에 안게 되었을 때 회복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을 경험했듯이(룻기 4,13-17), 비록 부끄럽지만 쌍둥이를 품에 안았을 때 회복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대를 이어 가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때리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싸매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며느리를 통해 얻은 아들로 말미암아 예비해 주신 은총은 유다가 상상할 수 없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유다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은총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이 은총이 유다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첫댓글 우와...
시아버지랑....
남사스러워유.....
하지만
그 깊은 마음을 봅니다....
은총의 마음...()
아멘. 아멘. 아멘.~~
매만 있으면 형벌입니다.
그러나 때린 후 고치고 싸매면 훈육입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