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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이전의 초판은 디자인도 그렇고 별로 읽고 싶지 않았는데 개정판이 나온 뒤에는 책이 이뻐서 읽게 됨.
"고바야시 선생은 한 가지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일년에 한차레 굉장한 프랑스요리를 만들려던 교사에서 매일 세 번 번 정확하게 쌀을 씻어 맛있는 요를 만들 수 있는 교사가 되자'는 결단이며, '아이들의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수업에서 쉬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수업의로'의 전환이다." (p14)
- 여러분에게 기억나는 수업은 어떤 수업인가요? (프랑스 요리? 일상의 수업?)
-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Best and Worst)
- 삶의 일상성, 배움의 일상성은 어떤 의미일까?
- 아이들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의미일까?
"'학교가 재미 없다'는 아이들의 말에 교사는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재미'와 교사가 요구하는 '재미'는 다른 것이다.'"(p15)
- 수업은 재미 있어야 할까?
(수업은 재미 있어야 한다는 신화가 있는듯. 재미가 필요하지만 재미 만은 아니다. 재미와 의미가 함께 만나야 한다.(탈벤 샤하르) 두 마리 토끼를 수업에서 잡아낼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성공한 수업과 실패한 수업이 나눠진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요즘 아이들이 생각하는 재미, 그리고 선생님들이 '수업은 재미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재미', 그리고 '배움의 즐거움'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차이는 뭘까?
"이 작은 사건을 출발점으로 하여 고바야시 선생은 '서로 배우는 관계'를 구축하는 실천을 계속해 오고 있다. 그 실천의 첫 걸음은 솔직하게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아이'를 기르는 일부터 착수되었다." (p17)
(면년 전에 내신을 강화한다는 입시 정책을 발표하자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노트를 숨겨버리거나 찢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성적이 절대화 될 때 친구는 나의 성적을 위협하는 적일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서로 적이되도록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학생들에게 모르는 친구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해 주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물어봤다. "대화 내용" )
(호혜적 배움은 호혜적 관계가 성립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호혜적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는 이우학교의 사례가 많은 시사를 한다. "이우학교 이야기" p163 '공부는 경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배우는 것!)
하지만 '메리토크라시'가 종교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배움을 나누고 호혜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균열을 내야 하지 않을까? 영토화 된 곳을 탈영토화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틈 만들기.)
"고바야시 선생은 언제나 시작을 소중히 하고 있다. 귀중한 말이다. 서툰 교사는 최후의 결과만을 의식하여 시작을 소흘히 하고 쉽다."(p19) - 시작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아니, 언제나 시작으로 가는 것이 창조적인 교사의 일이다.
'언제나 시작으로 간다는 것' 이 '창조적인 교사의 일'?
수업의 시작은 단순히 전시학습 확인, 동기유발이 아닌 그 날의 수업 주제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수업의 도입을 디자인 하는 일이다.
(시작을 잘해야 한다는 말은 사전에 치밀한 디자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치밀한 디자인은 학생 성향에 대한 이해, 교과 내용에 대한 이해, 수업 방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수업의 흐름을 기획한다. 이러한 기획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수업 장면에서 만나고 상호작용하고 배움이 흘러가도록 사공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시작에 무게 중심이 두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 그런데 시작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치밀한 준비보다 아이들과 한 시간 동안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결단으로 오프닝을 열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배움은 세상과 타자와 자신과이 만남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작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고 결과에 대한 피드백도 중요하다. 단지 결과만을 중시하지 말자는 단순한 말을 머리아프게 고민한 듯)
"함께 배우는 협동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협동을 전제로 한사람 한사람의 자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p20)
(협력적 배움을 통한 자기 성장은 결국 자기 성장은 협력적 배움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인듯. 자학자습을 통한 자기 성장은 가능한가? 자학자습이 가능한가? 독서는 자학자습인가? 저자를 텍스트를 통해 만나고 있다면 독서 또한 협력적 학습의 또 다른 유형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맞다.
배움의 궁극적 귀결은 자립일까? 자립을 부정할 일은 아니다. 김상봉 교수(전대 철학과)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을 통한 주체성확립은 중요한 과업이다. 고민해야 할 지점인 듯.)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좋은가 어떤가의 판단은 교실 속의 아이들 한명 한명의 표정과 배우는 자세에서 배워갈 수밖에 없다."(p22)
(아이들은 내 수업을 통해 많은 표정을 지어낸다. 모두다 행복한 표정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배움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닐까.
그리고 이를 위해 교사가 아이들이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수시로 읽고 해석하고 새로운 변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배움의 흐름을 타고 깊이 있는 탐구의 과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
"그리고 이 일년간 자신의 해 온 일의 성과인 자신의 수업에 대한 비디오 기록을 보면 자신이 애처로워 술 없이는 차마 몰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앞에 두고 헛수고하고 있는 자신이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p22)
고바시 선생님은 왜 자신을 한없이 애처로워 했을까? 결국 자기 수업이라는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과 만난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멋진 교사의 모습과 객관적으로 대상화된 나와의 괴리가 심각하다는 자기 인식이 애처로운 존재로 자신 다시 대상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괴리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마주할 것이다. 교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사로서 성장하는게 아닐까?
"수업의 반성과 그 경험의 교류는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한 양식이 된다. 수업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는 조건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모든 교실에 존재하며 모든 학교에 존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을 어디에서부터 열어갈 것인가?" (p25)
STORY 1 풍경으로서의 교실 '주체성'신화를 둘러싸고
교실이라는 장소의 다양성
"지역의 풍토와 문화, 학교의 역사와 전통, 교사의 경험과 개성, 아이들의 생활과 개성에 따라 교실은 저마다 독자적인 얼굴을 가지며 독자적인 숨결 속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만든다." (p32)
(교실 상황을 일반화 할 수 없다는 미시적 관점이다. '수업 이렇게만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레토릭은 수업의 개별적 특수성을 무시한 뻥이다. 그런데 뻥쟁이들이 좀 있다. 뻥쟁이들 중에는 교육에 있어 행동주의와 성과주의에 기댄 인간들이 꽤 많다는 것이 우리 교육에 우울한 자화상이다. )
* 교실의 세 가지 특징: 관계성, 역동성, 비예측성, 개별성, 보편성
"예가 되는 에피소드는 어느 교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작은 사건이다. 그 작은 사건에 내포되어 있는 큰 의미를 풀어 읽어냄으로써 하루하루의 수업을 주시하고 고쳐나가는 교실에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p33)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미세한 학생들의 신호들을 읽어내고 의미를 찾아내고 바람직한 처방을 내리고 이를 다시 성찰 함으로써 교사는 수업을 통해 성장해 나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주체성이라는 신화
"수업은 아이, 교사, 교재, 학습환경의 4가지로 구성된다." (p33)
하지만 유교전통문화에서는 아이에 집중함으로써 자학자습이나 자기주도적 학습에 대한 신화가 강화되었다. 양차 대전 이후 일제식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이루어진 면이 있다. 더불어 생활교육을 비판했던 듀이를 생활교육의 핵심이론으로 도입했던 배경도 있다.
"주세성 신화란 아이들의 관심과 태도 등을 교사와의 관계나 교재나 학습환경과 떼어내어 아이들 자신의 성향에 따라 주체성을 구성하는 신화이며, 아이들의 내면이 주체성에 따라 수행된 학습을 이상화하는 신화이다." (p35)
공중에 매달린 주체
"자학자습이나 자기표현이나 자기결정은 독학의 이상은 될지라도 교재나 동료나 교사가 개입하는 수업장면에서는 이상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의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배움은 수업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지만 그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배움도 교사의 활동과 교재와 교실의 동료와의 관계나 학습환경과의 관계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교사, 교재, 동료,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배움은 생성되고 발전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아이들의 주체성이 작용하거나 관심이나 의욕이나 태도가 앞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p37)
(최근 몇년 동안 자기주도적학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학원에 의한 학생들의 수동적 학습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더욱 부각된 면이 있다. 문제는 공교육 기관에서 조차 '자기주도적 학습'을 공교육의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도성을 부정할 일은 아니지만 교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개별 학생의 독립적 수행과정이서는 안된다.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관계론적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개별자들은 입구도 창도 없는 모나드(라이프니츠)처럼 부유할지 모른다.)
- 최근 이러한 자기주도성에 대한 비판으로 남미자외 학습자 주도성, 미래교육의 거대한 착각 - 교사 없는 학습은 가능한가? 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교육의 흐름은 과거 존 듀이 시절의 개별화에서 산업화 및 대중화 시대의 보편화, 그리고 4차산업혁명시대를 목전에 두고 다시 개별화의 방향 가고 있다. 이는 개별화가 교육 본연의 목적 달성에 합당하고 AI 및 빅데이트등의 과학기술발달로 학생의 자율과 선택에 기반한 개별화 교육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학생의 자율과 선택은 필연적으로 학습자 주도성의 개념과 맞닿는데 과연 이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딴지를 건게 이 책이다. 사실 딴지를 걸었다기 보다는 제대로된 학습자 주도성을 위한 방향설정과 철학을 갖춰야 한다는게 책의 골자다. 책은 먼저 한국 공교육을 꼬집는다. 한국의 공교육은 능력주의를 최우선으로 한다. 때문에 개별학생의 자율과 선택을 보장하되 그 결과 역시 개인의 문제로 귀책하게 된다. 때문에 능력주의는 정의로운 것이 되며 교육은 계층 이동의 수단이자 도구, 신화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공교육은 필연적으로 공적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지배권력 강화수단의 도구가 되며 개인에게 모든 것이 귀책되는 고도의 불안속에서 오히려 개인의 사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된다. 한국 교육이 이렇게 방향타를 잘못 잡게 된데는 우선 5.31교육 대책이 있다. 5.31교육 대책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 교육과정은 크게 바꾼 7차교육과정을 낳은 대책이다. 당시 이 대책은 학습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대대적으로 명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강조했던 자율은 그간 정부에 의한 획일 및 타율로 강조되던 교육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는듯 했으며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의 전환도 이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5.31 교육대책은 당시 김영상 정부의 신자유주의 기조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율은 사실 교육적 자율이나 학습자 중심으로의 전환보다는 규제완화에 가까웠으며 경제적 개념인 수요자 중심 교육, 교육 소비자등의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는 개념들이 이 당시 도입되었다. 즉, 학습자 중심으로의 최초 방향전환의 기저에 경제적 논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어진 OECD의 영향도 마찬가지다. OECD는 경제협력모임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전 세계 교육현장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교육정책들을 개발해내고 있다. 우리 언론이 매년 떠드는 PISA도 이들의 작품이다. OECD는 경제기구에기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교육정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즉, 인간을 인적자원으로 이해하고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교육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전세계에 도입된 역량중심교육도 그러한 기저에서 탄생했다. 1997-20089데세코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역량중심교육은 향후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성장과 자본축적을 담보할 새로운 인간자본형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등장한 개념이다. 게다가 OECD는 언급한 PISA의 개발로 여러국가의 교육을 비교할 단일기존을 개발함으로써 더욱 깊이 여러 나라의 교육에 관여할수 있게 되었다. 교육의 시장화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맥락하에서 학습자 중심의 원리는 수요자 중심의 원리로 대체되게 된다. 학교는 시장화되고 학교별로 공개되는 성적 등의 지표가 수요자인 고객이 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맥락하에서는 개인 학습자에게 학습의 권한을 이양하는 자율은 학교와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하는 채무성의 개념으로 다가오게 된다. 학교와 개인은 무한 경쟁사회에서 스스로에게 생긴 문제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관리, 자기 경영 능력을 갖춰야하며 교육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관리할 책임 또한 단위학교와 개인에게 전가된다. 학교의 교사에게도 교사 책무성이 이러한 방향으로 강화되며 이로써 교사는 고립되고 단절된 교직문화에 빠지게 된다. 교육에 대한 회의감과 교사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야기된다. 이런 상황에서의 학생 선태권은 자신의 삶을 위한 유의미한 선택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오히려 선택을 위한 부모배경과 정보력이 무척 중요해지며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결과적으로 교육의 시장적 기제는 계급 양극화 된 사회를 고착화하고 불평등 구조를 심화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학습자 주도성의 방향은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책은 주도성은 개인이 자신의 세운 삶의 방향성에 따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역량 또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주도성은 자유의 개념이 내포되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의 응답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소중이 여길만한 삶을 영위하는 역량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실질적 자유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사실 다른 고유성을 지닌 개인들이 고유한 차이 속에서 함께-서로-존재 함을 의미한다. 즉, 실질적 자유는 제약이 없는 자유와 달리 가치와 윤리를 전제로 한다. 때문에 공교육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전제하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개별성과 독특성을 발현하면서도 같이 살아갈 힘을 길러주는 것이된다. 또한 개별학습자가 자신의 고유성을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발현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사회적 존재로써 총체적 잘 살기를 하도록 실천하는 책임성 있는 시민이 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을 담아내는 교육과정은 현재 학습자의 수준과 능력에 맞게 구성되어야 하되 낯선 세계와의 만남에서 오는 어려움 또는 지루함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교육이 교사, 또래, 중요한 경험과의 관계 맺기이므로 이를 중시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디지털 기술 위주의 학습자 주도성을 강조한 개별화 교육은 그렇지 못하다. 우선 디지털 기기에 의한 개별화 교육은 배움과 학습자간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에 의한 학습은 성공적인 경우엔 괜찮지만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이 학생에게 있는지 아니면 이를 활용해 지도한 교사에게 있는지 애매하게 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개별화 교육은 다른 문제점도 내포한다. 우선 학습자의 개별 특성을 양적 지표로 세분화하여 학습자의 특성을 파악할 있다는게 교육의 전제인데 이 경우 질적 특성과 정보가 배제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알고리즘에 의한 학습의 진정성도 부족해진다. 알고리즘 자체의 문제도 또 있다. 알고리즘은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설계과정에서 얼마든지 객관성은 사라지고 설계자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며 이로 인해 특정 집단 차별의 가능성도 생겨난다. 또한 개별교육으로 사회적 관계 맺기가 어려우며 책임의식의 양성이 어렵다는 점도 거론된다. 이런 점 때문에 책은 학습자 주도성을 올바르게 정의하고 고찰하며 최근의 흐름인 디지털 플랫폼, 인공지능, 빅데이터에 의한 개별화 교육을 맹신하지 말것을 당부한다. 또한 학습자 주도성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발현되기 어려운 만큼 교육 전문가인 교사에 의한 올바른 접근및 지도가 이루어질때 자신의 배움을 개쳑할 용기가 생겨나고 비로서 교육적 환경과 다양한 선택에 의한 학습자 주도성이 가능해진다. 책은 학습자 주도성에 대한 여러 교육집단의 생각도 드러내었는데 재밌었다. 학습자 주도성발현 촉진 요인으로 초등학생은 사고의 촉진상황, 분명한 목표, 권위 있고 신뢰할만한 교사, 다른 생각에 대한 여지를, 중고생은 분명한 목표, 정서적 지지, 평등, 소통과 존중의 환경을 초등교사는 단위학교의 자율성 보장, 정책적 경인, 혁신교육의 보편화, 교사 학생간 관계의 교차성을 중등교사는 교사별 교육과정 구성과 절대평가, 교육과정 유연화,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 풍토, 교사저문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연구자집단은 교사의 학습동기 설계, 학습 계열의 개방성, 교사권위와 신뢰감, 학생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꼽았다. 반대로 학습자 주도성의 저해 요인으로는 초등학생은 정답이 정해진 수업, 강압적이거나 지나치게 친구같은 교사, 피곤함 배고픔등 신체요인, 산만한 분위기를 중고생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수업, 너무 높은 목표, 소통의 부재, 노력의 배신을 초등교사는 주도성에 대한 오개념, 교사의 고정 관념, 정책의 획일성과 폭력성, 사회불안과 불평등을 중등교사는 경쟁적인 교육문화, 주도성에 대한 오개념, 입시와 직결된 평가, 교사의 재량권 부족을 연구자들은 기능을 상실한 평가, 경쟁적인 대학입시제도, 분절적 교육과정, 교사의 전문성 부족을 꼽았다. 책은 잘못오해되는 것처럼 학습자 주도성과 교사는 서로 반대개념이 아니며 학습자 주도성의 달성을 위해 교사의 적절한 교육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경제적 개념에 오염된 교육계의 개별적 선택 위주의 방향도 꼬집었으며 디지털 플랫폼에 의한 개별화 교육의 문제점도 잘 드러내었다. 실제 조사결과 학교 급을 막론하고 학생들은 교사변인을 학습자의 주도성을 발현하고 촉진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결국 미래시대의 학습자 주도성에느 교사의 학습자 주도성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인식을 토대로 한 교육과정 설계 및 개입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는 것이다. |
검토해야 할 것
"주체성 신화로 모험하는 수업은 '저요' '저요'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내용은 어수선하고 질적으로 빈약하며 아이들의 성장도 표면적이고 빈약하다." (p37)
"앞으로의 수업은 전달형의 일제식 수업 양식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개성적인 배움을 축으로 하는 활동적이고 협동적이며 반성적인 배움의 양식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p37)
(개성적인 배움을 축으로 하여 활동적이고 반성적인 배움의 양식으로)
STORY2 거짓 주체성이 만들어내는 것(수업 속의 형식주의)
손신호
"손신호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왜 스스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왜 직원회의에서 손신호로 진행할 것을 제안하지 않습니까?"(P40)
"아이들을 일방적인 조작의 대상으로 보는 수업, 교실의 이야기를 일상의 이야기와 분리하여 인위적인 게임으로 하는 수업에 대해서 자각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p41)
(손신호와 각종 게임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손신호는 아이들을 조작적으로 통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아이들의 사고와 감정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무시 당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고나 감정을 끊임없이 '찬성''반대''질문'의 세 가지로 분류하여 발언하도록 강제 당하고 있다. 일부는 찬성이고 일부는 반대인 의견이나 찬성도 반대도 아닌 의견은 처음부터 제외된다. 그러나 수업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은 이러한 애매하고 다의적인 의견일 것이다. 애매하고 다의적인 의견을 존중함으로써 교실에 개성적이고 다양한 인식이 성립되고 그 교류와 공유에 의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다 풍요롭고 깊이 있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p41)
"교사는 아이들의 더듬거리는 발언의 훌륭함을 이해할수 없다. 미묘하게 흔들거리는 애매모호한 사고나 모순 그리고 갈등을 안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굉장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P42)
"천천히 사물이나 사항을 생각하는 아이들과 더듬거리는 말로서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생각하는 아이는 '이해도가 떨어지는 아이', '발표의욕이 낮은 아이'로 무시당하게 된다. "(P42)
"더듬거리는 사고와 표현은 오히려 창조적인 사고와 표현에서 충분히 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더듬거리는 언어에 의해 탐색적으로 수행되는 행위이다."(P42)
거짓 주체성(p43) 위장된 주체성, 포장된 주체성
- 초등학교는 소란스럽고 중고등학교는 침묵이 지배한다. 반면 서구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더듬거리는 반면 중고등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초등학교에서부터 '거짓 주체성'을 추구하는 수업 때문은 아닐까?
"유치원, 소학교에서 지나치게 거짓 주체성을 강제당하고 있기 때문에 중학교나 고교에 들어가도 소학교시절에 길들여진 거짓 주체성에 저항하는데 정신을 잃어 자기 자신의 신체를 자유로이 살릴 수 없게 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p44)
-거짓 주체성에 저항하는 것 중에 '뽀로로 병맛'을 통해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 중심의 통제된 규범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반작용의 산물처럼 느껴진다.
"원래 거짓 주체성을 요구하는 교사의 의식 밑바닥에는 배우는 활동이나 내용과는 관계없이 교실의 질서나 통제를 용이하게 달성하려는 욕망이 있다. 재미가 없거나 무의미한 과제에 대해서 흥미를 보이지 않거나 활발하지 못한 아이들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하는 당연한 감각을 우선 교사 자신이 되찾을 필요가 있다. 어떤 과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 흥미, 태도'를 가진 아이는 지성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하며 논리적으로는 태만한 학습자이다. 교사 자신이 수업에서 편하게 지내려하는 안이한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늦어도 좋다. 더듬거려도 좋다. 아이들과 차분하게 좋은 시간을 보내자라는 의식으로 교실에서는 것이 정확한 해결책을 준비해준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들의 발언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으며 발언을 끝내거나 조직하기 전에 아이들 한명 한명의 말을 '듣는 일'과 '음미하는 일'로 교사의 의식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발언 잘하는 교실이 아니라 서로 잘 듣는 교실이다. 서로 잘 듣는 교실이 발언을 통해서 다양한 사고와 감정을 서로 교류시킬 수 있는 교실을 준비한다. 이 관계는 반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45~46)
(잘 듣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그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 할 수 있게 된다. 서로 듣는 관계의 구축은 어떻게 가능할까? 허용적인 관계, 수용적인 분위기, 귀기울이는 자세. 중요한 것은 들으려는 마음의 자발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학생들이 스스로 내적 동기에 의해서 듣게 만들 것인가? 듣고 싶게 만드는 말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렇다고 뛰어난 스피치맨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떤 화법이 어떤 내용의 것들이 학생들이 내적 동기를 끌어내어 듣고 싶게 만들 것인가? 아니 중심 축은 듣기 였는데 다시 말하기로 옮겨와져 버렸다. 뭐 이런노?????)
"배움은 궁금할 때 시작된다. 궁금함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 놓고 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은총과 같은 것이다." 반 매넌-가르친다는 것의 의미 중(p38)
STORY3 '대응'을 중심으로 한 배움과 수업
차분한 교실 VS 딱딱하고 건조한 교실/저요 저요 하지만 발언 경쟁이 과열된 교실
"왜 차분한 교실이 되면 다양한 사고가 이루어지고 수업의 전개가 역동적이 되는가?"(p47)
"차분한 교실에서는 교사도 아이도 주체성이라는 신화로부터 자유롭다. 차분한 교실에는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구축되어 있으며 으스대며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저절로 소중하게 다루어지며 인정되는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다."(p48)
'수동적 능동성'으로서의 주체성
"실제로 건강하고 활발하면서 자신감은 가득하지만 주위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대응력이 없는 사람만큼 저속하게 웃기고 귀찮은 사람은 없다."(P49)
"발표력이 있는 아이보다 가만히 있어도 잘 듣는 아이를 배움에서는 훨씬 우수하게 평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들의 통지표에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발언합시다.'라고 씌여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p50)
"발표력이 있는 아이보다 가만히 있어도 잘 듣는 아이를 배움에서는 훨씬 우수하게 평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들의 통지표에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발언합시다.'라고 씌여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p50)
(대단한 통찰이다. 수업에서 어떻게든 학생들의 발언을 끌어내려는 노력으로 살아왔는데 이건 완전히 내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발언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염화미소??? 해야 하는가? 학생들에게 꼭 말(발표)하지 않다도 된다고 말해야 할까? 친구나 선생님의 말을 듣고 새롭게 배우게 되었다면 그건 스스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말하지 않지만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하지 않더라도 글이나 그림이나 시나 수필이나 음악이나 문자나 카카오톡이나 뭐가 됐든 표현하고 싶을 때 그 때 표현하라고 해야할까?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나?)
"만약 교실에서 언어적 표현력을 기르고 싶다면 발언을 장려하기 보다는 듣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실은 지름길이 된다. 듣는 힘이 교실에서 길러졌을 때 비로소 교실에서의 언어 표현도 풍부해지는 것이다."
- 이 역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어린 아이가 말이 트였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 아이는 수 없이 많은 말을 듣었다. 말이 트이지 않았을 때도 그 아이는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적합한 반응을 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알고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은 말을 들은 후에야 우리 인간은 수없이 많은 말을 토해 낼 수 있는 결정적 시기를 거치게 된다.
- 들어야 말할 것이 있다. 듣지 않고 말 하는 것은 독백이다. 대화가 아니다. 독백은 자기 생각의 나열이다. 검증되지 않고 반성적 성찰의 여과기를 거치지 않은 RAW 파일이다. 듣는 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객관하시키고 분석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써 변증법적 고양의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더 높은 배움의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대응'으로서의 수업과 활동
'수동적 능동성=대응 이란?' 교재와의 대응, 교사 발언과의 대응, 친구 발언에 대한 대응, 자기 자신의 감정과의 대응이 배움이다.'
"교사의 말이나 교실 친구들의 말에 대한 대응으로 무엇인가가 환기되는 일, 그 환기된 것을 자기 자신의 말로서 만들어내어 그 말을 텍스트(교재) 내용이나 다른 친구의 말과 비교해가며 차이와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 이러한 개인과 개인이 서로 차이를 조정하며 맞추어가는 일이 배움의 역동적인 과정을 만들어 낸다."
교사부터 수업에서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수동적 능동성'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수업에서 아이들은 입을 다문다.
"쉬는 시간에 말 잘하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조용해 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사가 학생과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52 참조)
교사가 학생과 대응하기 위한 방법 (대응을 중심으로 한 수업)
1) 끊임없이 교실 속 아이들의 소리 없는 소리를 조심스럽게 듣는 신체로서 아이들 한명 한명과 대치하는 일
"배움을 풍요롭게 촉진할 수 있는 교사는 집단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실에 있는 것은 아이들 한명 한명이지 모두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인 과정에서도 한명 한명의 아직 소리가 되지 않은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이들의 신체의 이미지나 너울거리는 정서의 물결과 함께 공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와 말을 갖춘 교사의 교살에서 배우는 아이들은 행복할 것이다."(P53)
STORY4 '대응'하는 교사의 신체와 말 (아이들의 발언을 듣는 일)
Q. 어째서 교사는 아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일이 맞장구를 치고 일일이 평가하고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리해 버리는 것일까? (p56) 많은 회의 장면이나 수업 장면에서 사회자나 교사가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할까?
A. 아이들의 침묵을 못기다린다. 그리고 아이들의 듣고 잘 이해했는지 믿지 못한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응하는 신체(p57)
- 학생의 의견을 나의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 것은 아닌지? 나의 판단이 맞지 않을 수 있고 맞을 수도 있다. (p58 참조)
- 교사가 발표 하나하고 정리하고 발표 하나하고 정리하고 넘어가면 학생들의 사고는 분절되고 지루한 나열만이 이루어진다. (p59참조)
"아이의 발언을 듣는다는 행위는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아이와 캐치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이가 던진 공을 똑바로 받으면 던진 아이는 별 말을 건네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잘못 던진 공이나 빗나간 공을 똑바로 받아주게 되면 아이는 다음에는 보다 좋은 공을 던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캐치볼의 쾌감이 교사와 아이의 주고받는 일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교사는 자신의 수업 진행에 마음을 빼앗겨 아이들 한명 한명 하나하나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그 공에 달려 있는 아이의 생각과 공진(共振)하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한 주고 받음이 계속되면 잘못던진 공이나 빗나간 공 밖에 던지지 못하는 아이는 공 던지는 일 그 자체를 싫어하게 되고 만다. 그 결과 교사 글러브의 태세를 미리 알수 있는 뛰어난 아이만이 교사의 준비된 글러브의 위치를 향하여 공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수업을 정확하게 통제하는 일은 물론 교사에게 필요한 일이지만 그 이전에 교실의 캐치볼을 좋아하게 하는 일은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닐까? 나아기 캐치볼이 서툰 교사는 수업진행에 대한 의식 이상으로 하나하나의 공을 소중하게 정면에서 받아들이는데 모든 정신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p59~60)
- 드는 생각: 초등학교 저학년 글쓰기를 가르칠 때 바르게 쓰는 것을 강요하지 않고 지우개를 쓰지 않고 두줄 긋고 쓰게 해야 한다. 글 쓰기는 행복한 활동이라는 생각을 어릴 때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아이의 발언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p60~62)
아이의 발언을 이해한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
(1) 표면적 이해(Undetstanding) : 아이의 발언이 직접 지시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일
(2) 맥락적 이해(Appreciation) : 아이의 발언 만을 따로 때어 놓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표정과 감정과 기분과 처한 상황, 그리고 그 아이 발언의 맥락과 행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나 그 말의 의미의 애매함과 깊이를 읽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과 맥락을 통해 자신의 감정도 동화되어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적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들과 진정성 있는 대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적 이해를 위해 교사는 개별 학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에 둬야 한다.
-사또 교수는 Appreciation을 감상(鑑賞)으로 번역하고 있다. 감상에 대한 위키백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상(鑑賞)은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해하고 즐기는 일련의 과정이다. 작품을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발견한 결과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감상이 완성되므로, 감상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STORY5 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교류에 정성을 기울이자)
수업관의 혼란(P63)
"배움 중심 수업은 일제수업 이상으로 아이 한명 한명과 복잡하게 관계해야 한다."(P65)
"만남과 관계를 만들어 내는 활동이 교사 일의 중심축을 구성한다."(P65)
學에 대한 좋은 해석: 아이들의 교류에 대해 어른들이 정성을 다해 두 손으로 보살피는 모습이고 그 중심에 아이가 있다.
하지만 요즘의 학은 학의 약자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멀어져간다. (호리천리라 했다.)
사귀면서 배운다.(P66)
"스스로 배우는 힘도 물론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사회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질적인 타자로 부터 배우는 힘이다."(p66)
배움의 정의
"교사의 개입 밑에서 아이들이 자립하고 협동하여 수행하는 활동이 학교에서 배움의 본질이다."(p66~67)
배움을 수업에 중심에 놓는 일
"먼저 서로 배우는 관계를 교실에 구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통해 교재(세계)와 대화하고 타자(친구, 교사)와 대화하고 자신과 대화하게 된다. 이것을 활동적이고 협동적이며 성찰적인 배움이라고 한다. 결국 개(個)에서 출발하여 친구와 협동을 거쳐 다시 個로 돌아오는 배움이다.
하지만 문제는 요즘 아이들은 사물(세상)과 타자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는 비단 학생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인의 심각한 병리이기도 하다. 교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나와 관계없다'라는 무서운 허무주의가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러한 무관심과 허무와 싸우는 실천은 배움을 중심으로 하는 수업의 중심적 과제가 될 것이다.
이 세계에는 배울만한 가치 있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며 친구와 함께 배우는 일은 헤아릴 수 없이 행복한 일이며 그 배움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게 되며 나아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교사 자신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요구된다.
요즘 아이들은 교실에서 주위의 몇 명의 내에서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그들의 신체는 자신을 중심으로 불과 1미터 범위 안에서 머무른다. 이러한 아이들을 교실의 한쪽 구석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먼 친구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만들기까지는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의 도전이 반복되지 않으면 않된다. 그러나 우선은 주변의 가까운 친구의 생각에 흥미를 느끼는 것만이라도 좋다. 교사의 말에 축발되어 조금씩 먼 친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만이라도 좋다. 교실에서 교류하며 서로 성장하는 관계를 구축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작은 시도에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69~70 요약)
STORY6 개와 개의 조정(오케스트레이션으로서의 수업)
테일러링과 오케스트레이팅
"오늘날의 수업형태가 일제수업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집단으로 교사에게 의식되어 있기 때문이다."(p73)
(교사에게 아이들은 집단으로 의식되는 점은 편의성 때문이리라. 교실의 아이들을 일반화된 집단으로 의식할 때 아이들은 수업의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고 변방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활동적인 수업을 하더라도 아이들을 일반화된 집단으로 의식한다면 교사는 아이들과 인격적인 만남과 대응은 불가능하며 단지 기계적인 반응만이 반복될 뿐이다. 그 앞으로 다가가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그 꽃은 나와 무관하다. 아이 앞에 다가가 그 애를 개별적 인격체로서 불러줄 때 아이와의 만남과 대응은 가능해 진다. 교사는 예민한 촉수를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존재이다. 그래야 아이는 교사에게 배우려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작업하는 동안 오직 아이 한명 한명의 아이디어를 메모하여 다음의 전개를 준비한다. 어떤 교실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 대한 일대 일의 테일러링은 따라 갈 수 없는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교사자신이 수업의 전개 가능성을 다른 시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교사는 학급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교류시키는 오케스트레이팅의 활동 가운데에서도 테일러링의 의식을 계속 지닐 필요가 있다. 집단적인 사고나 탐구가 행해지고 있을 때에도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움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과 서로 교류하고 교재의 어떤 내용을 심화시키면서 발전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수업의 중심문제이기 때문이다." (p74)
'異交通'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사노하라(교토대학의 철학자 및 시인) 그의 저서 『말의 교통론』에서 '교통(커뮤니케이션)'을 네가지 유형으로 개념화한다.
1) 단교통 : 일방적인 이야기
2) 쌍교통 : 서로가 통하는 이야기
3) 반교통 : 거절되고 차단되는 이야기
4) 이교통 : 서로 엇가리는 이야기
쌍교통도 중요하지만 교사는 '이교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업 중에 교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아이가 할 수 있다. 교사는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아이의 의견을 듣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는 교사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칫 무시하기 쉽다. 교사가 일단 무시하거나 배제해 버리면 그 아이는 두 번 다시 발언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누구라도 자존심 상하는 행위를 즐겨가며 계속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아이의 발언과 행동에도 그 아이 나름대로의 이치의 세계가 있다." (p77)
아이가 이교통의 발언을 할 때 교사는 자칫 학생이 헛소리 한다고 오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이교통에 대해서도 평정심을 잃어서는 않된다. 교사의 전문성은 여거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이교통의 발언이 있을 때 나는 '왜?' 또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라고 물어보는 경향이 있었다. '왜?'라는 질문은 약간의 공격적인 뉘양스를 띤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보라는 압력이 느껴진다.
맥락과 과정을 사고의 영역으로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니?",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니?"라고 물어보려고 노력한다.
"이교통의 이야기 속에 그 아이 자신의 이치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을 과제로 삼으면 교실의 커뮤니케이션은 두텁고 넉넉하게 전개된다. 반대로 교사가 이교통의 이야기에 대해서 둔감하면 교사의 생각대로 수업은 진행될지 모르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표면적이고 얄팍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p78)
(그렇지 않으면 수업은 표면적이고 알팍하고 건조하고 생동감 없으며 새로운 의미도 창조되지 않는 수업이 될 것이다.)
STORY7 서로 배우는 교실의 창조(숨결을 호응시키는 일)
하라다 선생님과 민들레 같은 아이들
PART2 수업이 바뀐다. 학교가 바뀐다.
STORY1 학교를 안에서부터 바꾸기
학교는 강연으로 바뀌지 않는다. 학교를 바꾸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교실을 서로 열고 수업을 서로 비평하는 연수를 축적해 가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P92)
논의 사항: 학교에서 교사들 끼리 협력적 동료성이 필요할까? 요즘 젊은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교사들이 교실을 서로 열고 상호간에 전문가로서 함께 성장하는 '동료성' 관계를 구축하는 일 없이 학교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P94)
논의사항: 교사는 자신의 교실을 동료들에게 오픈해야 할까?
"교실을 닫고 있는 교사는 공교육의 교사라고 부를 수 없다. 자신의 교실을 사물화하고 아이들을 사물화하고 교사의 일을 사물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94)
"오늘날 학교를 고착시키고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문부성이나 교육위원회의 관료적인 통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학교 내부의 동료 간의 권력관계이다. 교실의 벽, 교과의 벽이 학교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인 것이다. 모든 교사가 교실을 열고 이 권력관계를 안에서부터 깨부수지 않으면 학교개혁을 수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P95)
STORY2 교실을 서로 열기
교내연수에서는 수업의 구체적인 사례를 비디오기록을 보면서 참가자 전원이 서로 검토한다,. 사례연구의 목적은 수업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업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서로 공유하는데 있다. 수업 중에 일어나는 일은 매우 복잡하다. 얼핏 보기에 단순하게 보이는 사항 속에 숨겨져 있는 복잡성을 읽어내지 못하면 안된다. 서로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말을 배제하고 관찰한 사례에 입각하여 소박한 인상과 구체적인 사실만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박하게 느낀 것을 교류할 수 있게 되면 놀랄 만큼 많은 사항을 배우게 될 것이다. (p87)
논의사항: 교사에게 있어 수업의 어려움은 무엇인고 즐거움은 무엇일까?
"방어적인 자세나 불만을 말하거나 결점을 지적하는 연수방식이야말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업연수는 결코 수업의 잘된 부분이나 서투른 부분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업의 '좋고 나쁨'을 의론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수업연수의 목적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수업에서의 어려웠던 점과 재미있었던 일을 함께 공유하는데 있다. 우선 수업의 어디가 재미있었는가를 서로 이야기하는 일, 수업의 어디가 어려운가를 서로 공유하는 일, 그리고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에서 항상 아이들이 배우는 구체적인 모습을 상기시키는 일, 그러한 연수를 모든 교사들은 요구하고 있다." (p103)
STORY3 교내연수의 세 가지 원칙
(1) 아이들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수업
#수업에서 교사의 마음 가짐: 배움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
논의 사항: 저자가 교사가 배워야 할 것은 훌륭한 수업이 아닌 아래의 지적과 같이 관계 만들기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내 연수의 주된 목적은 훌륭한 수업 만들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수업 기술은 서툴러도 좋다. 무엇보다 소중히 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 한명 한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교사와 아이들과의 관계와 아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즉, 어떤 아이도 안심하고 마음을 열고 수업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움을 서로 격려하는 관계를 교실에 만드는 일이다."(104)
논의사항: 아래 밑줄의 것을 수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교사의 수업관은 무엇일까?
"교사의 발문이나 교재의 해석보다도 아이들의 배움이 구체적인 실상과 그것들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서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 한명 한명의 중얼거림과 당황감을 교사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교사는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의 배움으로 발전할 싹을 짓밟아버리는 대응을 한 적은 없는가? 예기치 못한 아이들의 반응에 대해서 교사는 유연하게 잘 대응하고 있는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을 행하였는가? 등등이다." (P105~106)
논의사항: 차분한 어조로 이루어지는 수업 내 대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까?
"수업 속에서 아이들 한명 한명의 존엄이 존중되고 있는가의 여부는 교실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존중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움이 격려되고 서로 배우는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신체는 부드럽고 자상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이 오간다." (p106)
"바꾸어 말하면 차분한 공기와 온화한 목소리가 교실에 되살아나게 되고 그리고 아이들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한 대응을 통해서 교실이 편안한 숨결을 만들어내는 교사"
Q. 왜 듣기보다 말하기가 중시되었을까? 제대로 배웠는지 확인하는 것을 중시, 적극적으로 앎을 표현하는 것이 좋은 수업이라는 신화, 듣기는 수동적으로 여기고, 말하기는 적극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주체성 신화 안에서 '말하기'가 격려된다. 이 때문에 거짓 주체성이 생겨났다.
(2) 듣는 것을 중심으로 한 교실만들기
"배움은 일반적으로 능동적인 행위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능동적인 행위 앞에 수동적인 듣기라는 행위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배움이란 마음과 신체를 타자에게 열고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수동적 능동성'에 의해 실현되는 행위이다." (108)
"서로 듣는 교실을 만드는 첫걸음은 우선 교사 자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주의 깊고 정중하게 듣는 일을 끈기 있게 계속하는 일이다." (p09)
(3) 자신의 과제로 수업만들기에 도전하기
"교가 각자가 자신의 과제를 가지고 수업연구에 임하는 일이다. 창조적인 수업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도전해야 할 과제를 선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p110)
"연수과제는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지고 정하는 것이며 연구부는 그러한 것을 총괄하여 각자의 수행을 원조해야 하는 것이다." (p111)
STORY4 학교조직을 단순화하기 (연수를 중핵에 두기 위하여)
논의사항: 아래 네 가지 항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나의 시도: 일년에 유리창 교체비용이 1,400만원인 한 중학교의 실험
1) 어디서나 학생에 대한 험담하지 않기
2) 수업에서 모둠끼리 서로 협력하여 배움을 나누는 과정을 넣기
3) 주1회 수업 나눔활동
4) 업무분장을 없애고 주1회 직원회의 하기
성과: 성과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수업 중 아이들의 모습이 밝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거칠던 교내폭력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창문유리 등의 기물 파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변화보다더 교사들의 변화가 현저하게 눈에 띄였다. 어색하게 시작된 매주 교내연수를 통한 수업연구와 격주로 실시된 학년과 교과별 수업연구였지만 몇 개월 지나자 웃음이 넘치는 즐거운 모임으로 정착되었다. 중학교 수업연구에서는 교과의 벽이 두껍고 타 교과 수업에 대해서 솔직하게 의견을 서로 이야기하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곤란하지만 이 학교에서는 처음에 저자가 수업에 넣도록 제안한 '활동', '협동', '표현'의 3가지 요소를 끊임없이 공통화제로 삼음으로써 이 교과의 벽을 가볍게 극복하게 된 것이다.(p116)
(위 내용을 보면서 수업 중에 여교사를 교탁 위에서 누워서 찰영했던 학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 학교도 이렇게 수업을 바꿈으로써 학교를 바꿀 수 있을까? 배공에 희망이 있을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우리 교육에 희망은 없을지도 모른다.)
PART3 교육과정을 디자인한다.
STORY1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의 교사는 배움을 디자인하는 교육과정만들기의 능력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143)
(와~ 이런 선언적 주장을 하다니? 사실 유럽에서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아직까지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국가수준교육과정이 있고 학교수준교육과정이 있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교육과정이다. 교사 스스로 자신의 교육과정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실행하교 피드벡할지에 대한 마스터플랜과 방향성은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준비가 되었을까?)
1) 활동주제: 여러분이 알고 있는 교육과정의 유형을 찾아서 의미를 밝히고 이를 이미지로 구조화 하시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교육과정의 정의를 내려보시오.
"교육과정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배움의 경험'이다."(p144)
- 교육과정을 구조화하는 세 가지 기준 : 계획된 교육과정, 실행한 교육과정, 학습된 교육과정
2) 아래 세 가지 활동에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찾아보시오.
"교육과정만들기는 세 가지 활동으로 진행된다.
1) 배움의 경험에 대한 디자인
2) 배움의 경험을 창조하는 '교실실천'
3) 배움의 경험에 대한 '성찰과 평가'
교육과정만들기의 역량은 교사 전문성의 중핵이다." (p145)
STORY2 '배움의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일본에서는 가르치는 교육과정은 면밀하게 계획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에 반애 배움의 교육과정은 빈약하게 디자인되고 있다.
배움의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디자인하게 되면
1) 아이들은 지적 관심을 기초로 하는 단원 주제
2) 주제를 탐구하는 자원이 된는 소재나 재로
3) 아이들의 탐구활동과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학습환경이 교육과정의 중심과제가 된다. (p146~147)
3) 이 문장의 의미가 뭘까?
"배움이란 교육내용인 대상세계(사물)와의 만남과 대화이며 그 과정에서 수행되는 다른 아이들의 인식이나 교사의 인식과의 만남과 대화이며, 새로운 자기자신과의 만남과 대화이다. 배움은 세계 만들기(인지적실천)와 친구만들기(대인적 실천)와 자기만들기(자기내적실천)의 세 가지 대화적 실천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P147)
배움의 과정은
"세상과의 만남, 타자와의 만남, 자신과의 만남을 협동적이고 활동적이며 반성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 낼 때 이를 배움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p147)
지금까지는 '목표-달성-평가'라는 계단형이었다면 이제는 '주제-탐구-표현' 이라는 등산형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
- 교사 교육과정 구성의 3요소: 주제, 탐구, 표현
4) 계단형 교육과정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학교육에서 단원은 '목표-달성-평가'의 단위로 조직되어 왔다. 교육내용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그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그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활동을 수업과정에 조직하고 그 달성도를 목표에 비추어 테스트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행동주의 패러다임)
이 '목표-달성-평가'를 단위로 하는 단원은 '계단형'교육과정을 구성하고 다량의 지식이나 기능을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을 가능하게 해 왔다. 그러나 그 폐해도 명백하다. 계단형 교육과정에서 배움의 경험은 협소하고 획일적이며 평가는 간단하지만 일원적이다." (P147~148)
5) 목표가 주제로, 달성이 탐구로, 평가가 표현으로 바뀌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앞으로 학교교육의 단원은 '주제-탐구-표현'을 하는 단위로 '등산형'교육과정으로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교육내용의 핵이 되는 주제를 설정하고 아이들이 다양한 접근을 통해 활동적, 협동적으로 탐구활동을 전개하고 그 성과를 표현하며 서로 공유하는 배움의 창조이다." (p148)
STORY3 총합학습은 왜 혼란스러운가?
주제중심 창체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이론가와 행정가들의 놀음에 놀아나는 것이다.
교사가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 살아가다면 자신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주제를 자신의 방식대로 열심히 가르쳐 왔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주제중심 창체 활동으로 행정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로 하여금 미래의 시민들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쳐야 할지에 대한 교육철학적 고민을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교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7) 민주시민교육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러한 수업이 필요한 이유와 학교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은?
"그것은 많은 교사들이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고 ~ 열쇠인 것이다."(p151)
STORY4 총합학습과 교과학습
창체는 경험, 교과학습은 지식이라는 이원론에 빠져 총합학습은 활동중심, 교과학습은 지식주의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배움에서 이 둘은 서로 상보적이지 배타적이지 않다. 총합학습은 현실적인 문제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지식과 경험을 단원으로 조직하고 교과학습은 교과의 내용을 핵으로 하여 지식과 경험을 단원으로 조직한 것이다.
따라서 모두 '배움'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외견상 이 둘의 차이는 없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넘나들어도 된다. 창체의 내용이 교과 안으로 들어고 역으로 교과를 확장시켜 창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STORY5 총합학습의 탄생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소학교 3학년 학생들의 바다생물 주제탐구 학습 사례
자기 동네의 바다에 무관심 했던 아이들이 점차 바다에 관심을 갖고 각자 자신이 원하는 탐구주제를 만들고 실천하고 표현했던 사례
STORY6 총합학습의 즐거움
후지시 히로미소학교 4학년에서 '물'을 주제로 주제통합창체를 진행한 사례
처음에는 음료수와 생활폐수를 조사하기로 했다가 후지시의 하수도 문제를 학부모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탐구하게 된 사례
(지질적 문제, 도시역사적 문제, 행정적 문제, 예산 문제 등)
총합학습은 교과의 총합이나 크로스가 아니다. 총합은 아이와 지역의 통합이며, 교사와 아이, 학부모의 통합이다. 아이들의 삶과 배움이 통합된다면 그 안에서 교과가 통합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따라서 주제중심 교과의 통합 수업은 그 자체로 목표일 수 없고 단지 통합된 배움에서 나타나는 과정이거나 결과이다.
STORY7 총합학습을 창조하는 교사
미애현 이세시 다이죠소학교 오오니시교사의 녹미채(톹) 총합학습 사례
STORY8 시민성 교육과 배우는 방식을 배운다.
창의적 체험활동, 주제중심, 교과통합수업의 의의: 시민교육, 배우는 방법을 배운다.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주제탐구 프로젝트 학습은 미국에서 테마학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아동중심주의의 100년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STORY9 정답이 없는 배움
8) 수업에서 정답은 있어야 하는가? 도덕과는 어떠한가?
- 스위스 환경보호 관계자 말로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철수하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자연은 엉망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사실 스위스 환경보호는 관광개발에 의해 가능했다. 관광지로 개발함으로써 산림의 난개발을 막고 동시에 자연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의 개발과 사업개발을 환경파괴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중학생들에게 있어서 이 발언은 신선했다." 관광개발이 환경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스위스 사례와 우리 나라 사례를 잘 비교해 보아야 한다. 스위스 사례를 절대화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양심있는 학자들의 환경영향평가가 중요한 것이다.
- 정답에 있어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 양쪽 입장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판단을 근거로 하여 장기적으로 지구와 인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보고 결정해는 것이 바람직하다.
STORY10 현실로부터 배운다. (p171)
9) 거절하는 노인에서 총합학습이 실패한 이유와 성공하기 위해 가져야할 관점은 무엇이었을까?
STORY11 '자주성, 주체성'이라는 기만 (p176)
- 학생들은 스스로 탐구 주제를 설정, 계획 수립, 연구과제 수행, 보고서 작성, 발표까지 자주적 주체적으로 할 수 있을까?
-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
- 자주성, 주체성 가면 뒤에 교사는 무책임이라는 기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이들 개개인이 스스로 계획을 세워 자력으로 해결하는 배움은 학교에서 조직해야 할 배움이 아니다. 학교는 교사의 도움이나 친구와 협동으로서 자기 혼자서는 달성할 수 없는 수준 높은 배움을 실현하는 장소이다.
- 이 주장은 타당한가? 타당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 아이들에게 관심 있는 주제 찾아서 탐구계획서 만들어봐. 라고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과 어떤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는 '인트로'가 필요하다. 어떤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도록 해주고 그 안에서 친구들과 모둠 만의 세부 탐구 과제를 찾아 낼 수 있도록 독려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세부 과제를 찾으면 그 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교사는 판단하고 간접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STORY12 '공부'로부터 '배움'으로의 전환
- 총합학습은 한마디로 학습으로부터 배움으로의 전환이다.
- 총합학습에서 창출된 배움이 교과학습 개혁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총학학습실천은 교육과정 전체의 개혁을 이끌어갈 수 있게 된다. (정말 지당한 말이다. 창체, 자유학기제 등이 일반 교실의 수업을 학습에서 배움으로 만들어내는 기폭제가 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여전히 배움에서 소외된 학습 노동만을 강요당할 것이다.)
- 좌학에 의핸 공부는 사실 지식중심도 아니다. 맥락이 빠져버린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정보'이다.
- 정보를 잘 아는 학생이 우승하는 퀴즈쇼가 '장학퀴즈'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인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정보가 삶과 연결되어 문제를 찾고 해결방안 마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주적인 민주시민을 길러내야 하는 것이다.
- 공부와 배움을 구분한다. (동의하는가?) P177~
- 배움을 위한 조건: 매개된 활동 조직, 협동의 실현(호혜적 배움), 표현과 공유
(이미지 파일 넣기)
STORY13 '공부'로부터 '배움'으로의 전환
- 분수는 割合이라고 하는데 割이란 뭘까? 접시 깨기요. 반찬 나누기요. 그럼 집집마다 반찬을 어떻게 나누는지 살펴볼까?
- 구구셈이 서툴러 나눗셈을 못하는 아리가 '나는 알고 있지'라며 말하고 자기 집에 형제가 여섯명 그리고 아빠, 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 네 분이 계셔서 반찬을 어떻게 나누는지 설명한다. 구구셈이 서툰 아리가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호혜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 이러한 관계에서 배움은 삶의 맥락 안에서 활동적이고 협동적으로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총합학습은 한마디로 학습으로부터 배움으로의 전환이다.
STORY14 협동적 탐구를 조직하다
- 수업을 볼 때 어떻게 보고 나누어야 할까?
수업연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관할 교실의 사실을 생생하게 서로 이야기하고 수업의 재미있는 점과 어려움을 서로 이해하는 일이다. 창조적인 실천과 연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교실에서 일어난 많은 것들을 서로 공유하는 참심하고 아름다운 정신다. (p190)