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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스크랩 거의 찾을 뻔한 그 곳/무라카미하루키
nicos 추천 0 조회 250 10.11.12 18:5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거의 찾을 뻔한 그 곳
-무라카미 하루키-


“제 시아버지는 3년 전 전차에 치여 죽었어요.”
그녀는 말하고 난 뒤 잠시 침묵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두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는 동안 연필 통 속에 들어 있는 반 다스 분량의 연필들이 얼마나 잘 깎여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치 골퍼가 조심스럽게 클럽을 고르듯이 날카롭지도 뭉툭하지도 않은 연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든 일들이 조금 혼란스러워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스스로의 의견을 기록하기 위해 메모지 한 장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필도 테스트할 겸 시험 삼아 날짜와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도쿄엔 전차가 많지 않아요.”
그녀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전차를 사라지게 했어요. 과거의 유물처럼 몇 군데 남아 있는데, 제 생각에는 그 중 하나가 시아버지를 죽게 한 것 같아요.”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3년 전 10월 1일 이었어요. 그날 밤은 굉장히 많은 비가 쏟아져 내렸죠.”
나는 이야기의 요점을 받아 적었다. 시아버지, 3년 전, 전차, 소낙비, 10월 1일, 밤. 나는 글 쓸 때 세심하게 받아쓰는 것을 좋아해서 시간이 좀 걸린다.
“당시 시아버지는 만취해 있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비 내리는 밤 전차 궤도 위에서 잠을 자지는 않았을 거에요. 분명히.”
그녀는 또 다시 침묵했다. 입술은 닫고 눈은 계속 나를 응시하면서. 그녀는 내가 동의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만취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결국 술에 취해 돌아가셨군요. 시아버지가 자주 술을 마셨나요?”
“그러니까 술을 자주 마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주 술에 취해 있었어요.” 그녀는 동의했다.
“그러나 항상 만취 상태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술에 취했다고 해서 전차 궤도 위에 잠든 건 아닐 거에요.”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전차 궤도 위에서 잠들 수 있겠는가. 난 의아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 마시는 것을 화제 삼을까? 아니면 그가 처음부터 전차 궤도 위에서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을까?
“당신이 말하는 건 그는 가끔 술을 마셨지만 항상 코가 삐뚤어질 만큼은 아니라는 거죠?”
나는 물었다.
“제가 아는 한은 그래요?” 그녀가 대답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제 나이가 알고 싶은 거에요?”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녀는 집게 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사랑스럽고 완벽하게 곧은 코였다. 그녀가 최근에 성형 수술을 한 게 틀림 없었다. 예전에 몇 번 만났던 여자도 똑 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할 때 마다 콧등을 집게 손가락으로 문질렀었다. 그녀의 새로운 코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가 그녀의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행동은 오럴섹스에 대한 막연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저는 나이를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녀가 이야기했다.
“전 35살이에요.”
“그럼 시아버지께서는 몇 살에 돌아가신 거죠?”
“68세.”
“그는 뭘 했나요…제 말은 직업 말입니다.”
“성직자였어요.”
“스님 말인가요?”
“맞아요. 조도현 토시마구에 있는 절의 주지승 이었죠.”
“그건 정말 놀랄 만한 일이었겠군요.” 내가 말했다.
“스님인 시아버지가 달리는 전차에 치였다는 사실이요?”
“예.”
“물론 그랬죠. 특히 제 남편에게는요.” 그녀는 말했다.
난 몇 가지를 더 메모했다. 스님, 조도현, 68.
그녀는 커플의자 한쪽 끝에, 나는 책상 뒤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우리는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녀는 샤프하게 보이는 녹차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아름다웠다. 스타킹은 검정색 하이힐과 잘 맞았다. 그 실루엣은 마치 치명적인 살인무기처럼 보였다.
“그럼 무엇을 부탁하기 위해 온 거죠?” 나는 말했다.
“당신 남편의 죽은 부친에 관해서?”
“아니요. 시아버지에 관한 게 아니에요.”
그녀는 부정의 의미로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내 남편에 관한 거예요.”
“그 역시 스님인가요?”
“아니요. 그는 메릴린치에서 일해요.”
“투자회사?”
“맞아요.”
그녀는 확실히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어조는 다른 메릴린치가 있겠냐는 투였다.
“그는 주식브로커에요.”
나는 연필 끝이 얼마나 닳았는지 확인하며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남편은 외아들이에요. 그리고 그는 불교보다 주식거래에 관심이 더 많아서 주지스님 자리를 물려 받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불교나 증권거래에 대해 별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 들인다는 중립적인 표현을 전했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죽고 난 후 우리가 있는 시나가와 아파트로 이사 왔어요. 남편과 나는 26층, 시어머니는 혼자서 24층에 사셨죠. 전에는 시아버지와 함께 절에 계셨지만, 다른 주지 스님이 오면서 어쩔 수 없이 이사 온 거에요. 시어머니는 63살, 참고로 제 남편은 40살이에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음 달에 41살이 되요.”
나는 모든 것을 적었다. 시어머니, 24층, 남편, 40, 메릴린치, 26층, 시나가와. 그녀는 내가 다 적기를 끊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시아버지가 죽고 난 뒤 시어머니는 정신병에 시달렸어요. 비 오는 날에는 더 심해졌죠. 분명 시아버지가 비 오는 날 죽었기 때문일 거에요. 제 생각에 그건 당연한 거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증세가 안 좋을 때는 시어머니 머리에서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가 전화를 하면 남편은 2층을 내려가서 그녀를 보살펴 주었죠. 남편은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어요. 남편이 없을 땐 제가 갔고요.”
그녀는 잠시 나의 반응을 살폈다. 난 가만히 있었다.
“시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는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다만 너무 예민하고 다른 사람에게 많이 의지하는 타입 일뿐이에요. 저는 그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메모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일요일 10시에 우릴 불렀어요. 2주 전에.”
난 책상 달력을 보았다.
“9월의 세 번째 일요일.”
“맞아요. 세 번째 일요일. 시어머니가 그 날 아침 10시에 우릴 불렀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그 날을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만약 히치콕 영화라면 화면이 떨리며 플래시 백(영화의 회상장면을 묘사하기 위한 기법)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아니기에 플래시 백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남편이 전화를 받았어요. 그는 골프를 치러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새벽부터 비가 꽤 내려서 취소를 했죠. 만약 비가 내리지만 않았어도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거에요. 알아요 저의 두 번째 추측이죠.”
9월 3일, 골프, 비, 취소, 시어머니가 전화하다. 나는 모두 적었다.
“시어머니는 숨 쉬기가 곤란하다고 말했어요. 너무 어지러워서 참을 수 없다고요. 그래서 남편은 면도도 하지 않고 간단히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 갔어요. 남편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아침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죠.”
“남편은 어떤 옷을 입고 나갔죠?” 내가 물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코를 가볍게 문질렀다.
“치노 바지에 반팔 폴로 셔츠를 입었어요. 진한 회색 셔츠에 크림색 바지였죠. 둘 다 J. Crew 카다로그에서 고른 거에요. 남편은 근시여서 항상 안경을 꼈죠. 안경은 금속 테로 된 아르마니 제품이고, 신발은 회색의 New Balance, 양말은 신지 않았어요.”
난 세세한 사항을 모두 적었다.
“남편의 키와 몸무게도 알고 싶은가요?”
“그러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키는 178cm, 몸무게는 대략 71kg. 결혼하기 전에는 61kg이었는데 살이 좀 쪘어요.”
나는 이 정보를 적었다. 그리고 연필 심을 살펴보고 다른 연필로 바꾸었다. 나는 새 연필을 잠시 살펴보고 쓰는 흉내 내 보았다.
“계속해도 될까요?” 그녀는 물었다.
“물론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어머니가 남편을 불렀을 때 저는 팬 케??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저는 항상 일요일 아침이면 팬 케?揚? 만들거든요. 그리고 남편은 골프를 치지 않는 날이면 과식을 할 정도로 팬 케?揚? 먹죠. 남편은 바삭 한 베이컨과 함께 먹는 팬 케?揚? 아주 좋아해요.”
그의 몸무게가 9kg이나 늘게 된 원인은 분명했다.
“그로부터 25분 후에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는 진정되었고 지금 올라가려는데 너무 배고프니까 즉시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요. 그래서 전 서둘러 프라이 팬을 달구고 팬 케?弱? 베이컨을 만들기 시작했죠. 물론 메이플 시럽도 데웠어요. 팬 케?? 만드는 법은 전혀 어렵지 않거든요. 그건 올바른 순서와 타이밍의 문제니까요. 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편 접시 위에 올려진 팬 케?揚? 모두 식어갔어요. 전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남편이 아직 그곳에 있는지 물어봤어요. 어머니는 떠난 지 한참 됐다고 했어요.”
그녀는 무릎 바로 위 스커트에 놓여 있는 가상의 형이상학적 먼지를 털어 냈다.
“제 남편이 없어진 거에요. 엷은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 거에요. 남편의 목소리를 들은 후 24층과 26층 사이 어딘가에서 없어진 거죠.”
“경찰에 연락했나요?”
“물론 했어요.”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떨었다.
“1시까지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경찰에 전화를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남편을 찾으려고 노력 하지 않았어요. 경찰서에서 혼자 온 경관은 폭력이나 범죄의 흔적이 없자, 이틀 안에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관할 경찰서로 가서 실종신고를 하라고 할 뿐이었죠. 경관은 남편이 일상에 싫증 나서 무작정 어딘가로 떠났다고 생각하는 듯 했어요. 그러나 명백해요. 생각해 보세요. 남편은 맨손으로 지갑도 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시계도 없이 그냥 어머니 집에 갔던 거라고요. 남편은 면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팬 케?揚? 준비하라고 전화까지 했어요. 누군가 집을 떠난다면 팬 케?揚? 준비하라고 전화를 했겠어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난 동의했다.
“남편이 24층에 내려갈 때 계단으로 갔나요?”
“남편은 엘리베이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아요. 엘리베이터를 싫어하죠. 남편은 그런 비좁고 틀에 박힌 공간에 갇히는 걸 참지 못해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높은 26층에 살기를 원한 겁니까?”
“네. 그래도 남편은 항상 계단을 이용했죠. 남편은 계단을 꺼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요. 오히려 살 빼는데 도움이 되고 좋은 운동이라고 말했어요. 물론 시간은 걸리지만요.”
팬 케??, 20파운드, 계단, 엘리베이터. 난 메모장에 적었다.
“이게 지금 상황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이 사건을 맡아 주시겠어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건 내가 원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건이었다. 난 일정을 확인하고 몇 가지 준비하는 척 했다.
만약 당신이 흔쾌히 사건을 맡는다면, 고객들은 뭔지 모르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의심할 것이다.
“다행이 오후 늦게까지는 스케줄이 비어 있군요.”
나는 대답을 하며 시계를 흘깃 보았다. 오전 11시 35분.
“만약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신의 아파트로 데려가 줄 수 있나요? 남편의 마지막 흔적을 좀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럼 사건을 맡겠다는 뜻인가요?”
그녀는 조금 찡그리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아직 사례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뭐라고요?”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난 웃으며 설명했다.
“그러나 이건 당신 직업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직업이 아닌 자원 봉사에요. 따라서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자원 봉사?”
“네.”
“그래도 당신은 비용이 필요할 텐데요?”
“아무런 비용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자원 봉사 정신에 의해서만 일 하죠.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보상도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저는 다행히도 충분히 생활 할 수 있을 정도의 다른 수입원이 있거든요.” 난 설명했다.
“저는 돈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실종된 사람 찾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 사라진 사람들. 조금 복잡해서 자세히 말하긴 힘들지만 저는 그런 방면에 꽤 소질이 있습니다.”
“말해 주세요. 당신이 하는 일 배후에는 어떤 종교나 단체 같은 게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저는 어떠한 종교나 단체 같은 곳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녀는 혹시 일이 꼬이면 뾰족한 하이힐 굽으로 나를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의 하이힐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 남편은 항상 공짜는 아무 것도 믿지 말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제 남편은 공짜에는 항상 함정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대개의 경우는 저도 동의합니다.” 난 말했다.
“최근 우리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공짜를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날 믿어 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당신이 남편을 찾으려 한다면 날 믿어야만 합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세련된 솜씨로 루이비똥 지갑을 열고 두툼하고 밀봉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난 거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꽤나 많은 액수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비를 가져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저는 어떠한 수당이나 선물, 또는 대가를 받지 않습니다. 그건 정해진 틀입니다. 제가 만약 돈이나 대가를 받는다면 저의 행동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게 불편하시다면, 태평양전쟁고아 돕기 자선단체 같은 곳에 기부해 주세요. 그래야 당신 기분이 좀 편해진다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봉투를 그녀의 지갑에 넣었다. 한층 볼록해져 행복해진 지갑은 원래 있던 자리에 놓여졌다. 그녀는 콧등을 또 다시 문지르며 마치 앞으로 막 뛰어 나가 막대를 잡으려는 리트리버(사냥개)처럼 나를 봤다.
“이 일을 맡아 주세요.” 그녀는 다소 메마른 톤으로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닳은 연필을 필통에 꽂았다.
그녀는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나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녀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그녀의 집(2609호)와 시어머니 집(2417호) 번호를 가리켰다. 널찍한 계단은 두 층을 연결하고 있었고 슬슬 산책 삼아 걷는다면 채 5분이 넘지 않을 것 같았다.
“제 남편이 이 아파트를 산 이유 중 하나는 계단이 널찍하고 밝았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대부분의 고층 아파트들은 계단을 아끼는 편이죠. 넓은 계단은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게다가 주민들은 차라리 엘리베이터를 원해요. 이 아파트 설계자는 도서관의 번쩍이는 로비에 돈을 쓰길 원했나 봐요. 남편은 계단이야말로 건물의 척추에 해당하는 필수 요소라고 주장하곤 했어요.”
나는 잘 만들어진 계단이라는 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25층과 26층 사이에 있는 계단 라운지에는 그림이 그려진 유리창문 옆으로 소파와 벽면 거울과 재떨이와 화분이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는 밝은 하늘과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 창문은 고정되어서 열리지 않았다.
“이런 공간이 모든 층에 있나요?” 나는 물었다.
“아니요. 작은 라운지는 5층마다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 집과 시어머니 집에 가 볼래요? 지금은 말고요. 남편이 사라진 후로 어머니의 신경쇠약 증세는 더 나빠졌거든요.”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짐작하시겠지만 시어머니에게는 큰 충격이었으니까요.”
“그러겠죠.” 난 동의했다.
“저도 그녀를 괴롭힐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면 고맙겠어요. 이웃에게도 비밀로 해 주시고요. 남편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거든요.”
“이해합니다.” 나는 말했다.
“당신도 이 계단을 자주 이용합니까?”
“아니요.”
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의심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썹을 조금 찡긋하며 말했다.
“저는 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요. 남편이랑 둘이서 나갈 경우에는 남편이 먼저 계단으로 가고 저는 엘리베이터를 타죠. 그리고 로비에서 만나요. 집으로 돌아올 때도 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편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기는 힘들거든요. 당신이라도 그럴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혼자 조사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파트 관리인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부탁했다.
“관리인에게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은 보험회사 조사원이라고 말 해주세요.”
난 그녀에게 충고했다.
“만약 누군가 나를 도둑이라고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난 주목 받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여기에서 서성일 이유가 없어지죠.”
“그렇게 말할게요.”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그녀의 힐 소리가 손톱으로 두드리는 듯 불길한 전조처럼 들리다가 점차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난 혼자 남았다.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26층부터 24층까지 총 3번을 오르내리는 일이었다. 처음은 보통의 속도로 걷고 다음 두 번은 보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날 둘러싼 모든 것을 관찰하며 걸었다.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이 없도록 집중했다. 뒤에 숨겨진 모든 사건들을 캐내는 게 나의 직업이다. 문제는 모든 계단이 깨끗이 청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작은 얼룩이나 구겨진 휴지 조각도 심지어 재떨이에는 담배꽁초조차 없었다. 아무 것도.
쉬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나를 완전히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파 위에서 잠시 쉬었다. 소파는 비닐로 덮여 있었다. 소위 최상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용할 것 같지 않은 이런 곳에 소파를 놓아둔 빌딩 관리인의 선견지명을 존경해야 한다. 소파 건너편에 거울이 있었다. 난 잠시 그곳에 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응시했다. 아마 주식브로커인 그녀의 남편도 일요일에는 소파에 쉬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면도하지 않은 맨 얼굴로.
당연히 난 면도를 했다. 다만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 있었다. 귀 뒤의 머리카락은 마치 강에서 물장난을 하다 돌아온 사냥개의 털처럼 구불구불했다. 나는 이발소에 가기로 마음 속에 새겼다. 난 바지 색깔이 구두와 어울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양말도 겉옷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걸 합치면 마치 작은 세탁소처럼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정확히 내 나이만큼 보였다. 증권이나 불교에는 관심 없는 45년 묵은 노총각.
생각을 해보자. 폴 고갱도 증권 브로커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림에 투자하기를 원했고 어느 날 아내와 아이를 남겨 두고 타히티로 떠났다. 잠깐… 난 잠시 생각했다. 고갱은 자신의 지갑을 놓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고갱이 지갑을 남겨 놓고, 가족들에게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가 있었다면 하나쯤 가져 갔을 것이다. 결국, 고갱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타히티로 갔을 것이다.
나는 사라지기 전에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고갱을 상상할 수 없다.
“여보 곧 돌아올 테니 팬 케?揚? 먹을 수 있게 해줘.”
만약 당신이 사라지기로 마음 먹었다면 체계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 머릿속으로 맛있는 팬 케?揚? 굽기 시작했다. 나는 45살의 증권 브로커이자 밖에 비가 세차게 내리는 일요일에 뜨거운 팬케?揚?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떠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나 팬 케?恙? 대해 생각할수록 내 식욕은 자극 받았다. 나는 아침에 사과 하나만 먹었을 뿐이었다.
나는 아침에 데니스에 들러 팬 케?揚? 사 먹었어야만 했다. 도로에서 데니스까지는 걷기에도 충분한 거리였다. 하지만 난 데니스의 표지판을 그냥 지나쳤다. 데니스의 팬 케?揚?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버터와 시럽은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면, 난 굉장한 팬 케?? 광이기에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다.
나는 입에 침이 고이지만 머리를 흔들어 팬 케?恙? 대한 생각을 지웠다. 모든 상상의 구름을 날려 버렸다. 팬 케?揚? 나중을 위해 남겨두고 ‘넌 아직 할 일이 있다’ 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의 남편이 취미가 있는지 물어 봤어야 했는데.” 나는 혼자 말했다.
“아마도 그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을 거야.”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된다. 매주 일요일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가족을 버릴 만큼 그림에 몰두 하기는 어렵다. 고갱이나 반 고흐 또는 피카소가 골프화를 신고서 그린에 무릎을 꿇고 퍼팅을 하기 위해 경사를 읽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난 상상이 안 됐다.
난 다시 소파에 앉아서 시계를 봤다. 1시 32분. 난 눈을 감고 머리 속에 있는 점에 신경을 집중했다. 내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모래 시계의 모래처럼 흘러가는 대로 날 맡겼다. 그리고는 눈을 떠 시계를 봤다. 1시 57분. 25분이 어디론가 소멸했다. 나쁘지 않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무심하게 소멸되는 시간. 전혀 나쁘지 않아.
나는 거울을 다시 들여다봤다. 거기엔 보통의 내가 보였다. 내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왼손을 든다. 내가 왼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난 오른손을 든다. 나는 오른손을 내릴 듯 하다가 재빠르게 왼손을 내렸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을 내리는듯하다가 재빨리 오른손을 내린다. 당연한 이치다. 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로비까지 25층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난 매일 오전 11시경에 그 계단을 방문했다. 아파트 경비와는 꽤나 친해져서(난 조심스레 초콜릿 박스들을 건넸다) 자유로이 건물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말하지만 난 대략 200번 정도 24층과 26층 사이를 오갔다. 피곤해지면 소파에 앉아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았다. 이발소에서 머리카락도 깎았고 옷들도 세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지와 잘 맞는 양말을 신었고 등뒤에서 사람들이 수근 대는 것도 줄어들었다.
나는 작은 단서 하나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의기소침해지진 않는다. 단서 찾는 일은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직감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인내와 집중이 필요하다.
나는 매일 그 아파트에 가면서 계단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사탕 빈 봉지와 재떨이에 구겨져 있는 말보르 담배꽁초, 버려진 신문지 따위를 찾을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 한 사람이 날 지나쳐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작은 키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 녹색 옷에 아식스 운동화를 신은 사내였다. 그는 커다란 카시오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손목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몇 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나이키 셔츠는 가슴 근처까지 땀에 젖어 있었다.
“당신은 항상 이 계단을 뛰어 다닙니까?” 내가 물었다.
“예, 32층까지요. 다만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죠. 뛰어서 계단을 내려오는 건 위험하거든요.”
“매일 이렇게 달립니까?”
“아니요. 일 때문에 바빠서. 주말에만 몇 번 합니다. 가끔 일이 일찍 끝날 대는 주중에도 뛰지만요.”
“당신은 이 건물에 사세요?”
“예.” 그 달리기 주자가 말했다.
“7층에 살죠.”
“혹시 26층에 사는 쿠루미자와씨를 아십니까?”
“쿠루미자와씨?”
“그는 금속제 아르마니 안경을 낀 증권 브로커죠. 항상 이 계단을 이용합니다. 키는 178정도고 마흔 살입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한 뒤 말했다.
“예, 그 사람을 알아요.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계단에서 몇 번 지나쳤어요.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봤죠. 그는 엘리베이터가 싫어서 계단을 이용하는 부류의 인간이죠. 맞나요?”
“그 사람이 맞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혹시 그 사람 외에 이 계단을 매일 이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렇게 많지는 않을걸요. 그래도 몇 명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처럼 계단에서 달리는 사람 2명이 더 있습니다. 몇 명은 운동 삼아 걸어 올라가기도 하지요. 제 생각엔 다른 아파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이용할 걸요. 여기는 밝고 넓은데다가 깨끗하니까요.”
“그런 사람들 중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가 말했다.
“그냥 얼굴을 아는 정도죠. 서로 지나가면서 인사 정도는 하지만 이름은 몰라요. 여긴 꽤 큰 건물이거든요.”
“알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조깅 잘 하세요.”
그 남자는 손목시계의 단추를 누르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목요일. 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계단을 내려왔다. 70대 중반정도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안경을 썼다. 그는 샌달을 신고 헐렁한 바지에 긴팔 셔츠를 입었다. 그의 옷은 매끈하게 잘 다려져 있었다. 그 노인은 키가 크고 몸집도 좋았다. 그는 최근에 은퇴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처럼 나를 바라봤다.
“안녕하시오.” 그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대답했다.
“여기서 담배 한대 펴도 되겠소?”
“괜찮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서 피세요.”
그 노인은 내 옆에 앉아서 바지 주머니에서 세븐스타 한 갑을 꺼냈다.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입으로 불을 끄고 재떨이에 성냥을 버렸다.
“나는 26층에 산다오.” 그가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아들과 아내와 함께요. 그들이 방 안에 연기가 가득 찬다고 해서 담배 피고 싶으면 여기에 오지요. 한대 피우겠소?”
“12년 전에 끊었습니다.” 그에게 말했다.
“나도 끊어야 하는데.” 그 노인이 말했다.
“난 하루에 몇 개피만 핍니다. 그래서 끊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그러나 담배를 사러 가거나 여기에 와서 담배를 피는 게 시간 때우기는 좋거든. 기분 전환도 되고 움직일 수도 있고 잡생각들을 안 하게 되니까.”
“그럼 건강 때문에 계속 담배를 피운다는 말입니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 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26층에 산다고 하셨나요?”
“그렇소.”
“혹시 2609호의 쿠루미자와씨를 아십니까?”
“알지. 그는 안경을 쓰고 내 생각엔 살로몬 브러더스에서 일하지?”
“메릴린치.” 내가 정정해 주었다.
“맞다 메릴린치.” 그 노인이 말했다.
“여기서 그와 이야기 한 적이 있지. 그는 가끔 소파를 이용했어요.”
“여기서 무얼 하던가요?”
“잘은 몰라요. 그는 그냥 여기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봤지. 담배는 안 폈어.”
“그가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가요?”
“글쎄, 그냥 허공을 바라보는 건지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우리는 항상 생각하잖소. 안 그래요?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살기 위해 생각한다는 것도 틀리겠지. 난 데카르트의 이론을 믿소. 우린 가끔 존재하지 않기 위해 생각하기도 하지. 무의식적으로 허공을 보는 것은 실은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겠지. 어쨌든 그건 좀 어려운 문제군.”
그 노인은 담배를 깊이 들이 마셨다.
“쿠루미자와씨가 집이나 일에 대해 말하기도 했나요?” 내가 물었다.
그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당신도 알다시피 물은 가장 짧은 경로를 찾아서 흘러 내리지. 가끔씩 가장 짧은 길이란 물에 의해서 형성되기도 하지. 하지만 인간은 물과 다르지. 적어도 내 느낌에는. 참, 당신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군. 쿠루미자와씨 와는 이런 심각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소. 그냥 날씨나 아파트 일에 대해 자연스레 잡담을 하는 정도였지.”
“알겠습니다.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나는 말했다.
“가끔은 말이란 게 필요 없소.”
그 노인은 내 말을 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오히려 말이 우리를 필요로 하지. 만약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어도 그 기능을 상실할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말이 뱉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고, 뱉어지지 않은 말은 더 이상 언어가 아니지.”
“맞습니다.” 내가 말했다.
“마치 선문답 같군요.”
“맞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 하시오.” 노인이 말했다.
“잘 가세요.” 나도 대답했다.

2주 뒤 금요일 오후. 내가 24층과 26층 사이에 막 도달했을 때 한 여자 아이를 만났다. 여자 아이는 소파에 앉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이로 보였다. 여자 아이는 분홍색 티셔츠와 청 반바지, 어깨에 가방을 메고 무릎 위에는 모자를 올려 놓고 앉아 있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여자 아이는 노래를 그치고 인사했다.
난 그 아이의 옆에 앉고 싶었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 좀 이상하게 보일 듯싶어서 창턱에 기대어 서서 거리를 유지했다.
“학교 끝났니?” 내가 물었다.
“학교 얘기는 하기 싫어요.” 그 애는 뜬금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하지 말자.” 내가 말했다.
“너 이 건물에 사니?”
“네.” 여자 아이가 대답했다.
“27층에 살아요.”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 온 것 은 아니겠지?”
“엘리베이터에서는 냄새가 나요.” 여자 아이가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냄새가 나서 27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중이에요.”
그녀는 거울 속의 모습을 보며 크게 끄덕였다.
“항상 아니지만 가끔.”
“힘들지 않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이 아파트 계단에 있는 거울 중에 이 거울이 가장 잘 보여요. 다른 거울과는 달라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 번 직접 보세요.” 여자 아이가 말했다.
나는 가까이 서서 잠시 동안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거울 속의 이미지는 내가 보던 거소가 조금 달랐다. 내 모습은 실제보다 좀 통통하고 행복해 보였다. 마치 따뜻한 팬 케?揚? 금방 먹고 난 후의 모습처럼.
“혹시 개 키우세요?”
“아니, 그 대신 열대어를 키우지.”
“음.” 여자 아이가 말했다. 여자 아이는 열대어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개 좋아하세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질문했다.
“아이가 있나요?”
“아니 없어.” 내가 말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엄마가 아이 없는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말랬어요. 엄마가 그런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래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다.” 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엄마 말처럼 낯선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주의해야 해.”
“그래도 아저씨는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인형을 보여주지 않을래?”
“싫어요.”
“혹시 어린 여자애들 속옷을 모으진 않죠?”
“말도 안돼.”
“뭐 수집하는 게 있어요?”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현대시집 초판 본을 수집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사이에 도움이 될 듯 하진 않았다.
“아니 난 아무것도 수집하지 않아. 넌 어때?”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아무것도 수집하지 않아요.”
우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아저씨, 미스터 도넛 중에 어떤 게 제일 좋아요?”
“Old-fashioned(사전적 의미: ~구식의, 낡은)” 내가 솔직히 대답했다.
“그런 건 잘 몰라요.” 여자 아이가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거 알아요? 저는 보름달과 버니 휩이 좋아요.”
“그런 건 첨 들어보는데.”
“거기에는 과일이나 달콤한 콩이 들어 있어요. 최고에요. 그런데 엄마는 단 것을 매일 먹으면 벙어리가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많이 사주지는 않아요.”
“그것 참 맛있겠는걸.” 내가 말했다.
“여기서 뭐해요? 어제도 아저씨 봤어요.” 여자 아이가 말했다.
“난 뭔가를 찾고 있단다.”
“그게 뭐예요?”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인정했다.
“난 그게 문 같은 거라고 생각해.”
“문?” 여자 아이가 따라 했다.
“어떤 문이요? 다양한 모양과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데……”
난 잠시 생각했다. 어떤 모양과 색깔? 생각해 보자. 난 한 번도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문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모르겠다. 어떤 모양과 색깔의 문인지. 어쩌면 문이 아닐지도 몰라.”
“그럼 우산 같은 건가요?”
“우산?” 내가 말했다.
“우산이 아닐 만한 이유도 없지.”
“그런데 우산이랑 문은 모양도 틀리고 크기도 틀리고, 쓰이는 용도 다른데.”
“맞는 말이야. 그래도 나는 그걸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바로 저거야’ 하면서. 그게 우산이든 문이든 아니면 도넛이든지.
“음……” 여자 아이가 말했다.
“그걸 오랫동안 찾았었나요?”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정말 요?”
여자 아이는 손바닥을 잠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그래 줬으면 좋겠어.”
“그럼, 그게 문인지 우산인지 도넛인지 코끼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찾아야 하는 거죠?”
“맞아. 그렇지만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여자 아이가 말했다.
“근데 지금은 집에 가야 해요. 발레 레슨이 있거든요.”
“그럼 나중에 보자.” 내가 말했다.
“나와 얘기 해 줘서 고마워.”
“아저씨가 좋아하는 도넛의 이름을 다시 말해줄래요?”
“Old- fashioned.”
여자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 위로 사라졌다. 난 무의식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다시 한 번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토요일 아침. 난 고객의 전화를 받았다.
“내 남편을 찾았어요.”
그녀는 인사도 생략하며 말했다.
“어제 정오쯤에 경찰의 연락을 받았어요. 그들은 센다이 역 화장실 벤치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찾아냈어요. 남편은 돈도 신분증도 없었지만 잠시 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기억해 냈어요. 전 곧바로 센다이로 달려갔죠. 저의 남편이 맞았어요.”
“그런데 왜 센다이에 가 있던 걸까요?” 그녀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 몰라요. 그냥 역무원이 어깨를 흔들어 깨우길래 일어난 것뿐이래요. 그는 돈도 없이 어떻게 거기에 갔으며, 어떻게 지난 20일 동안 먹고 지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남편은 무엇을 입고 있던가요?”
“그 이는 아파트에서 나갈 때 그대로의 차림이었어요. 다만 수염이 자랐고 9kg 가량 몸무게가 줄었어요. 또 안경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더라 구요. 저는 지금 센다이에 있는 병원에서 전화를 거는 거에요. 의사들은 CT와 X-Ray를 찍고 신경 검사까지 했어요. 남편은 마음도 안정을 찾고 특별히 다친데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하질 못해요. 어머니 집으로 갔다가 계단을 올라온 후의 일들을. 어쨌든 내일이면 도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에요.
“잘 됐군요.”
“진심으로 남편을 찾으려 노력해 주신데 대해 감사해요. 정말이에요.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안 도와주셔도 되요.”
“그렇군요.”
“모든 게 정신 나간 짓 같고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남편을 무사히 찾았잖아요. 그럼 된 거에요.”
“당연합니다.” 나는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정말 아무 것도 받지 않아도 괜찮나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말했듯이 전 어떤 종류의 대가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제가 한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고요. 서로간의 이해가 내포된 신선한 적막함. 난 이런 순간 때문에 스스로의 이런 역할을 맡는다. 고요에 감사한다.
“그럼 몸 조심 하세요.”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연민의 감정이 묻어 났다.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 앞에 놓여 있는 텅 빈 메모지를 바라보며 새 연필을 천천히 굴렸다. 하얀 메모지는 방금 세탁 한 듯 산뜻해 보였다. 하얀 메모지 위에서 낮잠에서 깬 인도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았다. 깨끗이 세탁된 천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의 이미지는 나에게 여유를 주었다. 나는 나의 기억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려준 요점들을 조심스레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센다이역, 금요일 정오 무렵, 전화, 9kg 감량, 같은 옷, 잃어버린 안경, 20일 간의 기억상실.
20일 간의 기억상실.
난 연필을 책상 위에 내려 놓고, 흔들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 묻고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에는 여기저기 불규칙적인 점들이 있었다. 얼핏 보면 별자리 같았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을 상상하며 건강을 위해 다시 담배를 피워 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계단에서 들려 왔던 그녀의 또 각 거리던 하이힐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쿠루미지와씨!”
나는 천정의 구석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이 세상으로 돌아 온 걸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삼각형 세계의 세 개의 모서리- 당신의 신경쇠약 어머니, 아내, 그녀의 뾰족한 하이힐 그리고 친숙한 메릴린치-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나는 나의 탐색이 계속 될 거라고 상상해 본다. 무언가 문처럼 생긴 것을 찾는, 혹은 우산에 가깝거나 도넛 아니면 코끼리이거나. 나는 그런 모든 탐색들이 결국 그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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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11.12 18:51

    첫댓글 하루키 단편을 몇개 올려 봅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인데 知彼知己하는 심정으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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